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3일 일요일

고대 이집트 문명 개관

고대 이집트 문명

 
기원전 6000년대부터 범람원에서 농사를 지은 촌락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밀과 보리를 경작했고, 양과 염소를 키웠다. 그후 2천 년 동안 나일강 유역을 따라서 서너 개의 조그만 왕국이 형성되었다.
 
기원전 4000년 후에는 인구와 정착지의 규모가 폭발적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흙벽돌로 담을 쌓은 조그만 마을들이 기원전 3500년경에 처음으로 등장했으며, 지역을 다스리던 왕족의 호화분묘도 등장했다. 나일강 상류의 상이집트(남부 이집트)와 강 하류의 하이집트(북부 이집트)에 각기 다른 왕국이 세워졌다. 흥미롭게도 이곳에서는 하나의 도시가 국가의 형태를 갖는 도시국가가 없었다. 이집트는 문명 이전 단계에서 방대한 지역을 통치하는 국가로 곧장 발전한 것이다.
 
이집트에서는 농민들이 모이는 시장에서 초기 형태의 도시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농촌 공동체와 씨족들이 합쳐지면서 각 지방이 형성되었고, 메소포타미아보다 7백 년 정도 일찍 정치적 통합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후에도 도시생활은 보잘 것 없는 규모였다. 문자의 기록이 시작된 것은 기원전 3100년경이었다. 그 이전의 남쪽과 북족의 왕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다. 그들은 수세기 동안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점점 더 큰 지역을 다스리게 되었을 것이다.
 

기원전 3100년경 남쪽 지역의 상이집트의 위대한 군주 메네스(Menes 혹은 나르메르, Narmer)가 북쪽 지역을 점령하고 이집트를 통일했다. 그리하여 이집트는 나일강 상류의 아부심벨까지 1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이 되었다. 이후 이집트의 영토는 더욱 커졌다. 이집트는 이따금 분열을 겪기도 하지만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까지 계속되었다. 고대 이집트 왕조는 약 3천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존재했다. 이 긴 세월 동안 이집트에서 일어난 일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은 이집트 문명이 오랫동안 안정성과 지속성을 지니며 발전했다는 점이다.
 

# 고왕국 피라미드의 시대

 
이집트를 통일한 메네스 왕은 나일강의 전략지 요충지에 왕도 멤피스를 건설했다. 나일강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하는 좁은 협곡은 델타(삼각주) 지역에 이르면 널찍한 초원 지대를 만난다. 멤피스는 오늘날 수도인 카이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고대 왕도 멤피스는 그 대부분이 나일강의 침전물로 수십 미터 아래 파묻혀 있지만 범람원 위로 솟은 사암의 경사지에는 지금도 멤피스 시대에 건설된 왕들의 무덤이 굳건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고왕국 제3, 4왕조 시대를 지배한 왕들이 묻혀 있는 거대한 공동묘지다.
 
기원전 2700년경 조세르 왕을 위하여 피라미드를 중심으로 한 의례용 복합단지가 만들어졌다. 왕은 새로운 포고령을 내릴 때마다 축제를 벌이고 외국의 사신을 맞아들일 때 이 건물을 사용했다. 한쪽으로는 나란히 늘어선 신전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면서 네켄과 나가다를 비롯한 이집트 남부 도시들의 수호신들에게 예배를 드렸다. 높이 60미터의 거대한 계단식 무덤은 그 전체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새로운 발명품이었다. 조세르와 그의 건축가 임호테프가 처음 창안해낸 이런 무덤은 이후 왕들에게 유행처럼 번져갔다. 기원전 2500년경 몇 세대 동안 후니, 세네프루, 쿠푸, 카프레 등과 같은 위대한 왕들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선왕의 무덤보다 더 큰 피라미드를 건설했다. 이것은 세계에서 일찍이 없었던 거대한 죽음의 기념물이 되었다.
 
피라미드를 건설한 사람들은 우리의 일반적 사고에 영향을 준 헐리웃 영화의 장면처럼 채찍을 맞으면서 노동한 노예들이 아니었다. 피라미드는 자유로운 신분이나 혹은 적어도 최소한의 자유가 보장된 농민들에 의해서 건설되었다. 실제로 우기가 닥쳤을 때에는 나일강의 범람으로 농부들이 일손을 놓았기 때문에, 그런 거대한 건축물을 건설하기 위해서 공역을 동원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집트어로 피라미드란 승천의 공간이란 뜻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피라미드는 바빌로니아, 마야, 모체, 아스텍 등과 같은 다른 문화권에서 건설한 인공산에 비교될 수 있다. 모든 지배자들은 거대한 상징물을 만들어냄으로써 백성들을 지배하는 정당성을 확보하려 애썼다. 그처럼 거대한 기념물을 관리하고 지배하는 능력만큼이나 사람들에게 경외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죽은 왕이 피라미드 안에서 태양신으로 거듭 태어난다는 믿음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었으니까.
 
