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일 일요일

김산, 실패했지만 패배를 거부한 불꽃같은 혁명가

역사 교과서에 단 한 줄도 기술돼 있지 않지만 한국 최고의 독립운동가 김산을 기억합니다. 한국의 독립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것을 가장 가치있는 일로 여겼던 한국 제1의 독립운동가 김산!

 

김산, 장지락, 장명

 
김산의 본명은 장지락(張志樂)입니다. 장지학은 호적상 이름입니다. 형제처럼 지냈던 운암 김성숙(김충창)도 회고록에서 장지락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님 웨일스의 아리랑에 등장하는 금강산에서 온 붉은 승려가 바로 김성숙 선생입니다. 다만 김산은 중국공산당 지하조직 활동을 할 때 장명(張明)이라는 이름을 썼고 그 외 10개가 넘는 가명을 썼습니다. 님 웨일스는 김산의 가명을 대여섯 가지로 언급했지만 실상은 그보다 많았습니다. 장명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즐겨 썼던 이름입니다.
 

김산과 님 웨일스... 아리랑

 
독립운동가 장지락에게 김산이란 이름을 붙여 준 사람이 님 웨일스(본명은 헬렌 포스터 스노)입니다. 님 웨일스는 웨일스계 미국인 여성 작가이자 기자로서 남편(에드가 스노)과 함께 중국대륙을 취재하던 중 1937년 초여름 중국 연안(延安)에서 우연히 김산을 만납니다. 당시 연안은 중화소비에트 본부가 있던 수도였는데 그곳에는 루쉰(魯迅)도서관이 있었습니다. 영어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을 찾던 님 웨일스는 도서관에서 영어 서적을 계속해서 대출해 가는 인물에 호기심과 관심을 갖습니다.
 
님 웨일스가 쓴 편지가 김산에게 전달되면서 극적으로 만나게 되고 22번의 대화와 노트 7권 분량의 기록 속에서 불후의 고전 아리랑이 탄생합니다. 아리랑은 당대 뛰어난 휴머니스트이자 고결한 인격을 지녔던 조선인 독립운동가의 강인한 정신과 치열한 삶을 기록한 책입니다. 파묻힐 뻔했던 무명의 조선인 독립운동가가 한국 근대 정신사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인물임을 알레 해 준 불후의 명작입니다.
 
아리랑1941년 뉴욕에서 아리랑의 노래(Song of Ariran로 출간되었습니다. 부제는 한 조선인 혁명가의 생애 이야기’(The Life Story of A Korean Rebel)였습니다. 님 웨일스는 1939년 필리판 휴양도시 바기오에서 아리랑의 초고를 완성했고 1940년 뉴욕으로 떠납니다. 1937년 님 웨일스와 인터뷰 당시 김산이 만주 항일전쟁에 참가하고자 보안을 위해 향후 2년간 출판을 보류해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아리랑에 의해 김산이 알려지다

 
고 이영희 교수의 회고대로 님 웨일스가 죽음을 각오하고 삼엄한 장개석 국민당 군대의 포위망을 뚫고 연안을 찾아가지 않았다면 아리랑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후손인 우리들 역시 조선독립운동사에서 김산이라는 탁월한 인물을 만나지 못했겠지요. 님 웨일스의 회상대로 일제의 억압 속에서 동시대의 조선인들에겐 영명한 지도자이자 사상가였으며 뜨거운 영혼과 가슴을 지닌 순수한 인도주의자김산은 우리의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리랑은 우리나라에는 해방 후 처음 소개되었습니다. 194610월부터 19481월까지 13회에 걸쳐 신천지에 번역, 연재되었습니다. 김산의 본명이 장지락이라는 사실도 님 웨일스가 1961년 자신의 작품집에 공개하기 전까지는 베일에 가려졌습니다. 그리하여 고 이영희 교수는 김산을 김책’, ‘최용건으로 상상하거나 한글학자이자 조선독립동맹 의장이었던 김두봉으로 그 가능성을 추정하기도 했습니다.
 
님 웨일스를 만났을 당시 김산은 항일군정대학에서 수학, 물리학, 일본어, 한국어를 가르쳤는데 폐결핵 등 중병에 시달렸습니다. 일제 경찰의 극악한 물고문으로 폐가 망가졌고 극심한 빈곤과 영양실조로 결핵에 감염돼 계속 각혈을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김산은 중화소비에트 연안에 파견된 조선인 대표로서의 역할이 끝나면 만주로 달려가 항일전쟁에 참전할 생각이었습니다. 이미 항일전쟁에 참전 중이던 친구 오성륜으로부터 수차례 편지가 왔기 때문입니다. 오성륜(본명 전광)은 광둥 코뮌, 해륙풍소비에트 시절 함께 했던 김산의 친구이자 유명한 테러리스트입니다. 그는 조선독립동맹 중앙위원으로서 활동했고 만주에서 항일전쟁 당시 동북항일연군 2사단 정치위원,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군계처장으로 활동했습니다.
 

