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7일 일요일

콘스탄티노스 7세(Constantine VII, AD.870~913) : 동로마 제국 제92대 황제(AD.913~959)

콘스탄티노스 7(Constantine VII, AD.870~913) : 동로마 제국 제92대 황제(AD.913~959)

 
  • 콘스탄티노스 7(Constantine VII Porphyrogenitus)
  • [Medieval Greek : Κωνσταντνος Πορφυρογέννητος / romanized : Kōnstantīnos Porphyrogénnētos]
  • 출생 : 905517
  • 사망 : 959119
  • 부친 : 레오 6(Leo VI)
  • 모친 : 조에 카르보놉시나(Zoe Karbonopsina)
  • 배우자 : 헤레나 레카페네(Helena Lekapene)
  • 자녀 : 로마노스 2(Romanos II), 테오도라(Theodora)
  • 재위 : 91366~ 959119
  • 대관식 : 908515
  • 공동황제 :
    로마노스 1(Romanos I) : 920~944
    크리스토퍼(Christopher) : 921~931
    스테판(Stephen)ㆍ콘스탄티노스(Constantine) : 924~945
    로마노스 2(Romanos II) : 945~959
 
그리스도에게서 대관을 받는 콘스탄티누스 7세
그리스도에게서 대관을 받는 콘스탄티누스 7세 – 상아 부조의 세부 장면푸쉬킨 미술관(Pushkin Museum) 소장서기 945

1. 콘스탄티노스 7: ‘자줏빛 방에서 태어난학식 있는 황제의 격동적인 통치

 
콘스탄티노스 7(Constantine VII, 905517959119)913년부터 959년까지 비잔틴 제국을 통치했으며, 945년부터는 단독 황제로서 권력을 행사했다. 그는 마케도니아 왕조(Macedonian dynasty)의 황제 레오 6(Leo VI the Wise)와 조에 카르보놉시나(Zoe Karbonopsina) 황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황궁의 자줏빛 방에서 태어났다는 의미의 포르피로게네토스(Porphyrogennetos)’라는 별칭은 그의 정통성을 상징했다. 비록 즉위 초기부터 오랜 기간 다른 인물들의 섭정과 공동 통치 아래 놓였지만, 그는 결국 제국의 실권을 쥐고 비잔틴 문화의 황금기를 이끌며 '학식 있는 황제'로 이름을 남겼다.
 

2. 탄생과 어린 시절의 시련

 
콘스탄티노스 7세는 905517일 콘스탄티노플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레오 6세 황제였고, 어머니는 조에 카르보놉시나였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 레오 6세는 이미 세 번의 결혼에서 합법적인 아들을 얻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콘스탄티노스의 탄생은 제국 황실의 불안정한 후계 문제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 레오 6세는 912511일에 사망했고, 숙부 알렉산드로스(Alexander)가 그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어린 콘스탄티노스 7세를 배제하려는 시도도 했으나, 짧은 재위 끝에 91366일 사망하면서 콘스탄티노스 7세가 정식 황제로 즉위하게 된다.
 
그러나 콘스탄티노스 7세는 어린 나이로 인해 섭정의 통치 아래 놓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어머니 조에 카르보놉시나가 섭정으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궁정 내부의 권력 다툼은 끊이지 않았다.
 

3. 공동 황제들의 통치와 권력 투쟁

 
콘스탄티노스 7세의 치세 초기는 강력한 섭정들이 제국의 실권을 장악했던 시기였다. 그의 장인이었던 로마노스 1세 레카페노스(Romanos I Lekapenos, 920944)920년부터 사실상 제국의 최고 권력자로 군림하며 콘스탄티노스 7세와 공동으로 통치했다. 로마노스 1세는 자신의 아들들인 크리스토포로스(Christopher, 921931), 스테판(Stephen, 924945), 콘스탄티노스(Constantine, 924945)까지 공동 황제로 임명하며 자신의 왕조를 세우려 했다. 이로 인해 콘스탄티노스 7세는 오랫동안 상징적인 황제에 머물러야 했다.
 
하지만 로마노스 1세는 만년에 아들들에게 배신당해 퇴위하게 된다. 결국 945127, 콘스탄티노스 7세는 공동 황제들의 압제에서 벗어나 마침내 단독 황제로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며, 이 시기는 비잔틴 제국의 안정과 발전을 위한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4. 학식과 문예 부흥의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는 현자(Wise)’학식 있는(Scholar)’이라는 별칭으로 기억될 만큼 학문과 예술을 깊이 사랑하고 장려했다. 그 스스로도 여러 권의 중요한 저술을 남겼다. 그는 백성들에게 학문적 지식을 전파하고 제국의 역사를 보존하는 데 힘썼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고전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백과사전 편찬 사업도 진행되어 비잔틴 문명의 지적 유산을 체계화하는 데 기여했다. 이는 소위 마케도니아 르네상스의 중요한 부분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문학적, 학문적 업적은 비잔틴 제국의 문화적 역량을 드높였으며, 후대 역사가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콘스탄티노스 7세의 치세는 학문과 예술이 번성했던 시기로 기억된다.
 

5. 외교 활동과 제국 위상 강화

 
콘스탄티노스 7세는 학문적 성과 외에도 뛰어난 외교적 감각을 발휘하여 비잔틴 제국의 국제적 위상을 강화했다. 그는 코르도바(Cordoba)의 칼리프 아브드 알-라흐만 3(Abd ar-Rahman III)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Otto I) 등 여러 외국 궁정과 활발한 외교 관계를 맺었다.
 
특히 957년 가을에는 키예프 루스(Kievan Rus')의 섭정 올가(Olga of Kiev)가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했는데, 이 방문의 정확한 목적은 불분명했지만, 올가는 이곳에서 헬레나라는 이름으로 기독교 세례를 받고 기독교 선교사 파견을 요청했다. 전설에 따르면 콘스탄티노스 7세는 올가에게 반했지만, 올가는 황제를 자신의 대부(godfather)로 삼는 기지를 발휘하여 구혼을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이 일화는 비잔틴 제국의 외교적 영향력과 더불어 황제의 개인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군사적으로는 949년에 크레타(Crete)를 탈환하려 했으나 실패하는 등 여러 어려움도 겪었다. 그러나 동방에서는 사이프러스(Cyprus)를 탈환하는 데 성공하고 아랍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여 제국의 영토를 일부 회복하기도 했다.
 

6. 죽음과 유산

 
콘스탄티노스 7세는 959119일 콘스탄티노플에서 5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아들 로마노스 2(Romanos II, 945959) 또는 며느리 테오파노(Theophano)에 의한 독살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의 뒤를 이어 아들 로마노스 2세가 황위에 올랐다.
 
콘스탄티노스 7세는 동방 정교회 전례에서 성 만딜리온(Holy Mandylion)의 이송을 기념하는 율리우스력 816(그레고리우스력 831)에 여전히 기억되고 있다. 이 축제는 슬라브족에게 구세주 견과류 축제(Nut Feast of the Saviour)’의 일부이기도 하다.
 
콘스탄티노스 7세의 통치는 비잔틴 제국이 군사적 회복과 문화적 번영을 동시에 이룬 중요한 시기로 평가된다. 오랜 기간 섭정과 공동 황제 아래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던 그는, 마침내 친정 체제를 확립한 후 자신의 학식과 통찰력을 발휘하여 제국을 안정시키고 그 위상을 드높였다. 그의 업적은 마케도니아 왕조의 황금기를 지속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자줏빛 방에서 태어난 학자 황제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비잔틴 역사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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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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