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노스 1세 레카페노스(Romanos I Lekapenos, AD.c.870~913) : 동로마 제국 제92대 공동황제(AD.920~944)
- 로마노스 1세 레카페노스(Romanos I Lakapenos or Lekapenos)
- [Greek : Ῥωμανός Λακαπηνός or Λεκαπηνός / romanized : Rōmanos Lakapēnos or Lekapēnos]
- 출생 : 870년경
- 사망 : 948년 6월 15일
- 부친 : 테오필락토스 아마스탁토스(Theophylaktos Abastaktos)
- 배우자 : Theodora
- 자녀 : Christopher, Stephanos, Constantine, Helena, Theophylact, Basil
- 재위 : 920년 12월 17일 ~ 944년 12월 20일
Basileopator : 919년 4월 ~ 920년 9월 24일
Caesar : 920년 9월 24일 ~ 12월 17일 - 공동황제 :
Christopher Lekapenos : 921~931년
Stephen Lekapenos : 924~944년
Constantine Lekapenos : 924~944년
Romanos Lekapenos : 924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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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노스 1세의 초상 – 콘스탄티누스 7세와 스테파노스 레카페노스가 양쪽에 선 당시의 인장(도장). 덤바턴 오크스 소장. |
1. 로마노스 1세 레카페노스 황제 : 미천한 기원에서 제국의 정상까지, 그리고 몰락
로마노스 1세 레카페노스(Romanos I Lekapenos, 870년경 – 948년 6월 15일)는 920년부터 944년까지 비잔틴 제국을 통치했던 황제이다. 그는 젊은 콘스탄티노스 7세(Constantine VII, 905–959)의 섭정이자 선임 공동 황제로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의 생애는 미천한 기원부터 제국의 최고 통치자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극적인 역전과, 결국 자신의 아들들에게 배신당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는 파란만장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2. 미천한 기원과 군대에서의 성장
로마노스는 멜리테네(Melitene)와 사모사타(Samosata) 사이의 라카페(Lakape, 현재의 튀르키예)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의 성, 레카페노스(Lekapenos)는 그의 출생지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는 “참을성 없는 자”라는 별명을 가진 농부 테오필락토스(Theophylact Abaktistos 또는 Abastaktos)의 아들이었다. 테오필락토스는 872년 테프리케(Tephrike) 전투에서 황제 바실리우스 1세(Basil I)의 목숨을 구한 공로로 제국 경비대에 배치되고 영지를 하사받았다고 전해진다. 그의 아버지 테오필락토스는 아르메니아인으로 추정되지만, 일부 역사가들은 이 가설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로마노스는 학문적인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훗날 그의 사위가 된 콘스탄티노스 7세에게 ‘무식한 자’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레오 6세(Leo VI the Wise, 866–912) 황제 치세에 군대에서 꾸준히 승진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911년에는 사모스(Samos) 해군 테마(군관구)의 장군이 되었고, 이후 함대 제독(droungarios tou ploimou)으로 복무했다. 이 직책에서 그는 917년 다뉴브강 지역에서 불가리아에 대항하는 비잔틴 작전에 참여할 예정이었으나,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3. 권력 장악 : 아켈로오스 전투의 여파
로마노스 1세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917년 불가리아군에 의해 비잔틴군이 아켈로오스 전투(Battle of Acheloos)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당한 사건이었다. 이 참패 이후, 로마노스는 콘스탄티노플로 항해했고, 그곳에서 황후 조에 카르보놉시나(Zoe Karvounopsina)와 그녀의 지지자 레오 포카스(Leo Phokas the Elder)로 구성된 무능한 섭정 체제를 점진적으로 제압했다.
