[고대 근동] 바지 왕조(Bazi Dynasty)의 바빌론 통치 : 짧은 존재감, 깊은 흔적
1. 역사 속 그림자, 혼돈의 연속 : 바지 왕조의 출현 배경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심장, 바빌론은 기원전 11세기경 길고 긴 암흑기를 통과하고 있었다. 강력했던 카사이트 왕조(Kassite dynasty)가 엘람(Elam)의 침공으로 막을 내리고, 이신 제2왕조(Second Isin dynasty)가 잠시 부흥을 꾀했지만, 아람족(Arameans)과 수투족(Sutu) 같은 유목민들의 끊임없는 침입은 바빌로니아 전역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이 시기는 기록이 부족하고 왕들의 통치 기간이 짧으며,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극도로 약화된 시기였지. '메소포타미아 암흑기'라 불리는 이 시기에, 왕조의 흥망성쇠는 그야말로 번개처럼 짧고 예측 불가능했다.
시랜드 제2왕조(Second Sealand dynasty)가 단 20여 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 후, 바빌론은 다시 한번 새로운 왕조의 손에 놓였다. 그 이름도 생소한 '바지 왕조(Bazi Dynasty)'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바지(Bazi)'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아마도 부족이나 특정 지역의 이름에서 왔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왕조는 약 20년간 바빌론을 통치했는데, 불과 세 명의 왕이 차례로 즉위했을 정도로 그 존재는 짧고 단편적이었다. 하지만 이 짧은 존재감 속에서도 바지 왕조는 암흑기 바빌론의 불안정성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 기억된다.
2. 왕조의 여명과 세 명의 왕 : 베일 속의 통치자들
바지 왕조는 바빌론 왕 목록(Babylonian King List) 상에서는 '제6 왕조(Dynasty VI)'로 분류되며, 그 통치 기간은 기원전 1004년부터 기원전 984년까지로 기록되어 있다. 이 짧은 20년 동안, 세 명의 왕이 차례로 왕좌에 올랐다. 이들에 대한 정보는 극히 제한적이라, 그들의 통치 업적이나 세부적인 행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대부분의 기록은 다른 왕조의 비문에 잠깐 언급되거나, 왕 목록에 이름과 재위 기간만 남아있는 정도이다.
1) 에울마쉬-샤킨-슈미(Eulmash-shakin-shumi, 재위 기원전 1004–997)
그는 바지 왕조의 창건자로 알려져 있다. 앞서 시랜드 제2왕조의 두 번째 왕으로도 언급된 적이 있는데, 이는 이 시기 왕 목록의 해석에 따라 학자들 사이에 약간의 견해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바지 왕조의 시조로 간주되는 그는 혼란스러운 바빌론을 장악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 노력했지만, 외부의 위협과 내부의 불안정 속에서 그의 통치는 순탄하지 않았을 것이다. 7년이라는 재위 기간은 당시 상황에서는 비교적 짧지 않은 기간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의 치세 동안 어떤 큰 변화나 안정화가 이루어졌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2) 닌우르타-쿠두리-우수르 1세(Ninurta-kudurri-usur I, 재위 기원전 996–991)
에울마쉬-샤킨-슈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전쟁의 신 닌우르타(Ninurta)와 관련이 있는데, 이는 당시 바빌로니아를 둘러싼 끊임없는 전쟁 상황을 반영하는 이름으로 볼 수 있다. 5년간의 통치 기간 동안 그가 아람족이나 다른 침입자들과 어떻게 맞섰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짧은 통치 기간은 그의 권력이 매우 불안정했음을 시사하는 지표가 된다.
3) 시리크툼-슈카무나(Shiriktum-shuqamuna, 재위 기원전 991–984)
바지 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역시 그의 재위 기간은 7년 정도이다. 그에 대한 정보는 닌우르타-쿠두리-우수르 1세보다도 더 부족하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왕조가 어떤 방식으로 몰락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전무하며, 이는 당시 바빌론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로 작용한다.
이 세 명의 왕들은 모두 전임 왕으로부터 평화롭게 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들의 통치 기반은 매우 취약했고, 주변 상황의 격변에 크게 흔들렸을 것이다.
