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24일 일요일

[BC. 43~32] 제2차 삼두정치 : 로마 공화정의 마지막 숨통을 조이다

[BC. 43~32] 2차 삼두정치 : 로마 공화정의 마지막 숨통을 조이다

 

1. 서론 : 공화정의 권력이 집중되다

 
기원전 43년부터 32년까지 약 10년간 로마 공화정을 지배했던 제2차 삼두정치(Second Triumvirate)는 고대 로마 역사상 전례 없는 형태의 권력 집중이었다. 이 협정은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의 암살 이후 혼란스러운 로마 정국을 수습하고, 암살자들(liberatores)에 대한 복수를 실행하기 위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 BC 83~BC 30),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Marcus Aemilius Lepidus, BC 89/88~BC 13), 그리고 옥타비아누스(Octavian, 훗날 아우구스투스 황제, BC 63~AD 14) 세 명의 실권자가 결성한 공식적인 동맹이었다.
 
1차 삼두정치와 달리, 2차 삼두정치는 기원전 431127'렉스 티티아(lex Titia)'라는 법률에 의해 5년간의 임기로 공식적으로 구성된 특별 위원회이자 관직이었다. 이들에게는 법률을 제정하거나 폐지하고, 정당한 절차나 항소권 없이 사법적 처벌을 내리며, 모든 다른 행정관을 임명할 수 있는 광범위한 권한이 부여되었다. 또한, 삼두정치는 로마 세계를 세 개의 통치 영역으로 나누어 각자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는 로마 공화정의 헌정 질서가 사실상 무너지고, 소수의 강력한 인물들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과도기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기원전 43년경 로마
기원전 43년경 로마
 

2. 명칭의 혼란 : '2차 삼두정치'는 적절한가?

 
'2차 삼두정치'라는 이름은 현대에 만들어진 용어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많다는 지적이 많다. 기원전 59년 폼페이우스(Pompey), 크라수스(Crassus), 카이사르(Caesar) 사이에 맺어진 비공식적인 정치 동맹을 '1차 삼두정치'로 부르기 시작하면서, 그 후속으로 이 동맹에 '2'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고대 로마인들은 이 두 동맹을 '삼두정치'라고 부르지 않았다. 이 명칭은 17세기 후반에 처음 등장했으며, 18세기에 들어서야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최근의 역사학계에서는 이러한 '1''2' 삼두정치라는 전통적인 명칭 사용을 피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옥스포드 고전 사전(Oxford Classical Dictionary)과 같은 권위 있는 서적조차 "현대적이고 오해의 소지가 있는 용어"라고 경고한다. 그 이유는 첫 번째 동맹이 비공식적인 '우정(amicitia)'에 가까웠던 반면, 두 번째 동맹은 '렉스 티티아'에 의해 공식적으로 부여된 특별한 권력을 가진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명칭의 차이는 단순히 학술적 논쟁을 넘어, 당시 로마 정치 체제의 변화 양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함의를 가진다. , 비공식적인 권력 합의가 점차 법적 틀 안에 들어와 독재적 성격을 띠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3. 삼두정치 시기 : 권력 장악과 정적 숙청

 
2차 삼두정치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상원 간의 갈등 이후에 등장했다 . 카이사르의 암살 이후 카이사르파의 통제권을 재확립하고,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Marcus Junius Brutus, BC 85~BC 42)와 카시우스(Gaius Cassius Longinus, BC 87~BC 42) 등의 '해방자(liberatores)'들을 제거하기 위한 강력한 연합체가 필요했다.
 

1) 살생부 작성과 숙청

 
삼두정치를 결성한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옥타비아누스는 막대한 재정적 필요에 직면했다. 이를 해결하고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이들은 살생부(proscriptions)를 작성했다. 이 살생부는 아피아누스(Appian)의 기록에 따르면 카이사르의 '관용(clementia)'이 실패했음을 선언하며 시작되었다. 300명의 원로원 의원과 2,000명의 기사 계급이 살해당했으며, 그들의 재산은 몰수되어 팔렸다. 자유 용병, 현상금 사냥꾼, 정보원들은 살해를 돕는 대가로 현금을 받았다.
 
이 살생부는 삼두정치 구성원들의 적들뿐만 아니라 친구들까지도 포함했다. 옥타비아누스가 한때 존경했던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BC 43)는 안토니우스에 대한 그의 맹렬한 비판('필리피카에') 때문에 살생부에 올라 처형되었다. 삼두정치 구성원들은 심지어 자신의 적들을 살생부에 올리기 위해 서로의 친구나 가족을 교환하기도 했다. 충분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삼두정치는 18개의 부유한 이탈리아 도시들을 점령하여 병사들에게 재분배했다.
 