1938, 중국공산당에 의해 처형된 김산

 
불행히도 1938년 김산은 중국공산당 강생(본명 조영)에 의해 트로츠키주의자, 일본 스파이 혐의로 체포돼 비밀리에 처형됩니다. 증거가 불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공산단 보안법정 책임자였던 강생의 지시에 따라 비밀리에 재판이 진행되고 전격 처형되었습니다. 처형 당시 김산의 나이 33세였습니다. 다행히 중국공산당은 1984년 김산의 아들 고영광 씨의 명예회복 조사 요청을 받아들여 잘못된 재판이었음을 인정했습니다.
 
김산의 처형은 특수한 역사적 상황 아래에서 발생한 잘못된 조치였다. (중략) 본 결의에 의해 그에게 덮어씌워졌던 불명예가 제거되며 그가 지녔던 명예를 모두 그에게 되돌린다. 또한 이로써 그의 당원 자격은 회복된다.”
 
따라서 항일혁명가로서의 명예를 회복했고 휴머니즘 넘치는 치열하고도 고결한 삶을 추후에 인정받았습니다. 대한민국도 2005년 뒤늦게 김산을 독립운동가로 인정하고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습니다.
 

31운동을 경험한 김산

 
김산은 14살에 31운동을 경험하고 이에 앞장을 섭니다. 당시 31운동은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에겐 인생에 크나큰 전환점으로 작용했습니다. 죽산 조봉암 선생이 그렇고, 운암 김성숙 선생도 31운동이 자신의 인생에서 인생행로를 결정짓게 한 역사적인 사건으로 작용했다고 회고했습니다. 실제로 김성숙은 191931일 탑골 공원에서 기미독립선언문을 낭독할 때 현장에 있었습니다. 이후 경기도 양주와 포천 지역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시위를 주도하다 일경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릅니다.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 역시 31운동을 겪으면서 일본제국주의의 잔악성과 민족의식에 크게 눈을 뜨게 됩니다. 물론 김산이 일본제국주의의 잔악성과 무도함을 처음 체험한 것은 7살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예방주사를 맞으러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어머니가 일본인 순사 2명으로부터 무자비하게 얼굴을 구타당하고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김산은 울부짖습니다. 그리고 평생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를 간직합니다. 어머니는 가난과 고통 속에서도 독립운동가 김산의 삶을 높게 평가하고 평생 마음으로 지지했습니다.
 

일본 유학과 모스크바를 향한 여정

 
그는 1920년 고학으로 일본 유학을 떠나 톨스토이즘, 아나키즘, 크로포트킨의 사상을 접합니다. 특히 중학교 대 처음 톨스토이를 접한 김산은 이상주의자였습니다. 김산의 의식 저변에 깔린 인도주의 정신은 아마도 어린 시절 기독교의 영향과 톨스토이즘에 그 뿌리가 닿았을 것입니다. 그는 톨스토이즘에 심취하여 도쿄 유학 시절 이후 1921년부터 1927년 광둥코뮌 때까지 톨스토이의 인생독본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거의 매일 읽곤 했습니다. 일본 유학 시절 도쿄는 새로운 학문과 사상의 수원지이자 혁명가들의 피난처였습니다. 아침 일찍 신문 배달을 하거나 인력거를 끄는 등 고된 고학생활 끝에 김산은 1년간의 짧은 일본 생활을 접습니다. 새로운 사상의 주원천지인 소련의 모스크바로 가서 공부할 생각이었습니다.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간 김산

 
용케 압록강을 건너 하얼빈행 기차를 탔지만 시베리아 국제간섭군의 방해로 방향을 바꿔 남만주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갑니다.
 
