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29일 금요일

[고대 근동] 바빌론 제8왕조(E) : 잃어버린 시간의 기록, 기원전 974년 ~ 732년

[고대 근동] 바빌론 제8왕조(E) : 잃어버린 시간의 기록, 기원전 974~ 732

 

1. 암흑기를 넘어선 긴 여정 : 8왕조(E)의 서막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론은 기원전 11세기부터 10세기 초에 걸쳐 극심한 혼란의 시기를 겪었다. 카사이트 왕조(Kassite dynasty)의 쇠퇴와 함께 이신 제2왕조(Second Isin dynasty), 시랜드 제2왕조(Second Sealand dynasty), 바지 왕조(Bazi Dynasty), 그리고 엘람 왕조(Elamite Dynasty)와 같은 짧은 왕조들이 바빌론의 왕좌를 스쳐 지나갔다. 이 시기는 아람족(Arameans)과 수투족(Sutu) 같은 유목민들의 끊임없는 침입으로 바빌로니아의 중앙 권력이 마비되고, 도시들이 고립되며 기록이 극히 드물었던 '메소포타미아 암흑기'였다.
 
이 혼란의 터널을 지나, 바빌론의 역사는 기원전 974년부터 기원전 732년까지 무려 240여 년간 이어진 왕조의 시대로 접어든다. 학자들은 이 왕조를 '8왕조(E)' 또는 간단히 '왕조 E'라고 부른다. 'E'라는 표기는 이 왕조의 정확한 기원이나 명칭이 불분명하고, 주로 왕 목록인 'E 리스트'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사용된다. 이 긴 시간 동안 바빌론은 암흑기의 여파를 벗어나 안정을 되찾으려 노력했지만, 동시에 북방의 거대한 위협, 즉 신아시리아 제국(Neo-Assyrian Empire)의 그림자 아래에서 고독한 투쟁을 이어가야 했다. 8왕조(E)는 바빌론이 다시 일어서려 애썼던 고난의 시대이자, 동시에 다음 세기 신바빌로니아 제국(Neo-Babylonian Empire)의 영광을 위한 씨앗을 뿌린 전환점이었다.
 

2. 베일에 싸인 정체성 : '왕조 E'의 연구 과제

 
'8왕조(E)'라는 명칭 자체가 보여주듯이, 이 왕조의 구성과 성격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주요 자료는 바빌론 왕 목록(Babylonian King Lists)과 연대기(Chronicles) 등의 단편적인 기록들이다. 이 기록들은 왕들의 이름과 짧은 재위 기간을 알려주지만, 그들의 통치 업적이나 구체적인 통치 방식, 그리고 왕조의 연속성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매우 부족하다.
 
이러한 정보 부족은 여러 요인에 기인한다. 첫째, 초기 통치기에는 여전히 아람족의 침입이 격렬하여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미약했고, 체계적인 기록을 남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둘째, 신아시리아 제국과의 끊임없는 충돌 과정에서 많은 기록들이 파괴되거나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셋째, '왕조 E'가 특정한 단일 왕조 혈통을 유지했다기보다는, 바빌론 내부의 여러 부족이나 유력 가문들이 혼란 속에서 번갈아 왕좌를 차지했던 시기를 통틀어 부르는 명칭일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시기를 '왕조'라는 단일 개념으로 묶기보다는, 바빌론 역사상의 긴 '기간'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8왕조(E)'에 대한 연구는 파편적인 자료들을 엮어 역사를 재구성해야 하는 복잡한 과제이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역사가들에게 이 시기의 바빌론이 어떻게 생존하고 발전했는지에 대한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흥미로운 탐험을 제공한다.
 

3. 끊임없는 도전 : 아람족과 아시리아의 압박

 
8왕조 (E)의 통치자들은 두 가지 거대한 도전에 직면했다. 하나는 내부적으로 확산된 아람족의 세력이었고, 다른 하나는 북방에서 끊임없이 확장해오는 신아시리아 제국이었다.
 
