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6일 토요일

콘스탄스 2세(Constans II, AD.630~668) : 동로마 제국 제68대 황제(AD.641~668)

콘스탄스 2(Constans II, AD.630~668) : 동로마 제국 제68대 황제(AD.641~668)

 
  • Constantine [Latin : Constantinus / Greek : Κωνσταντνος / romanized : Kōnstantīnos]
    Constans II [Greek : Κώνστας / romanized : Kōnstas]
    “the Bearded” [Greek : ὁ Πωγωντος / romanized : ho Pōgōnãtos]
  • 출생 : 630117/ 콘스탄티노플
  • 사망 : 668715/ 시라쿠사(Syracuse)
  • 부친 : Constantine III
  • 모친 : Gregoria
  • 배우자 : 파우스타(Fausta)
  • 자녀 : Constantine IV, Heraclius, Tiberius
  • 재위 : 64111~ 668715
  • 대관식 : 6419
  • 공동 통치 :
    David Tiberius (641)
    Heraclius (659681)
    Tiberius (659681)
    Constantine IV (654668)

콘스탄스 2세(Constans II, AD.630~668) : 동로마 제국 제68대 황제(AD.641~668)
콘스탄스 2세(Constans II, AD.630~668) : 동로마 제국 제68대 황제(AD.641~668)
 

흔들리는 로마의 수호자 : 동로마 콘스탄스 2세 황제의 파란만장한 치세 (641-668)

 
7세기 중반의 로마 제국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야망과 끊임없이 몰려오는 거대한 위협 사이에서 힘겨운 싸움을 이어갔다. 사산조 페르시아(Sasanian Persia)를 물리친 영웅 헤라클리우스(Heraclius, 575641)가 사망한 후, 제국은 그의 복잡한 가족 관계에서 비롯된 혼란스러운 권력 투쟁에 휘말렸다. 이러한 격동의 시기에 제국의 황제 자리에 올라 약 27년간(641668) 통치하며, 이슬람의 거대한 확장에 맞서 제국의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인물이 바로 콘스탄스 2(Constans II, 630668)이다. 그는 제국의 안정을 위해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고 서방 제국과의 재통합을 시도했으나,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비운의 황제였다.
 

1. 어린 황자의 극적인 등극 : 권력 다툼의 소용돌이 속으로

 
콘스탄스 2세는 서기 630년에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아버지와 같은 헤라클리우스(Heraclius)였으며, 공식적으로는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 기간 중에 주조된 주화에는 종종 턱수염을 길게 기른 모습으로 나타나, 그가 콘스탄스 2또는 콘스탄티누스 수염왕(Constantine the Bearded)’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첫 번째 아들이자 단명했던 콘스탄티누스 3(Constantine III, 612641)였고, 어머니는 그레고리아(Gregoria)였다.
 
콘스탄스 2세가 황제에 오르게 된 과정은 매우 극적이었다. 6412, 그의 할아버지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사망하자, 제위는 그의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3세와 계모 마르티나(Martina)의 아들인 헤라클로나스(Heraclonas, 626642)에게 공동으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3개월 후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3세가 사망하면서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계모 마르티나에 의한 독살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로 인해 마르티나와 헤라클로나스에 대한 대중의 불신과 반감은 극에 달했다.
 
콘스탄티누스 3세의 충신이자 강력한 군사 지도자였던 발렌티누스(Valentinus)는 이러한 혼란을 틈타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마르티나와 헤라클로나스를 축출하고, 콘스탄스 2(당시 11)를 황제에 추대했다. 6419, 마르티나와 헤라클로나스는 민중과 원로원의 압력에 굴복하여 폐위당하고 코와 혀가 잘린 채 추방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이로써 콘스탄스 2세는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고, 헤라클리우스 왕조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2. 이슬람의 팽창 : 끝없는 영토 상실과 제국의 축소

 
콘스탄스 2세가 황위에 올랐을 때, 로마 제국은 동방에서 새로운 강대한 적, 즉 이슬람 제국과의 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슬람은 이미 시리아, 팔레스타인, 메소포타미아 등 제국의 핵심 동부 영토를 점령한 상태였다.
 
  • 이집트의 상실(642) : 콘스탄스 2세의 즉위 직후, 이슬람군은 제국의 가장 부유하고 중요한 속주 중 하나인 이집트를 완전히 점령했다. 642년에 알렉산드리아(Alexandria)가 함락되면서, 제국은 막대한 세수와 곡물 공급원을 잃게 되었고, 이는 제국 경제에 치명타를 입혔다.
  • 북아프리카와 아나톨리아의 위협 : 이슬람군은 북아프리카와 아나톨리아(소아시아)로 진격을 계속했다. 647, 아랍군은 카파도키아(Cappadocia)를 침공했고, 649년에는 아르메니아(Armenia)까지 점령했다.
  • 해상 권력의 상실 : 돛대 전투(655) : 콘스탄스 2세는 이슬람의 해상 진출에 맞서기 위해 대규모 함대를 구축했다. 그러나 655, 리키아(Lycia) 연안에서 벌어진 이른바 돛대 전투(Battle of the Masts)’에서 로마 해군은 이슬람 함대에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 패배로 제국은 지중해 해상권을 상당 부분 상실했고, 이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위협으로 이어졌다.
  • 아랍과의 일시적 평화(659) : 계속되는 전쟁으로 제국이 지쳐가던 상황에서, 이슬람 내부에 정치적 혼란(1차 피트나, Fitna)이 발생하자 콘스탄스 2세는 이를 기회 삼아 아랍과의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아랍이 지중해의 섬들을 철수하고 로마 제국에 일종의 조공을 지불하는 형태였지만, 이는 잠시 동안의 휴전일 뿐이었다. 이 평화 조약으로 그는 서방 문제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처럼 콘스탄스 2세의 치세 동안 로마 제국은 동방에서 광대한 영토를 상실했고, 이는 제국의 지형을 영구적으로 변화시켰다.
 

