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일 일요일

병법의 천재(?), 한국전쟁에서 삼십육계 줄행랑을 시전한 이승만

1950625전쟁 발발 당시 이승만은 아침부터 창경궁 비원, 반도 연못에 한가롭게 낚시를 했습니다. 대통령 이승만에게 남침 소식이 전해진 것은 오전 10시쯤이었습니다. 인민군 남침이 시작된 지 6시간이 지난 시점에야 대통령에게 보고된 것이지요.
 


최초의 국무회의는 발발 당일인 625일 오후 2시부터 330분 사이에 열렸습니다. 1시간 반 동안 진행된 국무회의에서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에 연락하여 미 공군의 지원을 요청하는 등 공산군의 남침에 대한 단호한 조치를 논의한 것으로 1950626일 자 조선일보는 전합니다.
 

전쟁이 터지자 도망칠 생각만 했던 이승만


이날 최초의 국무회의는 간담회 성격을 크게 벗어나질 못했습니다. 전황에 대한 정확한 정보도 공유하질 못했고 전쟁 발발 상황에서 정부 차원의 구체적인 대책도 제시하지 못한 채 흐지부지 끝나버렸습니다. 분명한 것은 626일 저녁, 이승만은 주한 미대사 무초를 경무대로 불러들여 위기 상황에서 대통령인 자신이 먼저 피신해야 한다며 미국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무초 미국 대사는 대통령이 서울을 빠져나가면 군인들은 싸울 의지도 사기도 없어진다며 이승만의 서울 탈출을 거부합니다. 이승만은 불안 속에서 25일 밤을 보내고 26일을 보냅니다.
 
전쟁이 발발하고 이틀이 지난 627일 새벽 1시 이승만은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합니다. 수원천도를 결정하고 서울 시민 피난 문제는 논의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이승만은 국회의장, 국무총리, 각부 장관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프란체스카 여사와 수행비서 2명과 함께 새벽 4시 몰래 서울역에 나타나 특별열차를 탑니다. 특별열차라 해봐야 기관차 1량에다 더러는 유리창이 깨진 3등 객차 2량뿐인 초라한 풍경이었습니다. 대통령으로서 시민들의 피난 계획은 세우지도 않고 서울 시민을 내버린 채 가장 먼저 탈출한 것입니다.
 

과연 한 나라의 지도자로 이런 수준밖에 안되었는가?


이 비밀스런 서울 탈출을 두고 원로 혁명가 조소앙과 원세훈은 탄식을 합니다. “새벽에 국회를 소집해서 수도 서울 사수를 결의해 놓고 혼자 도망가다니”, “중국의 장개석 정부도 이럴 때에 먼저 국민에게 정부를 어디로 옮기니 어떻게 대피하라고 공표를 미리 했는데, 서울 함락이 눈앞에 다다랐는데도 큰소리만 치고 있으니사상검사 오제도 못지 않게 반공검사로 이름을 날린 선우종원 역시 대통령 이승만의 서울 탈출을 국민의 지도자다운 모습은커녕 혁명가다운 기품도 간직하지 못한 인물이라고 격하게 비난했습니다.
 
장차관들 각료와 국장급은 627일 아침 예정된 7시 기차를 타고 서울을 탈출했습니다. 재무부 장관은 한국은행 금고에 있는 은행권을 그대로 둔 채 탈출할 만큼 무책임했습니다. 결국 혼비백산한 혼란 속에서 한국은행 총재와 국방부 대령이 은행권을 후송했습니다. 하급 공무원들을 탈출시키기로 예정된 8시 기차는 오지 않았고 피난길에 오른 시민들이 서울역에 몰려들자 역장은 하는 수 없이 특별열차를 편성하여 627일 정오에 출발시켰습니다. 서울을 떠난 마지막 기차였습니다.
 
627일 새벽 이승만을 태운 특별열차는 수원에 멈추지 않고 대전을 거쳐 오전 10시에 대구에 도착합니다. 대구에 이르렀을 때 대통령을 수행하던 비서 황규면이 각하, 너무 많이 오신 것 같습니다라고 간언하자 대구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열차를 돌려 대전으로 돌아옵니다.
 

이승만의 녹음 방송, “국민은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 동요하지 말라


열차를 되돌려 대전으로 돌아온 이승만은 장거리 전화를 이용해 KBS 서울방송국에 녹음된 내용을 방송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정부는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국회도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했으며, 일선에서 충용무쌍한 우리 국군이 한결같이 싸워서 오늘 아침 의정부를 탈환하고 물러가는 적을 추격 중이니 국민은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직장을 사수하라.”

