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근동] 바빌론 제9왕조(아시리아, 732~626 BC)의 역사 : 굴종의 시대, 저항의 씨앗
1. 암흑기를 넘어선 아시리아의 그림자 : 바빌론 제9 왕조(아시리아)의 도래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심장 바빌론은 기원전 11세기부터 10세기까지 지속된 '메소포타미아 암흑기' 동안 수많은 단명 왕조들의 손아귀를 거쳐야 했다. 이신 제2왕조(Second Isin dynasty), 시랜드 제2왕조(Second Sealand dynasty), 바지 왕조(Bazi Dynasty), 엘람 왕조(Elamite Dynasty), 그리고 제8왕조(E)에 이르기까지 바빌론은 아람족(Arameans)의 침입과 내부 혼란 속에서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이 모든 고난을 능가하는 거대한 그림자가 북쪽에서 드리워지고 있었으니, 바로 신아시리아 제국(Neo-Assyrian Empire)이었다.
기원전 8세기 중반, 아시리아는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Tiglath-Pileser III, 재위 기원전 745–727)라는 강력한 왕의 등장과 함께 거침없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그는 군사적 개혁을 단행하고 정복 활동을 강화하여 근동 세계의 패자로 등극했다. 바빌론 역시 그의 야심 찬 정복의 목표가 되었다. 기원전 732년,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는 바빌론을 직접 침공하여 바빌론의 왕위를 차지했다. 이로써 약 240여 년간 이어져 오던 바빌론의 독자적인 '제8왕조(E)'는 막을 내렸다.
기원전 732년부터 기원전 626년까지 약 106년간의 이 시기를 바빌론의 '제9왕조' 또는 '아시리아 왕조'라고 부른다. 이는 바빌론의 왕좌가 아시리아의 왕들에게 넘어갔거나, 아시리아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놓였던 시기를 의미한다. 바빌론의 입장에서는 굴욕의 시대였지만, 아시리아에게는 제국의 확고한 지배력을 상징하는 중요한 정복이었다. 이 시기 바빌론은 독립적인 왕조로서의 면모를 상실하고, 거대한 아시리아 제국의 속국이자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가 되어야 했다.
2. ‘제9왕조’ 통치자 목록
3. 아시리아 왕들의 바빌론 통치 : 직접 지배의 시작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는 바빌론의 왕위에 오르면서 자신을 '바빌론의 왕 풀루(Pulu)'라고 칭했다. 이는 그가 아시리아의 왕인 동시에 바빌론의 정통적인 왕권을 계승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그는 바빌론의 종교적 중요성을 이해하고 바빌론의 신들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바빌로니아 귀족들의 지지를 얻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바빌론인들은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 아시리아의 직접 지배에 대한 저항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특히 칼데아인(Chaldaean)으로 불리던 바빌론 남부의 부족 세력들은 아시리아의 지배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풀루라는 이름으로 바빌론을 통치하는 동안에도, 그의 통치는 완전히 안정적이지 못했다. 나부-슈마-우킨 2세(Nabu-shuma-ukin II, 재위 기원전 732)와 같은 단명한 바빌론 왕들이 잠시 왕좌를 차지하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바빌론 내부의 정치적 혼란과 아시리아의 지배에 대한 저항이 끊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4. 사르곤 왕조의 바빌론 정책 : 강압과 유화의 줄다리기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의 후계자들은 바빌론에 대한 통치 정책을 이어갔다. 사르곤 왕조(Sargonid Dynasty)의 왕들은 바빌론을 제국의 심장부이자 종교적 중심지로 인식했기 때문에, 그들의 정책은 단순한 정복을 넘어 바빌론을 제국 내에 안정적으로 통합하려는 노력이었다.
- 살만에세르 5세(Shalmaneser V, 재위 기원전 727–722) :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의 뒤를 이은 그는 짧은 통치 기간 동안 바빌론에 대한 아시리아의 지배를 공고히 하려 했다.
- 사르곤 2세(Sargon II, 재위 기원전 722–705) : 바빌론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었던 인물 중 하나는 칼데아 출신의 메로닥-발라단 2세(Merodach-Baladan II, 재위 기원전 722–710; 703)였다. 그는 엘람의 지원을 받아 바빌론의 왕위에 올라 약 12년간 아시리아에 대항했다. 사르곤 2세는 메로닥-발라단의 도전을 끝내 진압하고 기원전 710년 바빌론을 다시 정복했다. 그는 스스로 '바빌론의 왕'이 되어 바빌론의 주요 종교 축제인 아키투(Akitu)에 참여하는 등 유화책을 펼쳐 바빌론의 협조를 얻어내려 노력했다.
- 센나케리브(Sennacherib, 재위 기원전 705–681) : 사르곤 2세의 아들인 센나케리브는 바빌론과의 관계에서 강경책을 펼쳤다. 메로닥-발라단 2세는 센나케리브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다시 반란을 일으켜 바빌론의 왕위를 되찾으려 했다. 센나케리브는 이 반란을 진압하고 바빌론을 여러 번 침공했으며, 결국 기원전 689년에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그는 바빌론을 완전히 파괴하고 도시를 홍수로 덮어버렸다. 이는 바빌론의 끊임없는 반란에 대한 센나케리브의 분노와, 바빌론의 상징적 의미를 뿌리 뽑아 버리려는 의도가 담긴 전례 없는 조치였다. 메소포타미아의 문화적, 종교적 중심지였던 바빌론의 파괴는 엄청난 충격과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5. 재건의 희망, 그리고 반복된 반란 : 에살하돈과 아슈르바니팔
센나케리브의 바빌론 파괴는 일시적으로 반란을 억제했을지 모르나, 아시리아의 통치에 대한 바빌론인들의 증오를 더욱 키웠다. 센나케리브의 아들 에살하돈(Esarhaddon, 재위 기원전 681–669)은 이러한 상황을 인식하고 아버지와는 다른, 유화적인 정책을 펼쳤다.
