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교교회(琮橋敎會)】
종교교회(琮橋敎會)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교회이다.
【1900년】
- 미남감리회 최초의 선교사 리드가 1896년 내한하여 선교를 시작한 후 1897년에 여선교사인 캠벨(J.P. Campbell, 姜慕仁)이 중국으로부터 파송되어 왔다. 캠밸은 이듬해인 1898년에 고간동에 배화여학교를 설립하였다. 그후 배화여학교 기도실에서 예배하다가 1900년 4월 15일 부활주일에 남자 3명과 여자 7명, 여학생 8명 등 18명에게 세례를 베풀어 ‘잣골교회’라는 이름으로 집회를 시작하였다.
【1901년】
- 1901년 9월 미국의 루이스(Louis)와 워커(Walker) 두 부인의 기부금으로 2층 예배당을 건축하고 봉헌예배를 드렸으며 예배당의 이름을 루이스 워커 기념예배당(The Louis Walker Memorial Chapel)이라 하였다.
【1902년】
- 1902년부터는 당시 서울 구역장으로 있던 하운셀(C.G. Hounshel, 韓雲雪) 목사가 담임목사 격으로 시무하였다.
【1907년】
- 1907년 하운셀 목사가 설립한 잣골남학교 학생 중 수명이 종교교회에 출석하였고 그중 7명이 입교인이 되었다.
【1906년】
- 1906년에 전도부인 홍다비다가 파송되어 은퇴할 때까지 섬겼다.
【1907년】
- 1907년부터 초대 전도사 정춘수가 시무하였다.
【1908년】
- 1908년 4월 종침교(琮琛橋) 부근 도렴동에 새 예배당을 마련하고 교회를 옮겨가면서 ‘종교교회’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1910년】
- 1910년에 현 위치인 도렴동에 십자형 고딕 벽돌예배당을 건축하고, 남감리회 선교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1919년】
- 종교교회에는 종교교회에는 윤치호나 유경상 등의 교육운동가들이 출석하고 일제강점기에 남궁억, 차미리사, 김응집 등 민족의식이 강한 배화학당 교사들이 출석하면서 청년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3ㆍ1운동에는 전임 정춘수 목사와 당시 담임 오화영 목사가 민족대표로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다. 덕성여대의 모체인 근화학원 설립자인 차미리사, 김응집, 배화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투옥되었다.
- 1919년 3ㆍ1운동 당시에는 담임목사 오화영이 33인의 한 사람으로 옥고를 치르는 시련을 겪었기도 하였다.
【1920-30년대】
- 1920-30년대 종교교회는 교육활동, 절제운동, 계몽운동 등을 주도하는 민족운동의 중심체 역할을 담당하였다.
【1950년】
- 1950년 한국전쟁 때에는 부산 대청동에 피난 종교교회를 설립하여 이호빈 목사가 인도하였다.
【1959년】
- 1959년 11월에 석조예배당을 건축하고 제4대 목사로 시무했던 양주삼 목사를 기념하여 「총리사 양주삼 목사 기념예배당」이라 칭하였다. 그후 교회가 성장하면서 마포성광교회, 충북 반석교회, 송학대교회, 인왕교회, 대광교회 등을 개척 지원하였다.
【1965년】
- 1965년 11월에 해외선교회를 조직하여 해외선교에도 힘썼다.
【1976년】
- 1976년 부임한 나원용 목사는 1990년 서울연회 감독이 되었고 2002년 도렴동 같은 위치에 빌딩형 성전을 지어 봉헌하였다.
【역대 담임목사】 선교사들을 제외하고 정춘수 목사부터 정리된 것임
- 제1대 정춘수(1911-1913)
- 제2대 홍종숙(1913-1917)
- 제3대 오화영(1917-1919)
- 제4대 양주삼(1919-1921)
- 제5대 강조원(1921-1922)
- 제6대 오화영(1922-1925)
- 제7대 임두화(1925-1927)
- 제8대 홍종숙(1927-1934)
- 제9대 신공숙(1934-1941)
- 제10대 변홍규(1941-1943)
- 제11대 갈홍기(1943-1945)
- 제12대 강태희(1944-1948)
- 제13대 김희운(1948-1950)
- 제14대 이호빈(1950-1965)
- 제15대 차연희(1965-1969)
- 제16대 박용익(1969-1976)
- 제17대 나원용(1976-2003)
- 제18대 최이우(2003-2022)
- 제19대 전창희(2022-)
[참고] 『기독교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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