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누스 4세(Constantine IV, AD.c.650~685) : 동로마 제국 제69대 황제(AD.668~685)
- Constantine IV [Greek : Κωνσταντῖνος / romanized : Kōnstantīnos / Constantinus]
the Younger [Greek : ὁ νέος / romanized : ho Néos]
the Bearded [Greek : Πωγωνᾶτος / romanized : Pōgōnãtos] - 출생 : 650년경 / 콘스탄티노플
- 사망 : 685년 7월 10일 / 콘스탄티노플
- 부친 : Constans II
- 모친 : Fausta
- 배우자 : Anastasia
- 자녀 : Justinian II, Heraclius
- 재위 : 668년 9월 ~ 685년 7월
- 대관식 : 654년 4월 13일
- 공동 통치 :
Constans II (654–668)
Heraclius (659–681)
Tiberius (659–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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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4세(Constantine IV, AD.c.650~685) : 동로마 제국 제69대 황제(AD.668~685) |
폭풍 속 제국을 구원한 젊은 황제: 동로마 콘스탄티누스 4세의 빛나는 치세 (668-685)
7세기 중반의 로마 제국, 특히 동로마 제국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사산조 페르시아(Sasanian Persia)를 물리쳤던 영광도 잠시, 아라비아 반도에서 새롭게 부상하는 이슬람 제국의 거대한 물결이 제국 전역을 휩쓸고 있었다. 광대한 영토는 속수무책으로 상실되었고,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le)마저 직접적인 위협에 놓였다. 이러한 혼란과 절망의 시기에 동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에 올라 약 17년간(668–685) 제국을 통치하며, 로마의 오랜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승리를 이끌어낸 인물이 바로 콘스탄티누스 4세(Constantine IV, 650경 – 685)이다. 그의 통치는 제국의 재앙 같던 아랍 팽창을 멈추고 제국의 생존을 확고히 했다는 점에서 로마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기 중 하나로 평가된다.
1. 콘스탄티누스 4세의 어린 시절과 가계 : 헤라클리우스 왕조의 후계자
콘스탄티누스 4세는 서기 650년경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유능했지만 다소 불안정했던 황제 콘스탄스 2세(Constans II, 630–668)였고, 어머니는 파우스타(Fausta)였다. 파우스타는 파트리키우스(patrician) 발렌티누스(Valentinus)의 딸이었다. 콘스탄티누스 4세는 콘스탄스 2세의 맏아들이었다.
그는 654년 4월 13일 부활절 무렵, 아버지 콘스탄스 2세에 의해 ‘공동 황제(co-emperor)’로 대관식을 치렀다. 이로써 그는 일찍이 제위 계승 서열 1위로서 로마 제국의 차기 통치자가 될 것임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그의 젊은 시절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황궁에서 황제로서의 소양을 익히며 성장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 콘스탄스 2세와 흔히 혼동되어 ‘수염왕(the Bearded)’이라는 별명으로 잘못 불리기도 했으며, 때로는 ‘더 젊은 자(the Younger)’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2. 제위 등극과 불안한 시작 (668)
콘스탄티누스 4세는 668년 9월, 아버지 콘스탄스 2세가 시칠리아(Sicily)의 시라쿠사(Syracuse)에서 자신의 시종에게 암살당했다는 소식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전해지자 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는 불과 18세의 젊은 나이였다. 당시 제국은 안팎으로 매우 불안정한 시기였다.
콘스탄스 2세는 시칠리아로 천도하고 서방 제국과의 재통합을 꿈꾸었으나, 이는 막대한 재정적 부담을 초래했고, 시칠리아에 대한 가혹한 세금 징수는 현지 주민들의 불만을 폭발시켰다. 결국 그의 암살은 이러한 불만에서 비롯되었다. 콘스탄스 2세 암살 후, 시칠리아에서는 메제지우스(Mezezius)라는 인물이 스스로 황제라고 선포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콘스탄티누스 4세는 즉위 직후 이 반란을 진압하는 데 주력해야 했다. 그는 시칠리아에 군대를 파견하여 메제지우스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행했다.
이러한 내분은 동로마 제국이 처한 총체적인 위기의 한 단면을 보여주었다. 제국은 이슬람의 지속적인 침공으로 동방 영토 대부분을 상실했고,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마저 직접적인 위협에 노출된 상태였다.
3.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674-678) : 로마 제국의 생존을 건 사투
콘스탄티누스 4세의 치세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자, 그의 이름을 로마 역사에 길이 남게 한 것은 바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대상으로 한 아랍군의 대규모 공방전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낸 것이다. 아랍 해군은 674년부터 678년까지 4년 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지속적으로 공격했다. 이는 아랍 제국이 로마 제국을 완전히 정복하려 한 대규모 침공이었다.
로마 제국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4세는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동원했다.