- 에살하돈(Esarhaddon, 재위 기원전 681–669) : 그는 바빌론 재건 사업에 착수했다. 파괴된 신전들을 복구하고 도시를 재건하는 데 막대한 자원을 쏟아부었다. 이는 바빌론인들의 마음을 얻고, 아시리아의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전략적 선택이었다. 에살하돈은 또한 자신의 아들 샤마쉬-슘-우킨(Shamash-shum-ukin, 재위 기원전 668–648)을 바빌론의 왕으로 임명했다. 대신 샤마쉬-슘-우킨은 아시리아의 최고 통치자이자 형인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에게 종속되는 형태로 바빌론을 다스리게 했다. 이는 바빌론에 어느 정도 자율성을 부여하면서도 아시리아의 통제권을 유지하려는 정교한 지배 방식이었다.
-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재위 기원전 669–627) : 아시리아 제국의 마지막 강력한 왕인 아슈르바니팔은 바빌론을 포함한 제국 전역에서 권위를 확립하려 했다. 처음에는 동생 샤마쉬-슘-우킨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제국을 공동 통치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샤마쉬-슘-우킨은 바빌론인들의 민족 감정을 이용하고, 엘람, 아람 부족, 그리고 아라비아 세력들과 동맹을 맺어 아슈르바니팔에 대항하는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기원전 652–648). 이는 아시리아 역사상 가장 큰 내부 반란이었다. 아슈르바니팔은 바빌론을 4년간의 처절한 공성전 끝에 함락시켰고, 샤마쉬-슘-우킨은 신전에서 분신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반란 진압으로 인해 바빌론은 다시 한번 큰 피해를 입었으며, 아슈르바니팔은 바빌론을 다시 직접 통치하기 시작했다. 아시리아는 바빌론의 지도자들을 숙청하고 제국의 통치 체계를 강화했지만, 이러한 혹독한 진압은 바빌론인들의 독립 열망을 더욱 불태우는 결과를 낳았다.
6. 아시리아 지배의 종말 :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여명
아슈르바니팔의 통치 말기부터 아시리아 제국은 내분과 외부의 위협으로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슈르바니팔이 기원전 627년경 사망하자, 아시리아는 극심한 왕위 계승 다툼에 휘말렸고, 이는 제국의 통제력 약화로 이어졌다.
이러한 아시리아의 혼란을 틈타 바빌론에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으니, 바로 나보폴라사르(Nabopolassar, 재위 기원전 626–605)였다. 칼데아 출신으로 추정되는 그는 아시리아에 대한 바빌론인들의 깊은 반감을 이용하여 반란을 주도했고, 기원전 626년 마침내 바빌론의 독립을 선언하며 '신바빌로니아 제국(Neo-Babylonian Empire)'의 시대를 열었다. 이 해는 바빌론의 '제9왕조 (아시리아)'의 종말이자, 바빌론이 다시 독립국으로서 영광을 되찾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나보폴라사르는 메디아(Media)와 동맹을 맺어 기원전 612년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Nineveh)를 함락시키고, 이어서 아시리아 제국의 잔재를 완전히 소멸시키며 아시리아의 지배를 완전히 끝냈다. 이로써 바빌론은 오랜 굴종의 역사를 뒤로하고 고대 근동의 새로운 패자로 부상하게 된다.
7. 굴곡진 역사의 교훈 : 바빌론 제9 왕조의 유산
바빌론의 '제9왕조(아시리아)'는 강대국의 지배와 피지배 민족의 저항이 끊임없이 반복된 굴곡진 역사를 보여준다.
- 지배와 저항의 변증법 : 아시리아는 바빌론을 제국의 핵심 지역으로 통합하려 했지만, 바빌론인들은 끊임없이 독립과 자율을 갈망했다. 이는 피지배 민족의 정체성과 자긍심이 아무리 강력한 제국의 압제 아래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센나케리브의 바빌론 파괴, 에살하돈의 재건, 그리고 아슈르바니팔과 샤마쉬-슘-우킨의 형제간 전쟁 등은 이러한 지배와 저항의 변증법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 정통성의 중요성 : 아시리아 왕들이 '바빌론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바빌론의 종교적 의례에 참여하려 했던 것은, 그들이 무력뿐만 아니라 정통성을 확보하려 노력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바빌론인들의 마음을 완전히 얻는 데는 실패했고, 결국 끊임없는 반란을 야기했다.
- 부활의 기반 : 아시리아의 지배는 바빌론에 깊은 상처를 남겼지만, 역설적으로 이는 바빌론의 정체성과 단결력을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오랜 기간 이어진 억압과 고난은 바빌론인들에게 독립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심어주었고, 이는 신바빌로니아 제국이라는 최후의 영광으로 이어지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 시기의 바빌론은 독립 국가로서의 지위를 잃고 강대국의 그늘 아래 놓였지만, 그 속에서도 끊임없이 생존하고 저항하며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힘을 응축하고 있었다. 바빌론 제9 왕조의 역사는 강대국의 패권과 피지배 민족의 저항이 교차하는, 고대 근동의 복잡하고 치열했던 한 시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교훈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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