2) '해방자' 전쟁과 필리피 전투(기원전 42)

 
살생부 작성 이후, 삼두정치의 주된 목표는 카이사르를 암살했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중심으로 한 '해방자' 세력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기원전 42, 필리피(Philippi) 전투에서 삼두정치는 해방자들을 결정적으로 물리쳤다. 이 승리 이후, 로마 세계는 안토니우스가 동방을, 옥타비아누스가 서방을, 레피두스가 아프리카를 각각 담당하는 형태로 나뉘었다.
 

3)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의 대결

 
삼두정치에 남아있는 유일한 저항 세력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Sextus Pompey)였다. 그는 시칠리아(Sicilia), 코르시카(Corsica), 사르디니아(Sardinia) 등을 장악하며 삼두정치에 지속적으로 위협을 가했다. 이로 인해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협력하여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상대할 필요성을 느꼈다.
 

4. 동맹의 재정비와 균열 : 권력 다툼의 서막

 
기원전 37, 병사들의 압력 등으로 인해 삼두정치는 5년 더 법적인 임기를 갱신했다. 그러나 이 동맹은 오래가지 못했다.
 

1) 레피두스의 퇴장(기원전 36)

 
안토니우스가 파르티아 원정에서 패배하고 옥타비아누스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물리친 후,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6년 레피두스를 삼두정치에서 강제로 축출했다. 이로써 강력한 삼두 중 한 명이 제거되고,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두 명만이 남게 되었다.
 

2)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대결 : 악티움 해전(기원전 31)

 
기원전 3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두 사람 간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이들은 클레오파트라(Cleopatra)와의 관계, 동방 지배권을 둘러싼 갈등, 그리고 로마 정치에 대한 비전의 차이로 인해 대립했다. 결국 이들의 갈등은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War of Actium)이라는 마지막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 전투에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패배 후 이집트로 도망쳤고, 기원전 30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로써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이후의 권력 공백을 메웠던 제2차 삼두정치는 막을 내리고,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세계의 유일한 최고 권력자로 남게 되었다.
 

5. 2차 삼두정치의 역사적 의미 :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2차 삼두정치는 로마 공화정의 종말과 로마 제정의 시작을 연결하는 결정적인 다리 역할을 했다. 비록 임시적인 권력 형태였지만, 이들의 통치 기간 동안 로마의 정치 체제는 공화정적인 요소들을 상실하고 개인 독재를 위한 기반을 다졌다.
 
  • 헌정 질서의 파괴 : 렉스 티티아에 의해 부여된 광범위한 권한은 기존 공화정 체제의 견제와 균형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살생부를 통한 대규모 숙청은 공화정 말기 잔혹한 정치 관행의 정점을 찍었으며, 공화정의 가치를 훼손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 권력 집중의 심화 : 1차 삼두정치가 비공식적이고 느슨한 동맹이었다면, 2차 삼두정치는 법적 효력을 가진 형태로 권력을 집중시켰다. 이 과정에서 한 명의 최고 권력자(옥타비아누스)가 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 군사력의 중요성 증대 : 삼두정치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했다. 병사들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주요 전쟁을 통해 세력을 확장하는 등 군사적 지지가 정치적 권력의 핵심임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이는 이후 로마 제정 시대에 황제 권력의 기반이 되는 군사력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선례가 되었다.
 
2차 삼두정치의 종식과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는 그가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이름으로 로마 제국을 창건하는 길을 열었다. 수백 년간 이어져 온 로마 공화정은 제2차 삼두정치를 거치며 사실상 그 생명을 다했고, 이후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로마는 '공화정'이라는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황제'가 통치하는 새로운 제정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6. 결론 : 로마 역사의 전환점을 찍다

 
2차 삼두정치는 로마 공화정의 마지막 장이자 제정 시대를 예고하는 혼란의 시기였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옥타비아누스 세 명의 남자가 공유했던 이 권력은, 암살과 숙청, 전쟁을 통해 로마 세계를 재편했고, 결국은 한 사람의 독재를 향하는 길을 닦았다. 비록 이 동맹 자체가 영구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이 수행한 역할은 로마의 정치적 지형을 영구적으로 변화시키며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이 시기의 격변과 그 속에서 개인들의 야망과 권모술수는 로마 역사를 통틀어 가장 드라마틱하고 치열했던 순간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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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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