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일 일요일

김원봉과 의열단, 일제와 친일 매국노의 저승사자로 각인되다

김원봉(金元鳳, 1898-1958)
아호 약산(若山), 김해 김씨
 

김원봉의 스승, 전홍표(동화중학교 교장)

 
김원봉은 1898313일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7살부터 한학을 수학했고 10세 되던 해 보통학교 2학년으로 편입했습니다. 김원봉이 밀양 동화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0년 나라가 망했고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김원봉은 이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중단하는 데 그 이유는 동화중학교 전홍표 교장이 배일사상을 고취한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강제 폐쇄당했기 때문입니다. 동화중학교에서 서릿발 같은 기개로 민족혼을 일깨워 준 전홍표 교장 선생님은 약산 김원봉에겐 평생의 가르침을 준 스승이었습니다.
 
우리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강도 일본과의 투쟁을 단 하루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빼앗긴 국토를 다시 찾고 잃어버린 주권을 회복하기 전에는 우리는 언제나 부끄럽고 언제나 슬프고 또 언제나 비참하다.”
 

김원봉, 중앙고보 편입과 국내 무전여행

 
이후 김원봉은 1년간 밀양 표충사에서 손자, 오자 등 병서를 읽으며 빼앗긴 조국을 되찾고자 무력투쟁을 꿈꿉니다. 191315살 되던 해 서울로 올라와 중앙고보 2학년으로 편입합니다. 김원봉은 중학생으로서 교내 웅변대회에 참가합니다. 연사의 주제가 사회의 발전은 종교에 있는가 교육에 있는가인데 김원봉은 사회 발전은 교육에 있다는 관점에서 열변을 토했고 그 일로 학교에서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김원봉은 일제의 황민화 교육이 횡행하는 분위기 속에서 학업을 중단하고 지식과 견문을 넓히기 위해 국내 무전여행을 떠납니다. 그 무전여행에서 김원봉은 인상적인 두 명의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한 사람은 함께 독립투쟁에 나선 정지 김철성(일명 김인태)이고 다른 한 사람은 사회주의자로서 독립운동을 위해 사재를 턴 강택진입니다.
 

김원봉, 톈진의 덕화학당(독일인 운영)에 입학

 
김원봉은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선 민족의 무장된 힘! 바로 민족을 지켜줄 군대가 필요함을 절감합니다.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던 독일의 군사학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 유학을 꿈꿉니다. 그리하여 18세 되던 1916년 김원봉은 텐진에서 독일인이 운영하던 덕화(德華)학당에 입학하여 독일어를 배웁니다. 그러나 19171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가담하여 독일,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덕화학당은 폐쇄돼 버립니다.
 

약산 김원봉, 약수 김두전, 여성 이명건... 그리고 대한광복단 출신 황상규

 
약산 김원봉은 서울로 돌아와 중앙고보 시절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여성 이명건, 약수 김두전을 만납니다. 세 사람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자고 다짐합니다. 친일파 처단으로 유명한 대한광복단 출신이자 김원봉에게 정신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던 황상규는 이들 세 친구에게 조국을 잊지 말라면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조국의 산처럼(약산), 물처럼(약수), 별처럼(여성) 살라며 지어준 이름들이었습니다.
 
김원봉은 20세가 되던 1918년 이들과 함께 중국 난징에 있는 금릉대학에 입학합니다. 그들은 항일무장투쟁을 꿈꾸며 19192월 동북만주지방으로 떠납니다. 선양에 이르렀을 즈음 조선 국내에선 거대한 31만세운동이 일어나 항일 민족운동이 들불처럼 타올랐습니다. 이여성과 김약수는 조선의 정세가 급변함에 따라 조선의 인민대중을 조직해 일제와 싸워야 한다며 국내로 들어갑니다.
 

국내에서 활동한 약수 김두전, 여성 이명건

 
김약수는 노동, 농민 대중을 기반으로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노동총동맹 등 항일의식을 전파하며 노동자 조직화에 혼신을 다합니다. 1925년 조선공산당 창립 멤버로 활동하다가가 일제에 피검돼 6년 동안 징역살이를 합니다.
 
이여성은 자신의 매부 김세용(사회주의자)과 함께 숫자 조선 연구(1-5)를 간행해 조선총독부 통계 발표의 허구성과 식민통치의 간교함을 폭로합니다. 또한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당시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살 보도와 관련하여 동아일보에서 강제 해직됩니다.
 
