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2일 목요일

[한국전쟁] 기독교 : 반공(反共)ㆍ친미(親美)ㆍ기복(祈福)의 삼위일체

한국 기독교의 강한 친미주의는 단지 원조 물자 때문만에 형성된 건 아니었다. 원조 물자가 큰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국 사회 전체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강하게 갖게 된 반공(反共)ㆍ친미(親美)ㆍ기복(祈福)이라고 하는 삼위일체적 삶의 원리를 수용하고 실천하는 데에 기독교가 가장 유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고 하는 점일 것이다.
 

# 한국전쟁이 종교에 준 영향

 
전상인은 한국전쟁은 전반적으로 종교 지형의 준독점적 혹은 과두제적 성격을 강화하였다며 이렇게 말한다.
 
전쟁의 피해는 모든 종교단체에 공통적인 것이었지만, ‘밀가루 신자라는 표현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전쟁 잉여물자의 배분, 외국 종교조직으로부터의 원조, 사회복지 활동 등의 측면에서 각종 특혜를 누릴 수 있었던 서구 종교가 크게 약진할 수 있었다. , 한국전쟁은 국가에 대한 접근 능력에 따라 종교간의 불평등을 제도화시킨 것이다. 나아가 이는 필연적으로 개별 종교 내부에서의 권력 갈등을 심화시켰다.”
 

# 한국전쟁은 기독교를 지키기 위한 전쟁

 
강원용의 다음과 같은 증언은 미국의 한국전쟁 주도가 한국전쟁이 기독교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기도 했다는 걸 시사해준다.
 
집에 도착해 정신을 차린 나는 곧바로 피난갈 준비부터 서둘렀다. 이번에는 멍청하게 뒤처질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차편도 없고 돈도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마침 미 선교부가 목사들의 피난길을 주선해 준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미군 사령부에서 군목을 하던 윌리엄 쇼라는 사람이 앞장을 서서 각 교단의 목사와 가족들을 부산까지 피난시킬 기차편을 마련해주고 한 가족당 5만 원씩 제공해주게 된 것이었다.”
 

# 기독교의 특혜 : 반공의 보증수표

 
그러나 그런 종류의 편의 제공보다 더욱 근본적이었고 광범위했던 대() 기독교 특혜는 기독교 신앙 또는 신자 행세가 반공(反共)의 보증수표로서의 가치를 갖는다는 점에서 비롯되었다. 비단 전쟁 기간뿐만 아니라 전후에도 계속된 빨갱이 사냥을 생각한다면, 그 보증수표의 가치는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목숨을 건지기도 하는 위력을 발휘했다. 다시 강원용의 증언을 들어보자.
 
원래 평양은 일제 때부터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정도로 기독교 세력이 전국에서 가장 융성했던 곳이었다. 따라서 국군이 입성한 평양은 그 동안의 박해에서 벗어나 해방을 만끽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공산당이 기독교를 박해하기는 해도 교회를 없애지는 않은 상태여서 모든 교회들이 매일 종을 쳐 사람들을 모으며 해방된 세상을 축하했다. 게다가 길거리에는 십자가가 그려진 완장을 차고 다니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특히 청년들이 많았는데 그것은 국군이 기독교 신자라면 무조건 관대히 봐주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평양 시내는 온통 기독교 신자로 꽉찬 것처럼 보였다.”
 
전쟁 당시 포로수용소에서 좌익분자가 우익수용소에 침투하기 위해 가장 자주 이용했던 방법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행세하는 것이었다.
 

# 반공에 앞장선 기독교 지도자들

 
기독교 지도자들은 실제로 기독교 신앙이라는 반공의 보증수표가 부도날 염려가 없을 정도로 반공의 전선에 앞장 섰다.
 
예컨대, 한국전쟁이 발발한 다음 날인 626일 서울에서는 교파를 초월한 개신교 단체인 대한기독교구제회가 조직되었고 73일 대전에서 목사 한경직이 앞장 서서 대한기독교구국회조직(회장 한경직 목사)을 만들었다. 이들은 남한 지역 30개 도시에 지부를 설치하고 국방부 및 사회부와 협력해 선무와 구호, 방송, 의용대 모집 등 반공과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이들은 선무공작대를 조직해 남한 전역에서 활동했으며 기독교 의용대라는 단기 군사훈련을 거쳐 전선에 배치되기도 했다.
 
특히 한경직은 인천상륙작전시에도 대한기독교구국회 회장으로서 군복을 입고 참여하는 맹활약을 하였다. 그는 LST(상륙작전용 수송함)를 타고 함정들과 함께 인천에 도착했는데, 아마도 한국인으로서는 인천 상륙작전 때 맨 처음 인천에 도착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 남한 교회의 전투적 반공주의

 
1945년에 월남해 남한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지도자가 된 한경직을 포함하여 월남 기독교인들은 남한 교회의 반공주의를 전투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진구에 따르면, “일제하 개신교는 서북 지방에 교세가 편중되어 있었는데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개신교인의 1/3 정도가 월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공산당의 탄압을 직접 체험하였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반공의식이 어느 사회집단보다 강렬했다. 그리고 이들이 남한 교회의 권력구조에서 공고한 기반을 구축함으로써 남한 교회의 반공주의는 더욱 강화되었다.”
 