사카라(Saqqra)의 계단식 피라미드에서 우리는 이런 생각의 과도적 단계를 발견할 수 있다. 왕의 혼령이 하늘까지 올라가서 다시 무덤으로 내려온다는 계단이 그것이다. 따라서 바빌로니아의 시파르(Sippar)에 있는 지구라트도 밝은 하늘로 승천하기 위한 계단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피라미드는 이 같은 생각을 구체적으로 실현해 보인 증거다. 태양신이 지상에 내리쬐는 빛줄기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영혼이 하늘로 승천하는 계단의 모습을 띠고 있다. 피라미드는 이집트인이 창조해낸 영적인 개념이 물질적인 형태로 구체화된 것인 셈이다. 겨울이면 기자(Giza) 지역에서 햇살이 구름을 뚫고 나와 피라미드와 같은 각으로 내리쬔다. “영민하고 지혜로운 왕이 불멸의 별들로 수놓아진 하늘까지 승천할 수 있도록 따사로운 햇살이 빚어낸 승천의 계단이다.
 
피라미드 시대에 전성기를 구가했던 구왕국 시대(기원전 2600~2100)는 절대왕권의 시대였지만, 왕조 이전 50만 명에 불과했던 인구가 2~3백만 명으로 급증할 정도로 정치ㆍ경제적으로 안정된 시기였다. 매년 나일강이 범람하면서 비옥해진 농토를 효율적으로 사용한 덕분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2200~2100년 사이에 이라크 우르의 3대 왕조를 강타했던 지독한 가뭄이 이집트에도 닥쳤다. 나일강의 수위가 급격히 낮아지면서 거의 반세기 동안 기근이 계속되었다. 안정된 질서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절대군주가 무너지면서 이집트는 1천 년 전처럼 한동안 두 나라로 분열되었다.
 

# 테베, 이집트 문명의 중심이 되다

 
그러나 분열은 오래가지 않앗다. 거의 한 세기만에 남쪽에서 통일의 기운이 올라왔다. 1중간기 동안 상이집트의 테베(Thebae)라는 곳에서 조그만 독립 왕국이 출현했다. 기원전 2130년 테베의 맨투호테프가 분열된 두 땅을 하나로 통일하면서 이집트는 다시 과거의 안정을 되찾았다. 테베의 사람들은 맨투호테프를 메네스에 버금가는 두 번째 건국자로 추앙했다. 테베는 이집트 중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맨투호테프와 그의 후계자들은 테베에 무덤과 기념신전을 세우고 매년 그들의 수호신인 아몬의 형상을 그 신전까지 배로 옮기는 화려한 행렬의식을 거행했다. 이때 시작된 축제는 지금까지도 게속되고 있다. 중왕국 시대와 신왕국 시대에 테베는 거대한 신전으로 아름답게 꾸며졌다. 도시에서 강 건너 서쪽 절벽 기슭을 따라서 거대한 장제전들이 잇달아 세워졌다. 고대 세계의 기념물들이 한자리에 모여 장관을 이룬다. 그야말로 사자(死者)들을 위대한 거대한 도시다. 그리스인들에게 신들의 도시로 알려진 테베의 명성은 호메로스 시대까지 이어졌다. 호메로스는 테베를 ‘1백 개의 문을 가진 도시라고 노래했다.
 
테베에는 룩소르 신전, 파르낙 신전, 왕들의 계곡, 왕비들의 계곡 같은 유적지가 남아 있다. 두 신전은 나일강의 진주로 불리는 아스완의 필레 신전과 더불어 이집트에서 가장 손꼽히는 아름다움을 지녔다고 평가된다. 이곳에는 사람의 얼굴에 사자의 몸을 한 스핑크스도 많이 서 있다. ‘출애굽의 주인공모세와 다퉜다고 알려진 람세스 2세도 이곳에 묻혔다고 한다. 오늘날 테베는 이집트인들의 자부심을 높여줄 뿐 아니라 세계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관광지이기도 하다.
 