  • 아람족의 영향력 : 암흑기 동안 메소포타미아 곳곳에 정착한 아람족은 바빌로니아의 주요 도시들과 농경지에 위협을 가했다. 이들은 자체적인 정치 단위인 '베이트(Bit)'를 형성하며 바빌론 왕들의 통제를 벗어났다. 바빌론의 왕들은 이러한 아람족 세력들을 통합하거나 최소한 그들의 침입을 저지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아람어(Aramaic language)는 이 시기부터 메소포타미아에서 아카드어를 대체하기 시작하며 점차 일상생활과 행정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는 인구 구성의 변화와 문화적 혼합을 가져왔음을 의미한다.
  • 신아시리아 제국의 그림자 : 이 시기 가장 결정적인 외부 압력은 신아시리아 제국이었다. 기원전 9세기부터 아시리아는 아슈르나시르팔 2(Ashurnasirpal II, 재위 기원전 883-859)와 살만에세르 3(Shalmaneser III, 재위 기원전 859-824) 같은 강력한 왕들을 필두로 메소포타미아 전체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아시리아 왕들은 정기적으로 바빌론을 침공하거나 조공을 요구하며 영향력을 행사했고, 때로는 바빌론의 왕위 계승에 직접 개입하기도 했다. 바빌론의 왕들은 아시리아의 압력에 맞서 저항하거나, 때로는 외교적 유화책을 쓰거나, 심지어 아시리아의 속국임을 인정하며 명맥을 유지해야 했다. 이는 바빌론의 자주성을 크게 훼손시켰지만, 한편으로는 완전한 멸망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했다.
 

4. 고난 속의 부흥 노력 : 왕들의 재건 사업

 
이러한 위협 속에서도 제8왕조(E)의 일부 왕들은 바빌론의 재건과 전통 유지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 나부-아플라-이딘나(Nabû-apla-iddina, 재위 기원전 886853) : 이 왕은 제8왕조(E)의 가장 중요한 통치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는 아시리아의 살만에세르 3세와 동맹을 맺고, 한때 바빌론에서 약탈되었던 태양신 샤마쉬(Shamash)의 신상과 컬트(Cult)를 되찾아 바빌론으로 복구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는 종교적 정통성과 국가의 자부심을 회복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는 또한 신전들을 복구하고, 바빌론의 경제를 안정시키려 노력하며 문화적 부흥을 꾀했다. 그의 통치기에 만들어진 유명한 '샤마쉬 태블릿(Shamash Tablet)'은 그 시대의 중요한 예술 및 종교 유물이다.
  • 마르둑-자키르-슈미 1(Marduk-zakir-shumi I, 재위 기원전 852815) : 나부-아플라-이딘나의 아들로, 그 역시 아시리아의 살만에세르 3세와 동맹을 유지하며 내부의 아람족 세력과 싸워야 했다. 그의 통치기 동안 바빌론은 상대적인 안정을 유지했지만, 아시리아의 영향력은 더욱 강해졌다.
 
그 외에도 많은 왕들이 존재했지만, 그들의 이름과 업적은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혼란 속에서도 바빌론이라는 문명의 명맥을 잇고, 신전들을 유지 보수하며, 고대 서적들을 필사하고 보존하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이는 훗날 바빌론 문명이 다시금 꽃을 피울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다.
 

5. '8왕조(E)'의 역대 통치자들

 
이름재위기간비고
나부-무킨-아플리
Nabu-mukin-apli
c.974~c.939 BC계승 불분명
니누르타-쿠두리-우수르 2세
Ninurta-kudurri-usur II
c.939~c.939 BC나부-무킨-아플리(Nabu-mukin-apli)의 아들
마르-비티-아헤-이딘나
Mar-biti-ahhe-iddina
c.938~?? BC나부-무킨-아플리(Nabu-mukin-apli)의 아들
샤마쉬-무담믹
Shamash-mudammiq
??~c.901 BC계승 불분명
나부-슈마-우킨 1세
Nabu-shuma-ukin I
c.900~c.887 BC계승 불분명
나부-아플라-이딘나
Nabu-apla-iddina
c.886~c.853 BC나부-슈마-우킨 1세(Nabu-shuma-ukin I)의 아들
마르둑-자키르-슈미 1세
Marduk-zakir-shumi I
c.852~c.825 BC나부-아플라-이딘나(Nabu-apla-iddina)의 아들
마르둑-발라수-이크비
Marduk-balassu-iqbi
c.824~813 BC마르둑-자키르-슈미 1세(Marduk-zakir-shumi I)의 아들
바바-아헤-이딘나
Baba-aha-iddina
813~812 BC계승 불분명