기독교 지도자와 신자들은 단순한 참전만으론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을 합리화시켜 정당성을 부여했다. 물론 그 논리는 종교적인 것이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장면이 이 전쟁은 민주주의를 시련하는 새로운 전쟁이며, 한국은 무한히 자비하신 천주께로부터 전 세계가 민주주의 세력에 대한 신뢰를 새롭게 하는 데 도구로써 선택받았다고 주장했던 걸 상기해 보라.
 

# 공산주의자는 사탄마귀악마

 
김흥수는 기독교 지도자와 신자들이 시도한 전쟁의 정당화 방식은 이교도들을 개종시키라는 요청, 전투에서 사망하는 병사들을 위한 내세의 약속 그리고 전쟁을 선과 악의 투쟁으로 묘사하는 윤리적 이원론 등으로 나타났다고 말한다.
 
이원론에 의해서 적의 타자성이 철저히 강조되며 적의 희생이 허용되고 합법화된다. 이원론은 적을 비인간화시킬 뿐만 아니라 아군의 병사에게는 살인행위에 대한 죄의식ㆍ공포ㆍ동정 같은 인간적 경향들을 제거해 준다...... 한국전쟁은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특징으로 하는 전쟁이었으며, 따라서 이 전쟁에서는 어느 전쟁보다도 선과 악의 이원론을 통해 병사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생명을 걸도록 할 뿐만 아니라 적의 생명을 빼앗도록 설득하는 종교의 역할을 필요로 하였다.”
 

# 반드시 제거하고 절멸시켜야 할 공산주의

 
남한 교회들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을 사탄마귀악마로 표현하였다. 이는 반드시 제거하고 절멸시켜야 할 대상이었다. 예컨대 목사 한경직은 기독교와 공산주의라는 설교에서 공산주의 사상이야말로 묵시록에 있는 붉은 용이라면서 이 용을 멸할 자 누구냐?’고 물었다.
 
김흥수는 그런 이분법의 효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특히 남한 교회에서 볼 때, 기독교 신앙은 공산주의와는 근본적으로 적대관계에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싸움은 신 대 악마의 투쟁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언제나 자신만만한 싸움을 전개할 수 있었다. 이 같이 종교적으로 전쟁을 정당화하는 것은 신도들에게 전쟁에서 목숨을 무릅쓰고 싸우도록 그리고 그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용기를 주는 기능을 했지만, 전쟁의 참상에 상처받고 지친 사람들에게 그것의 원인과 책임을 설명해주는 일종의 이론이기도 했다.”
 

# 민간인 학살의 논리로 이용되기도...

 
교계 지도자들의 뜻은 아니었겠지만, 바로 그런 이원론이 민간인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논리로 이용되기도 했다. 선악 이분법은 학살을 저지르고 나서 양심의 가책은커녕 마음의 평안을 얻는 신통력까지 발휘했을 법 하다.
 
사정이 그와 같았던 만큼, 전후에도 여전히 기승을 떨친 빨갱이 사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우려면 교회에 다니는 게 최상책이었다. 개신교는 물론 천주교도 그런 위력을 발휘하였다. 빨갱이 집안으로 낙인찍힌 후,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천주교에 재산을 헌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 기복신앙

 
반공은 곧 친미를 의미하고 친미는 곧 친기독교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미국이 주도하는 한국전쟁에선 더욱 그랬다. 그렇다면 기복은 이에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
 
기복 신앙은 전후의 잿더미와 비교돼 엄청난 풍요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는 미국을 닮고 자본주의 정신에 투철해지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미국에 대한 동경과 숭배, 물질에 대한 한()의 종교적 표현이 바로 기복신앙이었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기복신앙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성격마저 갖게 되었다.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특별한 한국의 기복신앙은 마찬가지로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특별했던 한국의 역사적 상황이 낳은 산물이었던 것이다.
 
종교는 반드시 복을 주는 것이어야만 했다. 전쟁으로 인해 기아에 허덕이면서 육신은 물론 영혼까지도 엄청난 상처를 받은 사람들에게 당장 필요한 건 영생이 아니라 현세에서의 복이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그런 수요에 부응했다.
 
현실이 각박한 만큼 복을 구하는 신앙의 발현도 전투적이었다. 김흥수는 1951년 부산에서만 100여 개의 교회가 신축되었으며 그밖에도 교인들은 천막이나 창고 건물, 심지어는 언덕 풀밭 위에서 모이고 있었다고 말한다.
 
전쟁 중 천막을 전전하던 한국 교회는 기복의 메시지로 한국의 경제성장 속도와 발맞춰 나가거나 그걸 견인해 가면서 40년 후에는 세계 50대 교회 중 한국이 23개를 차지하는 놀라운 기적을 이뤄내게 된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제2, 113-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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