이집트는 어떻게 이렇게 거대한 기념물들을 만들 수 있었을까? 이것은 이집트의 지배자인 왕들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우리는 이집트의 파라오라고 하면 절대군주와 폭정을 떠올리게 된다. 일반 대중에게 이런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는 서구의 잘못된 시각으로 만들어진 헐리웃 영화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큰 집을 의미하는 파라오라는 칭호를 왕에게 직접 사용한 것은 신왕국 시대뿐이다. 그 전의 파라오는 왕이 머무는 거처와 궁정을 의미했다. 파라오로 칭하게 되는 신왕국 이전부터 이집트의 군주들은 강한 권위를 갖고 있었다. 그와 같은 권위가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보는 이집트의 유물과 유적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집트의 왕들이 특별히 다른 지역의 전제군주들보다 더 강력했다거나 통치가 가혹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이집트는 잉여생산물이 다른 지역에 비해 풍부했다. 그래서 왕이 권위를 유지하면서도 인민의 반란을 야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마이클 우드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이집트의 오랜 역사를 통해 보건대 이집트인들이 신성한 왕에 의한 지배 이외에 다른 형태의지배구조를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파라오에 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실질적인 증거도 찾아볼 수 없다... 현대적 용어로 풀이하면, 이집트는 공급자 중심의 국가였다. 다시 말해서 나일강의 자원을 적절히 관리함으로써 온 백성에게 기본적인 생활수준을 만족시켜준 국가였다. 그 대가로, 지배자들은 엄청난 잉여물을 무덤과 신전과 궁전에 쏟아부을 수 있었다. 이렇게 건설된 거대한 건축물을 통해서 국가는 지배 이데올로기, 즉 신과 지상의 지배자는 하나라는 믿음과 안정된 우주의 필연성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었다. 이런 이데올로기는 문명세계를 처음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필수조건이었을지 모르지만,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이런 특징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민족 국가에서 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사고방식은 여전히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신화, 특히 위대한 지배자나 왕이나 신에 얽힌 신화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 태양신 파라오가 통치하는 나라

 
이집트의 파라오가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밀은 나일강에 숨어 있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는 나일강이었다. 그들은 파라오가 나일강의 범람을 조절한다고 여겼다. 강물의 높이를 마음대로 조절한다는 것은 강 유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목숨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과 같았다. 이집트 왕실이 거행한 최초의 의식은 풍요를 빌거나 경작지에 물을 대는 일과 관련되어 있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메네스 왕의 모습은 그가 선박 운행과 농사에 필요한 수로를 파고 있는 모습이다.
 
파라오가 범람을 조절한다고 믿게 만든 것은 그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른 환경의 변화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평선에 시리우스 성좌가 떠오를 때면 나일강의 범람이 시작되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던 왕실은 이런 지식을 계승자에게 전승했고, 파라오는 풍작과 날씨, 나일강의 범람 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처럼 가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과학의 발전과 함께 태양력이 발명되면서 홍수의 도래를 보다 정확히 알 수 있게 되고, 그 결과 파라오의 권위는 더욱 강화되고 그의 행위는 더욱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관개수로의 차단을 통한 농업용수에 대한 통제는 주술적으로 얻은 권위를 강화하는 데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다.
 
이집트 왕은 이러한 나일강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절대 권위를 확보했으며, 그는 그 권위를 바탕으로 나일강이 만든 풍요로운 잉여 생산물을 축적하고 분배하는 주체가 되었다. 그는 홍수를 정확히 예측함으로써 자신의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영원히 젊음을 유지시킬 수 있는 존재, 영생할 수 있는 존재로 스스로를 상징화함으로써 그 권위를 더욱 강화했다. 피라미드를 비롯한 많은 건축물들이 이런 사고에 기초해서 만들어졌다.
 
구왕국 시대 왕은 모든 땅의 절대적인 주인이며 신의 자손으로 경배 받았다. 왕은 매 모양의 이집트의 태양신 호루스가 되었다. 호루스는 이집트 최고의 신인 오시리스의 아들이었다. 이집트의 왕은 만물의 질서를 창조하는 신과 같이 강력한 능력을 갖춘 존재로 받들어졌다. 파라오는 전지전능했고, 따라서 인간 세계의 일에 대해 따로 기준으로 삼을 만한 법전 따위는 필요 없었다.
 
파라오의 전지전능함을 보여주는 그림이 하나 있다. 파라오는 위의 그림에서 적들을 향해 화살을 겨누고 있다. 그의 적들은 사냥에서 잡힌 새처럼 줄줄이 묶여 있거나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모습을 보인다.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그들의 뇌를 뽑아내는 그림도 볼 수 있다. 신왕국 시대의 파라오는 전차를 탄 영웅의 모습으로 적들을 짓밟고 맹수들을 죽인다. 이것은 점차 그가 인간의 모습으로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는 신의 영역에 남아 있는 존재이다. 기원전 1500년경 파라오의 한 고위관리는 이렇게 썼다.
 
그는 사람들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신이시며, 만인의 아버지이자 어머니이고,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다.”
 