16살 어린 나이에 700리 길을 혼자 걸어서 신흥무관학교(삼원보 합니하 소재)를 찾아가는 대목에선 눈물이 날 정도입니다. 운암 김성숙 선생은 18살에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다가 뜻을 접고 경기도 양평 용문사로 출가합니다. 김산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한달이 걸린 도보여행 끝에 독립군 무관을 양성했던 독립운동의 산실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갑니다. 마적과 강도를 만날까 두려워 매일 밤 몰래 밖으로 나가 땅에 돈을 파묻고 이튿날 새벽 일찍 돈을 파내서 아침도 안 먹은 채로 여인숙을 나서는 일을 반복한 끝에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입학이 불허되었을 때 김산 스스로 가슴이 찌어질 정도로 아파서 엉엉 울며통곡했다고 썼습니다. 빼앗긴 조국을 되찾으려는 그 강렬한 의지와 정신, 가난 속에 고통받는 민족을 사랑하는 순결한 영혼 앞에 사뭇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열단원 김산

 
김산은 1921~1922년 아나키스트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과 가까이 지내면서 의열단원이 됩니다. 의열단원 의백 약산 김원봉은 김산을 친동생처럼 위했고 의열단 선전부장 김성숙과는 의형제 이상의 관계를 맺습니다. 특히 운암 김성숙은 김산의 일생에서 정신적으로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그에게 마르크스주의를 소개하고 입문시킨 장본인입니다. 실제로 김성숙은 뛰어난 논설을 많이 썼는데 베이징에서 발간된 혁명의 주필이기도 했습니다. 상하이에 머물 당시 김산은 춘원 이광수를 도와 상해임정의 기관지인 독립신문발간에 관여했습니다. 이후 독립신문주필이던 이광수의 친일 행각을 비판했고 도산 안창호 선생으로부터 깊은 정신적 감화를 받습니다. 김산 스스로 고백했듯이 도산 선생은 김산의 인생에서 두 번째로 깊은 영향을 미쳤던 인물로 묘사됩니다. 김산은 도산이 1916년에 세운 흥사단에 가입합니다.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김산 : 항일운동에서 혁명전쟁으로 전략적 수정

 
1923년 전후에 김산은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고 명문 베이징 협화의과대학에 다닙니다. 의열단원이었던 아나키스트 김산이 공산주의자가 된 경로는 의열단의 테러 활동이 역사적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입니다. 1920년대 중반을 전후해 개인적인 항일 테러 활동으로는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는 데 한계를 느낍니다. 1923~1927년까지 제국주의에 대한 용맹스러운 항일 테러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지만 300명이 넘는 의열단원이 처형되는 등 손실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조선의 항일운동은 전략을 수정하여 민중을 조직하고 대중운동을 통한 혁명전쟁으로 전환합니다.
 
의열단을 비롯한 당대의 조선인 독립운동가 상당수는 1920년대 중반 전후로 공산주의 사상에 경도됩니다. 약산 김원봉이 베이징에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설립하고 난징에는 조선혁명 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세워 독립군 장교를 양성한 이유도 그러한 시대의 변화에 조응한 때문입니다. 물론 그 시기 공산주의 사상의 이념적 우월성에 힘입은 바도 컸습니다. 베이징 한인 사회 역시 1924년 이후 급속도로 공산주의 사상이 확산되었습니다. 김산은 아나키스트에서 공산주의로 넘어갑니다. ‘중국혁명의 성공이 조선혁명의 지름길이라고 확신했기에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공산주의자가 됩니다. 그것은 지하활동을 통해 대중을 조직하고 무장한 군대조직을 보유하여 항일전쟁을 새롭게 전개하는 것으로 전략적 변화가 요청된 시대상황이 엄존했기 때문입니다.
 

1924년 창일당 조직

 
그리하여 김성숙은 1924년 베이징 공산주의 세력을 하나로 결집하기 위해 장건상, 김산, 양명, 김용환 등과 함께 창일당’(創一黨)을 조직합니다. 창일당은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의 베이징 지부였습니다. 창일당은 기관지로 혁명을 발간했는데 김성숙의 주옥같은 논설로 인해 창간 6개월이 채 안 된 시점에 3,000명이 넘는 구독자를 확보할 정도로 인기가 컸습니다. 그러나 19256월 만주를 지배하던 군벌 장작림이 일제와 야합해 조선인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기 시작하자 김산 등은 혁명의 중심지 광저우로 내려갑니다. 1925년 무렵에는 장개석 국민당 우익의 반동적 음모를 분쇄하고 좌파 무한정부를 지키기 위해 김산은 의열단 동지들과 광둥으로 떠납니다. 김산은 1925년 광둥으로 가서 1927년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습니다. 중국 혁명의 성공이 조선혁명으로 이어질 것으로 믿었으므로 중국혁명의 성공은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에겐 절대적 신념이자 조선혁명의 희망이었습니다.
 

