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혼란 속 질서를 찾아서 : 중국 춘추 시대(BC 770~403년)의 격동과 변화
춘추 시대(春秋時代, 기원전 770년~기원전 403년)는 중국 역사에서 주나라(周나라)의 동천(東遷) 이후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의 시기를 이르는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전반부에 해당한다. 이 시기의 이름은 공자(孔子, 기원전 551년~기원전 479년)가 지은 역사서인 《춘추》(春秋)에서 유래했다. 춘추 시대는 주 왕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여러 제후국이 대립하고 항쟁하며 복잡한 변화를 겪었던 혼돈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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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 제후 분포도 |
1. 서주(西周)의 몰락과 동주(東周)의 시작 : 춘추 시대의 서막
기원전 771년, 주 유왕(周幽王, ?~기원전 771년)은 폭정을 일삼고 견융족(犬戎族)의 침입을 막지 못해 서주의 수도인 호경(鎬京)이 함락되고 자신도 살해당하는 비극을 맞는다. 이후 주 왕실은 기원전 770년 동쪽의 낙읍(洛邑)으로 천도하면서 동주 시대를 열게 된다. 이 사건을 평왕동천(平王東遷)이라고 부른다. 수도를 동쪽으로 옮긴 주 왕실은 비록 명맥을 유지했으나, 실질적인 영향력은 크게 약화되어 형식적인 존재로 전락한다. 이러한 상황은 각지에 봉건된 제후국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키우며 자치권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춘추 시대의 혼란을 가속화하는 요인이 된다.
2. 정치적 격변 : 봉건 질서의 해체와 패자(覇者)의 등장
춘추 시대는 서주 시대의 봉건제도가 점차 붕괴되고 새로운 정치 질서가 태동하는 과도기였다. 서주 말기에 1800개 가까이 되던 나라는 춘추 시대 중기에 이르러 수십 개로 줄어들 정도로 작은 나라들이 강대국에 흡수되거나 멸망했다. 진(晉)나라나 초(楚)나라와 같은 강대국들은 정복한 소국들을 부하에게 영지로 주는 대신 '현(縣)'이라는 국왕의 직할지로 만들어 중앙집권적인 통치를 강화했다. 도시국가 형태에서 영토국가 형태로 발전해 나가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약화된 주 왕실의 종주권이 희미하게나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패자(覇者)'의 힘 덕분이었다. 패자는 주 왕실의 명분을 존중하고 옹호하며, 제후국들 간의 회맹(會盟)을 주최하고 이민족의 침입을 막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즉, '주 왕실을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대의명분 아래 중원(中原)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시도였다.
3. 춘추오패(春秋五覇) : 다섯 명의 패자
전통적으로 '춘추오패'라 불리는 제후국의 맹주들은 춘추 시대의 질서 유지와 패권 다툼의 중심에 있었다. 춘추오패에 대한 여러 이설이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로 다음 다섯 명의 군주를 꼽는다.
- 제 환공(齊桓公, 기원전 ?~기원전 643년) : 제나라를 이끌고 가장 먼저 패업을 달성한 인물이다. 명재상 관중(管仲, ?~기원전 645년)의 도움으로 부국강병을 이루고, 규구(葵丘)에서 제후들을 모아 회맹을 주최하여 중원의 패자로 인정받았다(기원전 651년).
- 진 문공(晉文公, 기원전 697년~기원전 628년) : 우여곡절 끝에 즉위한 후 진나라를 강력하게 성장시켰다. 초나라와 대립하여 성복(城濮) 전투에서 승리하고, 천토(踐土)에서 회맹을 주최하여 제 환공의 뒤를 이어 패자가 되었다(기원전 632년).
- 초 장왕(楚莊王, 기원전 ?~기원전 591년) : 남방의 이민족 국가로 여겨지던 초나라를 강력한 중원 세력으로 성장시켰다. 그는 한때 주나라의 상징인 '큰 솥의 무게'를 물으며 주 왕실의 권위를 무시하는 발언을 하는 등 강렬한 야심을 드러냈다. 비(邲) 전투(기원전 597년)에서 진(晉)나라를 격파하며 패업을 이루었다.