3. 종교 정책과 논란 : 단일 의지론과 가혹한 박해

 
콘스탄스 2세는 제국 내 종교적 통일성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할아버지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시도했던 단일 의지론(Monothelitism)’을 제국 교리로 강제하려 했다. 단일 의지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다르지만, 의지(will)는 하나라는 주장이었다. 이는 정통 칼케돈 공의회(Council of Chalcedon)의 이원론적 교리와 단성론(Miaphysitism) 사이의 타협점을 찾으려 한 시도였다.
 
  • 티포스(Typos) 칙령(648) : 648, 콘스탄스 2세는 단일 의지론에 대한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티포스(Typos)’라는 칙령을 발표했다. 이 칙령은 단일 의지론과 관련한 모든 논쟁을 금지하고, 모든 교회가 침묵할 것을 명령했다. 이는 제국 내의 종교적 통일성을 강제하려는 황제의 강력한 의지를 반영한 것이었다.
  • 교황 마르티노 1세와 막시무스 참회자 박해 : 그러나 이 칙령은 서방 교회, 특히 로마 교황청의 강력한 반발을 샀다. 교황 마르티노 1(Pope Martin I, 649655)649년 라테라노 공의회(Lateran Council)를 개최하여 티포스를 비난하고 단일 의지론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이에 격분한 콘스탄스 2세는 교황을 체포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끌고 와 혹독하게 고문한 후 크림 반도의 외딴 지역으로 유배 보냈다. 교황은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단일 의지론의 강력한 반대자였던 막시무스 참회자(Maximus the Confessor, 580662) 또한 고문당하고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이러한 가혹한 종교적 박해는 제국 내외에서 콘스탄스 2세의 명예를 크게 실추시켰고, 특히 동서 교회 간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4. 서방 원정과 이탈리아 정복 시도 (660년대)

 
콘스탄스 2세는 동방에서의 이슬람과의 평화 조약을 체결한 후, 제국의 관심을 서방으로 돌렸다. 그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상당 부분을 잃었던 이탈리아를 재정복하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그의 이러한 서방 원정은 당시 동로마 황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동로마의 황제가 아닌, 로마 제국 전체의 황제로 여기며 통합을 꿈꿨다.
 
  • 수도로서의 시라쿠사(Syracuse) : 663, 콘스탄스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 이탈리아로 향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로마를 방문하여 교황 비탈리아노(Pope Vitalian)와 만나고, 이는 200년 만에 황제가 로마를 방문한 사건이었다. 로마 방문 후 그는 시칠리아(Sicily)의 시라쿠사에 제국의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려 했다. 이는 이슬람의 위협에서 벗어나 안전한 지중해 서부에서 제국을 재건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 롬바르드족과의 전쟁 : 이탈리아에 주둔하며 롬바르드족(Lombards)과 전쟁을 벌였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 재정적 부담 : 서방 원정과 시라쿠사 천도는 막대한 재정적 부담을 야기했고, 이는 지중해 서부 지역에 과중한 세금 부담으로 이어져 백성들의 불만을 샀다.
 

5. 죽음과 유산 : 로마 제국 황제의 마지막 희망

 
콘스탄스 2세는 668915, 시라쿠사에서 자신의 시종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는 목욕탕에서 비누 그릇에 머리를 맞아 살해당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암살 배후에는 그의 서방 원정에 대한 불만, 특히 시칠리아에 부과된 가혹한 세금에 대한 불만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암살 후에는 메제지우스(Mezezius)라는 인물이 스스로 황제라고 선포했으나,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4(Constantine IV, 649685)가 이를 진압하고 제위를 계승했다.
 
콘스탄스 2세의 치세는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전략적 전환의 황제 : 그는 이슬람의 확장에 직면하여 제국이 방어적으로 변화하는 전환기의 황제였다. 그는 제국의 중심을 서방으로 옮기려는 시도를 통해 제국의 생존 방안을 모색했다.
  • 군사 및 행정 개혁 : 비록 직접적인 창시자로 기록되지는 않지만, 그의 치세 동안 테마(thema) 제도와 같은 군사-행정 구역 체제가 발전하여 제국 방어의 핵심 기반이 되었다.
  • 마지막 로마황제 : 그는 로마를 방문하고 서방을 재통합하려 한 사실상 마지막 로마 황제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의 사망 이후 동로마 제국은 점점 더 라틴적 특성을 잃고 비잔티움 제국으로서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다.
  • 아들 콘스탄티누스 4 : 그는 비록 비극적으로 사망했지만, 유능한 후계자인 콘스탄티누스 4세를 남겨 제국이 위기를 극복하고 안정기를 맞이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콘스탄스 2세는 제국의 재건을 꿈꿨으나 시대의 한계에 부딪혀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복합적인 인물이다. 그의 치세는 로마 제국의 끊임없는 변화와 생존 투쟁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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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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