중왕국 시대까지는 오로지 파라오에게만 사후의 삶이 있었다. 이집트는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존재가 왕이라는 사실을 다른 청동기 시대의 국가들보다 훨씬 더 강조했다. 이런 생각은 철기 시대가 도래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뒤 이집트가 다른 민족의 손아귀에 떨어지면서 파라오를 신으로 믿는 일은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 이집트의 몰락, 그리고 그 문명이 남긴 것

 
기원전 1000년경까지도 이집트는 여전히 번성을 누렸다. 하지만 기원전 8세기에 시작된 아시리아의 침략을 필두로 기원전 525년 페르시아에게 정복당할 때까지 이집트는 끊임없이 외세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다. 기원전 7세기경 잠시 동안 이집트는 초강대국으로 군림했지만 그 이후로는 강력한 군사력을 앞세운 동방의 국가들에 대항해서 독립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이류 국가로 전락했다.
 
한 이집트 학자의 지적처럼 이집트는 준엄한 몰락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두 번에 걸친 페르시아의 점령기를 견뎌야 했다. 이집트의 지배자들은 새로운 신무기에 적극적인 반응을 나타내면서 그리스 용병과 지휘관을 고용하고, 그리스의 행정제도를 배우면서 화폐경제를 향해 한 걸음씩 조심스레 나아갔다. 그러나 근본적인 변화나 개혁은 이뤄지지 않았다. 시늉만 있었을 뿐 과거의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예술과 건축에서는 고왕국 시대로 퇴행하려는 경향까지 보였다. 19세기 후반 근대 중국처럼 이집트도 과거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었다.
 
이집트가 과거의 영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주춤거리고 있을 때, 주변 국가들은 신정일치의 정치체제를 과감히 벗어던지고 강력한 군사력으로 이집트를 사방에서 위협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이집트는 점령당하고 말았다. 그 이후 이집트 문명은 먼 옛날의 기억에서 벗어나 바다와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뻗어나갔다. 통일 국가의 완성을 전후한 시기부터 수천 년 동안 이집트는 아라비아해와 홍해, 아프리카의 누비아, 시리아와 팔레스타인과 접촉했을 뿐이다.
 
그리스가 이 땅을 점령하고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면서 이집트의 중심축도 이동했다. 그때부터 이집트는 1천 년 동안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지중해 세계의 일원이 되었다. 그리고 고대 이집트 문화의 전통이 소멸되기 시작하면서 헬레니즘 시대의 역동적인 국제 문화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천 년간 고대 문명의 황금기를 꽃피운 이집트 문명은 아직도 세계인의 가슴 속에 깊은 감동과 여운을 남기며 살아 숨쉬고 있다. 그들의 그림과 건축물에서 보여지는 예술적 감락과 영감, 상형문자의 발명, 수학과 천문학 등 과학의 발전 토목과 건축 기술, 태양력, 농업기술, 금은 세공 기술 등 모든 것이 인류 전체의 공통 문화유산이 되고 있다. 이집트의 독창적인 의술은 후에 서양의 의학 발전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중국에서 발명된 종이 제작 기술이 서양에 전파되기 전까지 오랫동안 서양 문화의 한 뿌리가 된 파피루스도 있다. 이집트의 고대 미술은 오늘날 의상과 패션에까지 큰 영향과 영감을 주고 있다.
 
임영태, 스토리 세계사 1 - 고대편 I, 139-151

고대 이집트 문명 - 간략한 요약

고대 이집트 문명

 

연대

시기

특징

기원전 3100

메네스와 스콜피온

상ㆍ하 이집트 통일

기원전 2920~2575

상고기

국가의 토대 강화

기원전 2575~2134

고왕국 시대

전제 파라오들이 피라미드를 축조하고 과시적 장례 기념물들을 많이 건립하다. 고대 이집트의 제도, 경제 전략, 예술 전통이 확립되다.

기원전 2134~2040

1중간기

정치적 혼란과 분열

기원전 2040~1640

중왕국 시대

테베 지역이 두각을 나타내고 아문신의 권위가 높아짐

기원전 1640~1530

2중간기

힉소스인 통치자, 삼각주 지배

기원전 1530~1070

신왕국 시대

이집트 역사에서 대제국 시기로 파라오들이 왕들의 계곡에 묻히다. 파라오들은 람세스 2, 세티 1, 투탕카멘과 더불어 이단 통치자 아케나텐이 있다.

기원전 1070~332

말기 왕조 시대

파라오의 권위가 서서히 추락하여 페르시아(기원전 525~404년과 기원전 343~332)에서 최저점에 이르다.

기원전 332~30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기

기원전 332년 알렉산더 대왕의 이집트 정복과 더불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과 이집트에 그리스듸 영향을 들여놓다.

기원전 30

로마 제국 치하

이집트, 로마 제국의 지방화

 

임영태, 스토리 세계사 1 - 고대편 I, 141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4왕조, ‘성스러운 왕’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 4 왕조 , ‘ 성스러운 왕 ’   스네프루는 고대 이집트의 제 4 왕조를 시작한 왕이다 . 그는 24 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남북 지역의 교류를 확대했으며 영토도 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