조선혁명청년동맹결성

 
김산은 약산 김원봉, 운암 김성숙, 오성륜과 함께 조선혁명청년동맹을 결성하고 조직위원으로 피선됩니다. 광저우에서 결성된 조선혁명청년동맹은 의열단 민족주의자, 중국공산당 지부, 상해파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등 내부 분파가 존재했습니다. 김산은 김성숙과 함께 내부 분파 행동을 타파하기 위해 만주, 시베리아, 상하이, 베이징, 국내 등 각지에서 온 한인 공산주의자들을 대상으로 비밀스러운 조직 ‘KK’(독일어 Koreaner Kommunismus의 약자)를 조직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됩니다. 김성숙, 김원봉, 김산처럼 대부분 중산대학 재학생들로 구성되었으며 혁명이론과 실천에 매우 강했습니다. 김산은 분파 행동을 해소하기 위해 기관지 혁명운동의 부주필이 되어 맹활약했고 광둥 중산대학을 다녔습니다. 이후에는 약관의 나이에 황포군관학교에서 강의를 맡았습니다. 그러다 좌파 무한정부가 장개석 국민당군에 쓰러지자 광둥코뮌과 해륙풍소비에트 봉기에 참여하고 사선을 넘나드는 전투를 벌입니다.
 
말라리아에 걸려 사경을 헤매면서도 김산을 비롯한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은 중국혁명에 젊음과 목숨까지 아낌없이 바칩니다. 광저우 무장 봉기와 해륙풍 봉기 역시 열정적이고 뛰어난 자질을 갖춘 조선인 독립운동가 수백 명이 처형되거나 희생됩니다. 이준 열사의 아들 이영, 러시아혁명 당시 백러시아 군대에 맞서 싸우며 풍부한 전투 경험을 지닌 우국지사 박진과 그의 형제들, 탁월한 대포 전문 기술자이자 군사 지도자인 양달부 등 이름 없이 스러져 간 조선 독립운동의 영웅들을 만납니다. 이후 김산은 해륙풍 시절 천신만고 끝에 홍콩을 거쳐 상하이로 탈출했고, 그곳에서 광둥코뮌 당시 죽은 줄 알았던 오성륜, 김성숙과 극적으로 상봉합니다.
 

베이징에서의 혁명 활동

 
조선혁명의 이론적 지도자 김성숙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산은 1929년 봄 혁명 활동을 계속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떠납니다. 베이징은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엄혹한 감시와 통제가 한층 강화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김산은 일본의 첩자들이 촉수를 번득이는 베이징으로 들어가 지하활동을 벌입니다. 중국공산당 베이징시 지부 당비서가 되어 수많은 노동자조직을 세우고 당 조직이 굳건하게 뿌리를 내리는 데 힘썼습니다. 또한 중국공산당과 만주에 있는 조선인 공산주의 항일세력을 연결시키려 만주를 오가며 연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오성륜은 1930년 가을 만주 항일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만주 빨치산 부대에 합류하여 조직을 튼튼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7,000명 전원이 조선인으로 구성된 동북항일연군 제2사단 정치위원으로 활동합니다. 오성륜은 하루빨리 만주에서 김산과 함께 항일 전쟁을 수행하길 원했습니다.
 

체포, 고문, 출옥, 의심

 
베이징에서 지하 혁명 활동을 벌이던 김산은 193011월과 19334월 두 차례 체포됩니다. 한 번은 중국 경찰에, 또 한 번은 장개석 군대의 비밀경찰 남의사에 체포되어 일본 경찰에 넘겨졌습니다. 당시 중국 내에선 공산주의자는 무조건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던 시절이었습니다. 김산은 여섯 차례의 물고문과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야만적인 고문에도 꿋꿋이 버텨냅니다. 정강이뼈가 햐앟게 드러날 정도로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고문을 당하지만 끝내 증거 불충분으로 공산주의와 무관함을 인정받아 출옥합니다. 문제는 출옥 후 발생했습니다. 어떻게 조선의 감옥에서 그렇게 빨리 석방되었는지, 김산은 동지들로부터 왜놈 첩자로 의심을 받았습니다. 베이징 지부 당비서라는 지위를 회복하지도 못한 채 좌절과 실의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26살의 젊은 나이임에도 야만적 고문으로 인해 몰골은 노인네처럼 늙고 추레한 모습이었습니다. 게다가 심각한 물고문으로 폐가 망가졌고 결핵균마저 침투한 상태로 거의 죽음과 같은 시절을 보냅니다. 출옥 후 베이징으로 돌아왔을 때 다수의 배반자가 발생했고 당조직이 깨졌으며 동지들과의 모든 연락이 끊겼습니다. 김산은 절망적인 상황과 폐결핵과 말라리아로 만신창이가 된 육신 앞에서 죽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패배하더라도 좌절하지 않았던 김산은 죽음을 넘어서서 인류 사회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숭고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완전무결한 순결과 청렴결백을 고집했고 용서를 모르는 단호한 성격으로 정적이 많았기에 김산은 때때로 로베스피에로라고 불렸습니다.
 

