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일 일요일

서정주, 권력을 찬양하고 양지만 바라보며 살다 간 반민족적이고 반민중적인 언어마술사

미당 서정주가 죽은 후 미당의 후학과 후배 문인들에 의해 미당문학상이 제정되었습니다. 자신의 삶의 중요한 시기마다 권력을 찬양하고 양지를 좇은 반민족적이고 반민중적인 시인을 후대는 아름답게 포장하고 기리는 데 여념이 없습니다. 한국 문단의 자정 능력이 실종된 탓입니다.


 

서정주, 권력을 찬양하고 양지만 바라보다


정치적 무뇌아라는 세간의 혹평이 쏟아져 나왔음에도 서정주의 권력자 예찬은 마를 줄 모릅니다. 일찍이 권력욕의 화신! 독재자 이승만을 찬양하는 이승만 전기를 썼습니다. 그 대가로 30대 초반에 이승만 정권 초대 문교부 예술과장을 역임합니다. 박정희 정권 시절 박정희 전기 작가인 박목월에게 밀리지만 서정주는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의 베트남 파병을 찬양하는 시 다시 비정의 산하에(1966)를 발표하며 권력에 꼬리를 칩니다.
 
그런가 하면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북한 공산당의 행위로 규탄한 적도 있습니다.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정권을 찬탈한 정치군인 전두환을 찬양하는 발언을 라디오를 통해 그리고 텔레비전에 출연해 떠벌린 적도 있습니다. 그 대가로 서정주는 5공 국보위 위원이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방황과 식민지 청년의 고뇌


서정주는 처음부터 민족을 배반한 삶을 살진 않았습니다. 서정주의 젊은 시절 방황과 식민지 청년, 지식인으로서 고뇌는 민족의 고통스러운 현실과 유리되지 않았습니다...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서정주는 자신이 처한 민족모순과 나약한 삶의 이중성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서정주의 아버지 서광한은 호남의 대지주 김성수의 농장 관리인(마름)이었습니다. 마름이었던 아버지 서광한은 큰아들인 서정주가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하여 관료로 출세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바람과 다르게 서정주는 학창 시절 줄곧 부모의 기대와 어긋난 삶을 살았습니다.
 
어렸을 적 매우 총명했던 서정주는 전북 부안 줄포공립보통학교 6년 과정을 5년 만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습니다. 아버지의 기대를 한껏 받은 서정주는 1929년 상경하여 중앙고보에 입학했습니다. 경성제대를 졸업하고 고등관 시험에 합격하여 떵떵거리며 사는 지배계층을 욕망하면서 아버지 서광한은 큰아들을 서울 중앙고보에 입학시킨 것입니다. 입학시험에 떨어졌지만 김성수의 마름이라는 친분을 이용해 김성수가 주인인 중앙고보에 보결로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입학한 그해 11월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했고 서정주는 선배의 권유로 항일 시위에 참여합니다. 그는 식민지 노예교육 반대를 외치다 종로 경찰서로 연행돼 심한 매질을 당하고 석방됩니다.
 
경찰서에서 나온 직후 서정주는 식민지 현실의 참상을 체험하고자 자청해서 중앙고보 인근 게동의 하숙집을 나와 아현동 빈민굴에 들어갑니다. 그러다가 다시 1년 후 광주 학생들의 항일운동 1주년 기념 시위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구속돼 중앙고보에서 전격 퇴학을 당합니다. 부득이 아버지의 노력으로 고창군 소재 고창고보에 편입하지만 사회주의 사상 관련 독서회 사건과 시험거부 백지동맹을 주도한 혐의로 일경에 발각되어 권고자퇴를 당합니다.
 
고창고보에서 쫓겨나던 1931년 겨울에 17살의 서정주는 아버지가 요긴하게 쓰려고 모아둔 거금 300원을 훔쳐 서울로 달아나기도 했습니다. 톨스토이의 휴머니즘에 심취했던 19살 때도 아버지의 돈 30원을 갖고 서울로 줄행랑쳤을 만큼 아버지의 기대와는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문학청년으로 삶의 방향을 선회하다


서정주는 독립운동을 위해 훔친 돈으로 권총을 사서 만주나 연해주로 떠나려 했습니다. 그러나 서울 하숙집 주인 청년 배상기를 만나면서 서정주는 항일독립운동 대신 문학청년으로 삶의 방향을 선회합니다. 배상기는 세계문학에 박식한 중앙고보 선배로서 서정주에게 미당’(未堂)이란 호를 지어준 인물입니다. 서정주는 하숙집에 머물면서 8개월 동안 경성도서관을 드나들며 독서에 탐닉했습니다. 배상기는 서정주에게 소설가 김동리의 형을 소개해 주었고 나아가 당대 중앙불교전문학교(동국대 전신) 교장을 역임한 박한영 대종사를 만나게 해 주었습니다. 서정주의 문학과 인생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 바로 배상기였습니다.
 

시인으로 성공한 인생?