최소 4년간의 왕이 없는 공백기

이름재위기간비고
니누르타-아플라-X
Ninurta-apla-X
??계승 불분명
마르둑-벨-제리
Marduk-bel-zeri
??계승 불분명
마르둑-아플라-우수르
Marduk-apla-usur
??~c.769 BC어느 불확실한 부족의 칼데아 추장, 계승 불분명
에리바-마르둑
Eriba-Marduk
c.769~c.760 BC비트-야킨(Bit-Yakin) 부족의 칼데아 추장, 계승 불분명
나부-슈마-이슈쿤
Nabu-shuma-ishkun
c.760~748 BC비트-다쿠리(Bit-Dakkuri) 부족의 칼데아 추장, 계승 불분명
나보나사르
Nabonassar
748~734 BC계승 불분명
나부-나딘-제리
Nabu-nadin-zeri
734~732 BC나보나사르(Nabonassar)의 아들
나부-슈마-우킨 2세
Nabu-shuma-ukin II
732~732 BC계승 불분명


6. 아시리아의 굴레 속으로 : 왕조의 종말

 
기원전 8세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신아시리아 제국의 압력은 극에 달했다. 특히 티글라트-필레세르 3(Tiglath-Pileser III, 재위 기원전 745727)가 아시리아의 왕위에 오르면서 바빌론에 대한 직접적인 통치 야욕을 드러냈다. 그는 바빌론의 내정에 깊이 개입하고, 아람족 부족들을 무력으로 진압했으며, 바빌론의 왕들을 꼭두각시처럼 통제했다.
 
기원전 732, 아시리아의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는 바빌론을 직접 통치하기 위해 바빌론의 왕위를 겸임하게 된다. 그는 푸루(Pulu)라는 이름으로 바빌론 왕으로 등극했고, 이로써 약 240여 년간 이어져 오던 '8왕조(E)'는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된다. 바빌론은 이제 아시리아 제국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는 시대로 돌입하게 된 것이다.
 

6. 굴곡진 유산 : 8왕조(E)의 역사적 의미

 
8왕조(E)는 바빌론 역사상 가장 길면서도 가장 파편적인 정보를 가진 시기 중 하나다. 이들의 존재는 단순히 혼란스러운 암흑기 이후의 바빌론이 어떻게 외부의 압력과 내부의 분열 속에서 버텨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 그 이상이다.
 
  • 생존과 적응의 역사 : 이 왕조는 바빌론 문명이 어떻게 거대한 외부 위협과 내부 분열 속에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려 노력했는지,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 애썼는지를 보여준다. 아람어의 확산과 같은 문화적 변화는 이 시기 바빌로니아의 복잡한 사회상을 반영한다.
  • 위대한 부활의 전초 : 비록 이 시기는 아시리아의 강력한 지배에 직면하며 끝났지만, 바빌론 문명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8왕조(E)의 왕들이 신전들을 복구하고 종교 의례를 유지하며, 바빌론의 정통성을 수호하려 했던 노력은 훗날 신바빌로니아 제국이라는 바빌론 문명의 최후의 영광을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 이 시대의 고난과 저항의 경험은 바빌론인들에게 민족적 정체성을 더욱 강하게 심어주었고, 이는 결국 아시리아의 지배에 대한 강렬한 반발과 독립 열망으로 이어졌다.
 
8왕조(E)는 역사의 기록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지만, 그들은 바빌론이라는 불꽃이 완전히 꺼지지 않도록 고난 속에서도 묵묵히 버텨냈던 중요한 연결고리였다. 그들의 이야기는 메소포타미아의 굴곡진 역사 속에서 생존과 저항, 그리고 부활을 향한 바빌론의 끊임없는 여정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증거로 남아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모우리(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牟義理),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모우리 (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 ( 牟義理 )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   【 1878 년 】 미국 오하이오주 벨빌 (Bellville) 근교에서 사무엘 모우리 (Samuel Mowry, 1850-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