919년 3월 25일, 레카페노스는 함대를 이끌고 부콜레온 궁전(Boukoleon Palace)을 점령하여 정부의 고삐를 잡았다. 그는 처음에는 마기스트로스(magistros)와 메가스 헤타이레이아르케스(megas hetaireiarches)라는 칭호를 받았지만,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919년 4월, 그의 딸 헬레나(Helena Lekapene)를 콘스탄티노스 7세와 결혼시켜 황실과의 혈연 관계를 맺었으며, 동시에 바실레오파토르(basileopator, 황제의 아버지 또는 황제의 의붓아버지)라는 새로운 칭호를 얻었다. 이후 920년 9월 24일에는 카이사르(caesar)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12월 17일에는 콘스탄티노스 7세를 제치고 선임 황제(senior emperor)로 대관식을 올렸다. 이로써 로마노스 1세는 비잔틴 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4. 공동 황제 시대와 권력 유지
로마노스 1세는 황제로 즉위한 후에도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자신의 가문인 레카페노스 가문을 황실의 중심에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어린 콘스탄티노스 7세 외에도 자신의 아들들을 공동 황제로 임명하여 권력을 분산하고 세대교체를 준비했다. 그의 공동 황제로는 크리스토포로스 레카페노스(Christopher Lekapenos, 921–931), 스테판 레카페노스(Stephen Lekapenos, 924–945), 콘스탄티노스 레카페노스(Constantine Lekapenos, 924–945) 등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로마노스 1세의 아들이었으며, 특히 크리스토포로스는 유능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의 구체적인 정책이나 군사적 업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제공된 자료에서 찾아보기 어렵지만, 그는 강력한 지도력을 바탕으로 제국을 이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고 후계 구도를 안정화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이어갔다.
5. 권력의 종말 : 아들들의 배신과 몰락
로마노스 1세의 말년은 비극으로 점철되었다. 그의 통치 후반부는 권좌를 찬탈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죄책감과 신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신심 깊어진 시기였다. 931년에 그의 가장 유능한 아들 크리스토포로스가 사망하자, 로마노스는 자신의 다른 아들들을 콘스탄티노스 7세보다 앞세우지 않았다.
아버지 로마노스가 자신들 대신 콘스탄티노스 7세를 후계자로 삼을 것을 두려워한 그의 두 젊은 아들, 스테판과 콘스탄티노스는 944년 12월 20일(또는 16일) 아버지를 체포했다. 그들은 로마노스 1세를 마르마라 해의 왕자들의 섬(Princes' Islands)으로 끌고 가 강제로 수도사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들이 콘스탄티노스 7세의 지위까지 위협하자,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봉기했고, 스테판과 콘스탄티노스 또한 황제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그들의 아버지와 같은 곳으로 추방되었다.
로마노스 1세는 수도원에서 수도사로서 남은 생을 보냈고, 948년 6월 15일에 사망했다. 그는 미렐라이온 수도원(Myrelaion Monastery)의 교회에 자신의 다른 가족 구성원들과 함께 안장되었다.
6. 유산과 역사적 평가
로마노스 1세 레카페노스의 통치와 개인적인 평가는 다소 복잡하다. 오랜 세월 레카페노스 가문에 의해 폐위될 위협 속에서 살아온 콘스탄티노스 7세는 로마노스에게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콘스탄티노스 7세는 자신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로마노스 2세(Romanos II)를 위해 작성한 『제국 경영론(De Administrando Imperio)』이라는 매뉴얼에서, 그의 사위이자 전 공동 황제였던 로마노스에 대해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로마노스에 대해 “로마누스 황제는 멍청하고 무식한 사람이었다. 고결한 제왕의 방식으로 길러지지도 않았고, 처음부터 로마의 관습을 따르지도 않았으며, 제왕이나 귀족 출신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대부분의 일을 처리함에 있어 더욱 무례하고 권위적이었다... 그의 신념은 무례하고, 고집스럽고, 선량한 것을 알지 못했으며, 옳고 적절한 것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고 썼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로마노스 1세는 혼란스러웠던 비잔틴 제국에 안정감을 가져다주고, 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로서 역할을 수행하며 다음 세대의 황제들이 권력을 굳건히 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는 미천한 신분에서 제국의 정점에 오른 자수성가형 인물이었으며,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때로는 냉혹하고 단호한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로마노스 1세의 삶은 비잔틴 제국이라는 역동적인 무대 위에서 펼쳐진 한 인간의 권력 추구와 그에 따른 영광, 그리고 몰락의 드라마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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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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