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9일 월요일

[한국전쟁] 부산정치파동(1952년 5월)과 김성수 부통령의 사임

1952526일로 내정돼 있는 내각제 개헌안 표결을 앞두고 이상한 일들이 잇따라 일어났다. 521일 헌병사령관 원용덕은 부산 금정산에 무장공비가 출현하여 미군 2, 한국군 3명을 사살하고 도주한 사건이 발생했다고 발표하였다. 사회 분위기는 더욱 살벌해지고 얼어붙었을 것이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이건 조작된 사건이었다.
 

# 무장공비 침투사건을 조작한 김창룡


당시 부산시내에 무장공비 침투라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김창룡이 대구형무소의 중형수들을 빼내 공비로 위장시켜 벌인 조작극이었다. 당시 대구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서민호는 김창룡이 대구형무소를 들락거리는 걸 여러 차례 목격했으며, 함께 있었던 중형수들로부터 직접 거래 조건을 들었다. 김창룡은 일이 끝나면 중형수들을 석방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공비로 몰려 그 자리에서 사살되고 말았다.
 

# 국무총리 장택상, 내무부장관 이범석

 
이승만은 524일 공석 중인 총리에 장택상을 앉히고 이범석을 내무부장관에 임명했다. [장면은 420일에 총리직을 사임하였다] 장택상은 이범석이 초대 국무총리로 있을 때 외무부장관을 했었는데, 재미있는 반전이었다. 장택상은 자신이 이끌고 있던 신라회 회원 21명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지지하는 쪽으로 돌렸다. [신라회는 영남 및 대한청년단 출신으로 구성돼 있었으며, 김영삼이 간사를 맡았다.]
 

# 이승만의 비상계엄 선포

 
이승만은 525일 경상도와 전라도 일대에 아직 남아 있는 공비들을 소탕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부산을 포함한 경상남도와 전라북도 일부 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계엄사령관에는 헌병사령관 원용덕이 임명되었다.
 
국방부장관 신태영은 계엄 업무 지원을 위한 2개 대대 차출 지시를 대구에 있는 육군본부에 내렸다. 참모총장 이종찬은 참모회의에 결정으로 병력 차출을 거부하고, 각 부대에 군은 본문을 망각하고 정사에 간여하는 경거망동을 하지 말라는 요지의 육군장병에게 고함이라는 육군 훈령 제217호를 하달하였다.
 

# 526, 출근하는 국회의원을 크레인으로 끌고가다

 
52650여 명의 국회의원들이 등원하기 위해 탄 출근 버스가 크레인으로 헌병대에 끌려가는 사태가 발생했다. 다음날 12명은 국제공산당과 결탁했다는 혐의로 투옥되었다. 국회는 528일 비상계엄령 해제 요구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했으며, 이틀 후에는 국회의원들에 대한 석방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528일 언커크(UNCURK, 국제연합한국통일부흥위원단)헌법과 계엄법을 위배한 계엄령의 즉각 해제를 요구하는 성명을 냈다. 그러나 모두 묵살당했다.
 

# 부통령 김성수의 사임 이유 : 이승만이 재선되면 안된다

 
부통령 김성수는 이 같은 정국을 통탄하고 정치파동에 대한 책임을 물으면서 529일자로 사임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그는 사임 이유서에서 (이승만)가 재선되면 장차 국회는 그의 추종자들 일색으로 구성될 것이며, 이후에 그는 자기의 3, 4선을 가능하게 하도록 헌법을 자재로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김성수의 사임 이유서는 계엄하의 검열로 신문에는 실리지 못했으나 국회 본회의에서 낭독되었다.
 
현 정부의 수반인 이 박사는 충언과 직언을 혐오하고 아부만 환영하며 그의 인사정책은 사적 친분으로 일관된 가운데, 자기 부하조차 항상 시기의 눈으로 보아 모든 국사를 그 자신이 일일이 직접 해결하려 하고 자신이 임명한 장관을 견제하기 위해 그의 심복을 차관에 배치하고 차관을 견제하기 위하여 다른 심복을 국장에 임명하는 것과 같은 수단을 써 그의 밑에서는 아무도 가진 바 역량과 포부를 발휘할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 김성수의 문제제기 : 신성모를 주일 한국대표로 임명한 것

 
김성수는 자신이 강력히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이 신성모를 주일 한국대표로 임명한 것도 문제삼았다.
 
천하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신성모는 가장 비민주적인 권모술수로써 국정을 어지럽혀 온 장본인으로 …… 그에게 벌을 주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외교의 요직에 등용하여 국가를 대표하게 한다는 것은 민족의 정기를 살리기 위하여서나 정부의 기강을 세우기 위하여서나 또는 대외적인 체면을 유지하기 위하여서나 도저히 묵과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부당성을 들어 임명을 철회할 것을 극력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끝내 고집하여 신성모를 일본에 파견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나는 국운이 기울어져감을 목전에 보고 일제 이래 수십 년간 가슴 속에 겹쳐 쌓인 심화(心火)가 일시에 복받쳐올라 마침내 병석에 눕게 되었던 것입니다.”
 

# 김성수, 내각책임제의 당위성을 역설하다

 
김성수는 이어 내각책임제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내가 부통령에 취임한 후 각하’(閣下)라는 호칭을 폐지하기로 국무회의에서 정식 결정해 널리 공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에게 구두 혹은 서신으로 각하를 붙이는 사람이 끊이지 아니하였을 뿐 아니라 극단적인 예로는 부통령 폐하(陛下)’라는 존칭을 써서 나에게 편지를 보내온 사람이 있을 정도입니다. 이 웃지 못할 사실에 접하고 나는 우리 국민을 빨리 민주화하기 위하여는 한 사람이 거의 황제에 가까운 강대한 권한을 쥐고 있는 현행 대통령제를 개변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겠다는 것을 통감하였던 것입니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제1, 284-287]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4왕조, ‘성스러운 왕’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 4 왕조 , ‘ 성스러운 왕 ’   스네프루는 고대 이집트의 제 4 왕조를 시작한 왕이다 . 그는 24 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남북 지역의 교류를 확대했으며 영토도 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