김약수, 이여성은 일제당국에 의한 구속과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조죽 독립을 위해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김두봉, 신흥무관학교로 가다

 
약산 김원봉 역시 조선의 독립을 위해선 무장한 군대를 보유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길림성 대한독립의군부를 거쳐 이회영이 세운 서간도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갑니다. 일제에 대한 암살ㆍ파괴 등 직접 행동을 통한 폭력혁명노선이 절실하다고 판단한 때문입니다. 당시 신흥무관학교 교장은 충무공 이순신의 종손 이천민입니다.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6개월 동안 무기조작과 폭탄제조 및 군사훈련을 마친 김원봉은 의열단을 조직합니다. 같은 밀양 출신 선배이자 친척인 김대지, 황상규, 윤치형의 지원 하에 1919119일 동북만주 길림성 파호문 밖 중국인 반모 씨 집에서 김원봉은 회의를 주도했습니다. 밀양 출신인 윤세주, 이성우, 한봉근, 한봉인, 배중세(일명 배동선), 김상윤(일명 김옥)과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자 경북지역 열혈 청년인 권준(일명 권중환), 서상락, 신철휴, 이종암(일명 양건호), 이수택 등 13명이 모여 밤새워 회의를 했습니다.
 

19191110, 의열단이 탄생되다

 
이튿날 새벽 19191110일 김원봉을 의백(義伯), 즉 단장으로 하고 13인으로 구성된 의열단이 탄생됩니다. 의열단 창립의 핵심 세력은 약산 김원봉과 동향인 경남 밀양 출신 선후배 청년들과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자 경북지역 열혈 청년들이 절대다수였습니다. 한마디로 의열단은 초기 창립 구성원의 인간관계를 분석해 볼 때 경남 밀양과 경북 칠곡, 달성, 상주, 고령 지역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폭력혁명노선을 취해 만든 항일무장투쟁 단체입니다. 의열단! 이름만 들어도 일제 고위 관료와 밀정, 그리고 친일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1920년대 의혈 투쟁을 알리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당시 김원봉의 나이 만 21세였습니다.
 
의열단 결성 당시 단원은 13명이었지만 베이징으로 본부를 옮기고 베이징과 해륙풍소비에트에서 의혈청년들을 모집한 결과 1924년경엔 단원이 70명으로 늘어납니다. 의혈투쟁이 조선독립운동의 중심이었던 1924년까지 300명에 이르는 조선의 열혈 청년들이 일제에 의해 살해되는 등 희생을 당합니다. 당시까지 살아남아 있던 의열단원들은 공산주의와 합류했으며 대중적인 정치활동에 참여했는데, 의열단원 거의 전부가 1925~1927년 사이에 전개된 광둥코뮌, 해륙풍 전투 등 중국혁명을 위해 싸우다 죽었습니다. 중국혁명의 성공은 바로 조선의 혁명, 즉 조선의 독립으로 이어질 것이란 믿음에서 이역만리 중국 땅에서 중국혁명을 위해 이름도 명예도 없이 꽃 같은 청춘을 바쳤습니다. 님 웨일스의 아리랑에는 의열단의 숭고한 희생과 죽음이 조선독립운동가 김산의 삶을 통해 소상히 기술돼 있습니다.
 

의열단... 7가살과 5파괴 선언

 
의열단은 결성 당시 조선의 독립과 세계평화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공약 10암살 및 파괴 대상인 7가살과 5파괴를 선언합니다. 암살 대상 7가살은 조선총독과 대만총독, 군 수뇌, 매국노, 친일파 거두, 밀정, 반민족행위를 일삼은 토호세력입니다. 파괴 대상인 5파괴는 식민통치의 핵심인 조선총독부와 식민지 착취와 수탈 기관인 동양척식회사, 그리고 각 경찰서 및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사, 일본 중요기관입니다.
 
의열단 강령에는 일본제국주의 타도 및 제국주의 침략에 반대하는 세계 약소민족과 연대를 천명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조선에 봉건제도와 반혁명세력을 척결해 진정한 민주국가 수립을열망합니다. 철도, 전기, 은행 등 국가 기간산업에 대한 국가 경영을 천명하고 있고 의무교육과 직업교육을 국가가 비용을 부담하여 시행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여성의 정치ㆍ사회ㆍ경제적 권리를 남성과 동등하게 보장하며 소득세에 누진율을 적용하는 등 오늘날 북서유럽 선진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매우 진보적인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의열단의 의혈투쟁은 1920년대 전반기 조선독립운동사에서 큰 획을 그을 정도로 족적을 남겼습니다. 일제의 고위관리와 경찰, 그리고 친일 매국노, 밀정, 매국적 대지주, 자본가 등 민족을 배반한 반역의 무리들에겐 저승사자로 각인돼 의열단이름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지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성환, 진실과 거짓, 인물 한국사, 201-212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4왕조, ‘성스러운 왕’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 4 왕조 , ‘ 성스러운 왕 ’   스네프루는 고대 이집트의 제 4 왕조를 시작한 왕이다 . 그는 24 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남북 지역의 교류를 확대했으며 영토도 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