- 그리스 불(Greek Fire)의 활용 : 이 전쟁에서 동로마 제국은 ‘그리스 불’이라는 신무기를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그리스 불은 바다 위에서 적의 함선을 불태울 수 있는 일종의 소이탄(flamethrower)으로, 당시 아랍 해군에게는 대단히 충격적이고 효과적인 무기였다. 그 정확한 성분은 오늘날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있지만, 이는 당시 로마 제국의 과학 기술력이 여전히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 난공불락의 테오도시우스 성벽 :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미 5세기에 건설된 견고한 테오도시우스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 성벽은 아랍군의 육상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냈고, 도시의 방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황제의 강력한 리더십 : 젊은 황제 콘스탄티누스 4세는 난국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강력한 리더십을 보여주며 제국 전체의 저항 의지를 결집시켰다.
결국 아랍군은 4년간의 처절한 공방전 끝에 막대한 손실을 입고 678년에 철수해야 했다. 이 전투는 아랍의 거의 50년간에 걸친 거침없는 팽창을 처음으로 심각하게 저지한 사건이었으며, 동로마 제국에게는 숨통을 틔울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벌어다 주었다. 콘스탄티누스 4세는 이 위대한 승리로 인해 제국을 구원한 영웅으로 추앙받게 된다.
4. 종교적 안정 : 제6차 에큐메니칼 공의회 (680-681)
군사적 안정과 더불어, 콘스탄티누스 4세는 제국 내 종교적 통일성을 확립하는 데도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의 치세 동안 로마 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divine)과 인성(human)의 관계를 둘러싼 ‘단일 의지론(Monothelitism)’ 논쟁으로 심각한 신학적 분열을 겪고 있었다. 단일 의지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지(will)가 하나’라는 주장이었으며, 이는 정통 칼케돈 공의회(Council of Chalcedon)의 교리와 상충되는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 4세는 이러한 종교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680년부터 681년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제6차 에큐메니칼 공의회(Sixth Ecumenical Council)를 소집했다. 이 공의회에는 동서 교회에서 수많은 주교들이 참석했다. 공의회는 단일 의지론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두 가지 의지(신적 의지와 인간적 의지)가 존재한다는 교리, 즉 두 의지론(Dyothelitism)을 정통 교리로 확립했다.
이 공의회의 결정은 동로마 제국 내의 오랜 종교적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제국의 영적 단결을 공고히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콘스탄티누스 4세는 이 종교적 업적으로 인해 동방 정교회(Eastern Orthodox Church)에서 ‘성인(saint)’으로 시성되어 9월 3일이 그의 축일로 기념된다.
5. 내부 정치와 권력 강화 : 형제들과의 갈등
콘스탄티누스 4세에게는 헤라클리우스(Heraclius)와 티베리우스(Tiberius)라는 두 명의 어린 형제가 있었다. 이들은 아버지 콘스탄스 2세의 유언에 따라 공동 황제로 임명되어 있었으며, 일부 군대 내의 세력은 황제가 자신의 형제들과 공동으로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에게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4세는 이러한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고 자신의 단독 황권을 확립하려 했다. 그는 681년, 자신의 형제들인 헤라클리우스와 티베리우스가 황위와 관련하여 자신을 위협하자, 이들의 코를 잘라 황위 계승 자격을 박탈하고 유배 보냈다. 이는 7세기 로마 제국 황실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권력 다툼을 제거하기 위한 잔혹한 조치였다. 이로써 콘스탄티누스 4세는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
6. 유산과 평가 : 로마 제국의 안정과 미래의 초석
콘스탄티누스 4세는 685년 7월 10일, 35세의 젊은 나이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성 사도 교회(Church of the Holy Apostles)에 안치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유스티니아누스 2세(Justinian II, 668–711)가 황제로 즉위했다.
콘스탄티누스 4세의 치세는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아랍 팽창의 저지 :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성공적으로 방어함으로써 아랍 제국의 팽창을 저지하고 로마 제국의 생존을 확고히 했다. 이는 중동 지역의 광대한 영토 상실 이후 제국이 완전히 붕괴될 위기에서 벗어나게 한 결정적인 승리였다.
- 내부 안정과 재건 : 군사적 위협을 제거하고 종교적 분열을 해결함으로써, 그는 제국의 내부적 안정을 되찾고 향후 재건의 기틀을 마련했다.
- 헤라클리우스 왕조의 지속 : 그는 불안정했던 헤라클리우스 왕조의 명맥을 이어나갔으며, 유능한 후계자를 남김으로써 제국의 지속성을 확보했다.
- 비잔티움 정체성의 강화 : 그의 시대는 로마 제국이 점차 라틴적 특성을 벗고 그리스적 정체성을 강화하며 ‘비잔티움 제국’으로서의 고유한 특성을 확립해가는 중요한 전환기였다.
콘스탄티누스 4세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로마 제국을 구원하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한 위대한 황제로 기억될 것이다. 그의 용기와 지혜는 제국 역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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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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