명예회복, 코민테른 제7차 대회

 
결국 김산은 재판을 요청한 끝에 명예를 회복했고 1929년 코민테른(국제공산당)11당 원칙에 따라 조선혁명을 중국혁명에 종속시켰던 기존의 전략을 수정했습니다. 그리하여 중국혁명과 달리 조선혁명의 독자성에 주목합니다. 나아가 계급투쟁을 민족투쟁에 종속시킵니다. 그것은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등 파시즘의 대두와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제국주의의 정세 변화 등 1930년대 중반 세계정세의 급격한 변화에 직면했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반파시즘 통일전선을 형성하는 것으로 전략이 전환됩니다. 김산 역시 해륙풍소비에트에서 민족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공산주의자를 아우르는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하고 중앙위원이 됩니다.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강령은 항일투쟁의 기초 위에 공화국을 건설하여 조선혁명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일체의 일본제국주의 타도와 기득권 몰수, 시민적 자유의 보장과 조선 민중의 교육받을 권리 보장, 그리고 생활조건의 개선과 가혹한 세금의 폐지, 마지막으로 공공사업과 독점기업의 국유화 조치였습니다.
 

1936년 중화소비에트 연안에 파견되다

 
19368월 김산은 조선혁명 통일전선체인 조선민족해방동맹의 조선 대표로 중화소비에트 연안에 파견됩니다. 파견 당시 중병을 앓고 있었음에도 김산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전선의 봉쇄를 뚫고 연안을 거쳐 중화소비에트 수도인 보안(保安)에 도착합니다. 김산은 도착 후에 쓰러져 두 달 동안 침상에서 일어나질 못했습니다. 다시 일어나는 것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의 중병으로 죽어갔습니다. 193612월 서안사변 이후 중국공산당 홍군이 연안을 차지하여 수도를 옮기자 김산은 와병 중임에도 연안으로 따라갑니다. 연안 항일군정대학에서 김산은 물리학, 화학, 수학, 일본어, 한국어를 가르칩니다. 마침내 19377월 님 웨일스와 우연히 만나면서 불후의 고전 아리랑이 탄생하게 됩니다.
 

동지들의 죽음... 역사는 그들을 승리자로 만든다

 
이 책에서 우리는 김산의 영혼의 외침과 같은 담담한 고백을 듣습니다.
 
내 청년 시절 친구나 동지들 수백 명 거의 모두가 죽어 버렸습니다. 민족주의자, 기독교신자, 무정부주의자, 테러리스트, 공산주의자 그들은 모두 죽었지만 그러나 내게는 그들이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그들의 무덤을 어디로 정해야 하는지 따위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전쟁터에서, 사형장에서, 도시와 마을의 거리거리에서, 그들의 뜨거운 혁명적 선혈은 조선, 만주, 시베리아, 일본과 중국의 대지 속으로 자랑스럽게 흘러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눈앞의 승리를 보는 데는 실패했지만 역사는 그들을 승리자로 만듭니다.”
 

나의 전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나에 대해서만은 승리했다!

 
김산은 일본제국주의로부터 조국을 해방시키려는 조선혁명에 자신의 젊음과 목숨을 바칩니다. ‘나의 젊음을 어느 순간 잃어버렸다는 고백과 함께 나의 전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다고 되뇝니다. 그렇지만 그러나 단 하나에 대해서만, 즉 나에 대해서만은 승리했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고난 속에서도 계속 전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비극과 실패, 좌절과 절망의 고통이 오히려 스스로를 더욱 단련시켰기 때문입니다.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이 노골화되어 숨 막히던 시절,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영혼의 외침에 우리는 주목합니다. 나아가 민족해방을 향한 조선혁명의 대의와 고난 속에서도 진리의 순례자처럼 단련되어 갔던 고결한 영혼에 경의를 표합니다.
 
하성환, 진실과 거짓, 인물 한국사, 155-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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