미당 서정주는 86세의 천수를 누리면서, 1,000편이 넘는 시, 시집 15권을 남겼습니다... 송창식의 노래로 히트를 치지 않았더라도 서정주의 푸르른 날은 그 어떤 산문보다 그리움을 이토록 절절하게 표현할 수 있었을까요!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는 윤동주의 서시다음으로 한때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애송되는 시로 꼽혔습니다. 그러나 미당 서정주의 시 세계는 거기까지입니다.
 

국화 옆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해석?


교과서에 수십 년 수록되어 국민 애송시로 칭송받은 국화 옆에서2000년 서정주가 죽은 이후 문학 교과서에서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노란 국화꽃이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온갖 풍상을 겪고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라는 비유적 해석에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노란 국화꽃, 황국(黃菊)=친근한 누님, 거울=관조의 경지라는 비유적 해석과 달리 노란 국화는 14세기 이후 일왕과 그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이었고 거울은 일왕의 현인신(現人神)의 위상을 획득하는 상징물이라는 상징적 해석이 제기되었습니다. 국화 옆에서가 해방 직후 발표된 시이기에 일본제국주의를 상징하는 한 송이 국화꽃을 찬양한 미당의 시 세계에 정신적 혼돈이 느껴짐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시적 언어의 기교면에서 미당의 시는 아름답긴 하지만 감동은 금세 사라져 언어의 유희로 남고 맙니다. 일찍이 미당을 체질적으로 싫어한 김수영은 그 이유를 밝힌 적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는 그 토속성이 견딜 수 없고 둘은 그 늘어지는 서정성이 그렇고 마지막은 미당의 반동성이 역겹다고 혹평했습니다.
 
1987년 서정주는 한국문인협회 회장 시절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에 대해 구국의 결단이라는 지지성명서를 냈습니다. 전두환 5공 정권을 찬양한 대가로 돈을 받아 잡지 문학정신을 발간하여 1980년대 참여문학인 민중문학 진영과 사상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미당 서정주의 친일 행위와 변명


어떤 이는 미당의 삶이 잘못된 부분도 있지만 그의 시가 아름다운 만큼 미당의 시 세계를 삶과 분리해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물론 미당 서정주는 친일 범죄를 솔직히 인정한 시인이라는 점에서 그간의 친일 문인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거기까지입니다. 그가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의 친일을 번복하거나 어쩔 수 없었다거나 당시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친일 행위를 희석시키려고 했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미당의 과거 친일 행적은 여느 친일 인사들의 변명과 궤를 같이합니다. ‘일제 말기를 살아보지 않았으면 말을 말아야 해’, ‘그때는 다들 그랬어’, ‘부득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잖아등 흔히 상황론을 들먹입니다.
 

일본에 충성하고 싶어 환장했던 서정주


깃대에 일장기를 꽂아 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던서정주! ‘일장기 히노마루를 방 아랫목에 세워두고 한참 동안 합장을 하며경건한 마음을 다했던 서정주! 일본 제국주의가 일으킨 침략전쟁인 태평양전쟁을 국가사회 발전을 약속하는 진리의 전쟁이자 역사적 사명으로 치켜세웠던 서정주! 일제 말기 서정주의 친일 행적은 단순한 감정이 아닌 이성과 논리로 확신에 찬 신념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미당은 명백한 친일 문인이자 역사적으로 청산되었어야할 문학인입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 제국주의는 전쟁 수행을 위한 총후 문학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1939년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지시로 조선문인협회를 만듭니다. 이는 1943조선문인보국회로 변신하면서 일본 정신을 퍼뜨리는 황도 문학에 광분합니다. 민족적 양심을 지닌 작가들이 붓을 꺾거나 작품을 쓰더라도 발표를 하지 않았던 시절입니다. 그러나 서정주를 비롯해 이광수, 유진호, 김동인, 최남선, 최재서 등은 제국주의 침략을 선동하는 내용을 일본어로 쓰는 데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1945815일 해방 당일 오전 10에 서정주는 김동인과 함께 조선총독부 정보과장을 찾아갔습니다. 대일본제국에 더욱더 충성할 작가단체를 만들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했지만 거절당합니다. 그리고 귀가하던 도중 일왕 히로히토의 무조건 항복 방송을 접하고 집으로 줄행랑을 칩니다.
 

시인이 아닌 언어마술사


아름다운 언어로 우리말의 맥을 잇고 형상화한 시인은 서정주가 아닙니다. 시는 단순히 언어의 기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언어마술사라면 모를까 적어도 서정주를 우리말을 아름답게 시어로 형상화한 민족시인이니 국민시인이니 하며 찬미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도 않고 정당한 평가도 아닙니다. 그것은 치열한 작가정신을 담아 우리말을 아름답게 시적 언어로 형상화한 이육사, 윤동주를 모독하는 배반된 행위입니다. 나아가 민족 스스로에게도 자기분열적인 태도입니다. 미당 서정주는 권력을 좇아 양지만 바라보며 살다 간 언어마술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하성환, 진실과 거짓, 인물 한국사, 살림터, 2017, 136-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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