- 오 합려(吳闔閭, ?~기원전 496년) : 오자서(伍子胥, ?~기원전 484년)의 도움으로 국력을 키워 서쪽으로는 초나라를, 북쪽으로는 제나라와 진나라를 공격하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펼쳤다.
- 월 구천(越句踐, ?~기원전 465년) : 오나라와 끊임없이 전쟁을 벌여 패배하고 치욕을 겪었으나,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처럼 끈질기게 재기를 도모하여 마침내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마지막 패자가 되었다.
한편, 진 목공(秦穆公), 송 양공(宋襄公), 오왕 부차(吳王 夫差) 등을 춘추오패로 꼽는 경우도 있었다. 패자들의 등장으로 주 왕실은 더욱 무시되었으며, 사회는 봉건 질서의 파탄과 함께 대변혁을 겪었다.
4. 사회경제적 변화 : 새로운 생산 방식과 계급 분화
춘추 시대는 사회경제적으로도 큰 변화를 겪은 시기였다. 춘추 시대 중기에는 철제 농구가 출현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농업 생산 방식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철제 농구는 깊이 갈이(深耕)와 잡초 제거(除草)를 용이하게 하여 생산력을 크게 증대시켰다. 비록 철제 농구의 보급이 전국 시대에 와서야 본격화되지만, 이 시기에 이미 씨족적인 질서가 분해되기 시작하고 계급 분화가 촉진되는 기초가 마련되었다.
토지 소유 방식도 공동체적인 집단 경작에서 개별적인 경영으로 이행되는 경향을 보였다. 세제(稅制) 또한 영주 직영지에 대한 노동 지대(地代)의 형태에서 자작농의 현물 지대 수납으로 변화해갔다. 이러한 변화들은 당시 사회가 봉건제로부터 군현제(郡縣制)로, 도시국가에서 영토국가로, 그리고 지방 분권에서 중앙집권으로 이행되는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춘추 시대와 전국 시대를 관통하며 점진적으로 진행된 역사적 흐름이었다.
5. 문화적, 사상적 변동
춘추 시대의 혼란은 사상적인 각성도 불러왔다. 전통적인 주 왕실의 권위가 약화되고 사회 질서가 동요하면서, 기존의 가치관에 대한 성찰이 시작되었다. 비록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사상이 본격적으로 꽃피는 시기는 전국 시대지만, 춘추 시대는 이들 사상이 태동하고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가 이 시기에 활동하며 혼란한 사회를 바로잡기 위한 인(仁), 의(義), 예(禮) 사상을 주창한 것이 대표적이다.
6. 춘추 시대의 종언 : 진(晉)의 분열
춘추 시대의 공식적인 종말은 강대국 진(晉)나라가 조(趙)나라, 위(魏)나라, 한(韓)나라 세 나라로 분열된 기원전 403년으로 잡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세 나라는 주 왕실로부터 정식 제후국으로 승인받았으며, 이는 주 왕실의 권위가 완전히 땅에 떨어졌음을 의미했다. 진나라의 분열은 춘추 시대에 나타났던 강대국들 간의 패권 경쟁이 이제는 국가 간의 대규모 전면전 양상으로 변모하는 '전국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 되었다.
7. 춘추 시대의 유산
춘추 시대는 중국 고대 사회의 거대한 전환점이었다. 이 시기는 봉건 질서의 해체와 함께 새로운 중앙집권 체제의 맹아를 보여주었으며, 사회경제적 변화를 통해 생산력 증대와 계급 분화를 촉진했다. 또한, 주 왕실의 통제에서 벗어난 제후국들의 활발한 교류와 전쟁은 정치적·사상적 다양성을 이끌어내며 후대 중국 문명의 발전, 특히 제자백가 사상 형성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혼란 속에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질서와 변화를 모색했던 춘추 시대는 중국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시기 중 하나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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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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