3. 끊이지 않는 혼란 : 아람족의 그림자 속 바빌로니아
바지 왕조가 존재했던 시기는 메소포타미아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특히 바빌로니아의 핵심적인 문제는 아람족의 지속적인 침입과 정착이었다. 아람족은 유목 생활을 하며 메소포타미아 평원 곳곳으로 파고들어 정착지를 형성했고, 이는 바빌론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약화시켰다. 도시들은 고립되고, 주요 교역로는 안전하지 않았으며, 농업 생산량도 감소했다. 아람족의 압력은 바빌론의 왕들이 제국 전체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어렵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 시기에는 정치적 불안정성뿐만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혼란도 극심했다. 농토가 황폐해지고 인구가 감소했으며, 대규모 건축 사업이나 문화적 활동에 투자할 여력도 없었다. 이전 시대의 위대했던 문명적 성취가 침체기를 겪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왕들의 짧은 재위 기간과 기록의 부재는 이러한 총체적인 불안정성을 반영한다. 당시의 문서들은 대부분 파편적이거나, 극히 제한적인 내용만을 담고 있어 역사가들이 이 시기를 재구성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게 한다.
또한, 바지 왕조는 북쪽의 강대국인 신아시리아 제국의 위협에 직면해야 했다. 비록 이 시기 아시리아는 이신 제2왕조 시대만큼 강력한 바빌론 정복 정책을 펼치지는 않았지만, 끊임없이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아시리아와 아람족이라는 양쪽의 압력 속에서 바지 왕조는 그야말로 샌드위치 신세였다고 할 수 있다.
4. 바지 왕조의 미미한 흔적과 역사적 의미
바지 왕조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역사의 흐름 속에서 차지하는 직접적인 중요성은 미미하다고 평가된다. 그들의 치세 동안 대규모 군사적 정복이나 위대한 문화적 업적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거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지 왕조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는 분명 존재한다.
암흑기의 단면 : 이 왕조의 존재 자체가 메소포타미아 암흑기의 극심한 혼란과 단편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중앙 권력이 무너지고, 여러 세력이 난립하며, 통치 기반이 불안정했던 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바지 왕조는 특정 혈통이나 강력한 기반 없이도 왕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그야말로 '힘의 공백기'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바빌론 문명의 연속성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짧은 왕조들은 바빌론이라는 이름의 계승을 끊지 않았다. 비록 외부의 압력과 내부의 분열로 얼룩진 시기였지만, 왕 목록에 그 이름들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바빌론의 왕위 계승이 형식적으로나마 이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훗날 바빌론이 다시 강성한 제국으로 부활할 수 있는 문화적, 정치적 연속성의 최소한의 기반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연구의 과제 : 정보의 부족은 역설적으로 역사가들에게 더 많은 연구 과제를 던져준다. 바지 왕조와 같은 '잃어버린' 시대에 대한 추가적인 고고학적 발굴과 문헌 분석은 당시 메소포타미아의 전반적인 사회, 경제, 정치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다. 이는 암흑기 전체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기여할 것이다.
5. 역사의 전환점을 향하여 : 바지 왕조 이후의 바빌론
바지 왕조는 기원전 984년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바빌론 왕조 목록’을 살펴보면, 그 뒤를 이어 바빌론의 왕좌는 다시 다른 짧은 왕조인 엘람 왕조(Elamite Dynasty, 불과 몇 년 통치)와 'E' 왕조(Dynasty 'E', 통치 기간 미상) 등의 손에 넘어간다. 이 시기에도 아람족의 압력은 여전했고, 바빌로니아의 혼란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극심한 불안정기 이후, 바빌론은 점차 안정을 되찾기 시작한다. 특히 기원전 9세기 이후에는 다시 강력한 왕들이 등장하여 바빌로니아의 재건을 시도한다. 바지 왕조와 같은 단명 왕조들이 점철된 시기는 바빌론이 외부의 위협과 내부의 혼란 속에서 스스로의 생존 방식을 터득하고, 새로운 정치적 기반을 다지는 전환점이었다고 볼 수 있다. 마치 늪지를 건너기 위한 짧은 디딤돌들처럼, 바지 왕조는 그 시대의 혼란 속에서 바빌론이라는 문명을 다음 시대로 이어주는, 비록 작지만 중요한 하나의 다리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