이날 방송은 밤 10~11시 사이 3, 4차례 나갔는데 시민들은 마치 대통령 이승만이 서울에 있는 것처럼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은 이승만의 지시로 녹음되었고 방송으로 내보내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피난길에 오르려고 쌌던 봇짐을 다시 풀고 서울에 잔류했던 시민들이 많았습니다.

한강다리 폭파


628일 새벽 2시 반, 이승만은 결국 하나밖에 없는 한강다리를 폭파합니다. 육군 공병감 최창식 대령(29)은 채병덕 참모총장의 명령을 받고 한강다리를 건너던 피난민 대열과 후퇴하던 군인들, 그리고 군용차량 대열을 무시한 채 폭파합니다... 당시 최창식 대령의 지시를 받고 폭파를 지휘한 엄홍섭 중령은 한강 이북에서 다리를 넘지 못한 채 대기했던 부대와 피난길에 오르지 못한 시민들을 생각하며 울었다고 했습니다. 엄홍섭 중령은 법정에서 최창식 대령의 폭파 지시는 조기 폭파였다며 최 대령에게 불리한 진술을 했습니다.

원래 한강 폭파 시점은 628일 아침 시간이었습니다. 6~8시간 여유가 있었음에도 한강 이북 기마경찰대의 소리를 북한군 탱크 소리로 오판하여 조기 폭파를 단행한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한강 이북에서 대기하던 군병력과 물자 수송에 막대한 타격을 입었고 민간인 희생 또한 컸습니다. 비판이 거세게 일자 이승만 정권은 921일 최창식 대령을 희생양으로 삼아 적전비앻죄로 전격 처형시킵니다. 한강다리 폭파 명령은 채병덕 총참모장의 지시였고 그 지시는 결국 국군 총참모장 미군 측 고문 제임스 하우스만 대위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최창식 대령의 부인 옥정애 여사가 1964년 재심을 청구하여 남편 최창식 대령은 무죄 선고를 받고 누명을 벗습니다. 한강다리 폭파 책임이 채병덕 총참모장에게 있다고 선고했기 때문입니다.

928 서울 수복 후 부역자 처단에 몰두


이승만은 928 서울 수복 후 서울 시민에게 머리 조아리고 사죄하기보다 부역자 처단에 눈에 불을 켭니다. 신익희(국회의장), 조봉암(국회부의장) 등 국회의원들은 대통령에게 사과문을 발표하라고 의결한 국회 결의문을 이승만에게 전달하면서 사과를 종용했습니다. 사태 수습을 위해서 가장 초보적인 조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내가 왜 국민 앞에 사과해야 해? 사과할 테면 당신들이나 하라고 거부합니다.

서울 수복 후 이승만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놀랍게도 인공 치하에서 목숨을 부지했던 사람들을 향해 부역자딱지를 붙여 가며 색출하고 처벌한 악행이었습니다. 이때 부역자로 처벌받은 시민들이 공산주의, 즉 세칭 빨갱이와는 거리가 먼 소시민들이었습니다. 인민군에 적극적으로 부역한 사람들은 915 인천상륙작전 직후 인민군을 따라 이미 북으로 떠났기 때문입니다.

양심 판사 유병진


부역자 재판을 맡았던 유병진 판사는 심리 과정에서 인공 치하 내무서(경찰서에 해당) 청소와 잔심부름을 했던 14세 홍안의 소년에게 무죄를 선언합니다. 그리고 절도죄를 저지른 17~18세 두 명의 중학생에게도 징역 10년이 아니라 무죄를 선언합니다. 부역자 재판이 전쟁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예민한 성격을 띠었음에도 비상계엄하의 법과 현실 속에서 고뇌하면서 재판관의 양심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유병진 판사는 잘 알다시피 2, 3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과 맞붙었던 조봉암 선생에게 1심에서 간첩죄 무죄를 선고했던 용기있는 판사였습니다. 이 재판 이후 극우 관변단체인 반공청년단 회원들 200여 명이 법원 청사와 재판정에 난입해 친공판사 유병진 타도조봉암 간첩죄 처벌을 주장하며 유병진 판사를 위협하는 작태를 연출합니다.

모윤숙의 분노와, 이승만의 변명


모윤숙은 인공 치하 3개월을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서울 수복 직후 930일 모윤숙은 경무대(현 청와대)로 이승만을 찾아갑니다. 모윤숙은 이승만을 보는 순간 어찌나 분하던지 가슴에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승만에게 곧장 달려들어 넥타이를 붙잡고 대롱대롱 매달리며 마구 악을 쓰고 복도를 데굴데굴 뒹굴며 소리를 질러댑니다.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좀 점잖게 고정하라는 질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분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할아버지, 도대체 나를 부려 먹고 막판에는 방송을 시키고 혼자만 살려고 피난 가기예요? 할아버지, 나는 분해서 못 살겠어요.” 이승만은 숙연한 표정으로 눈을 껌벅껌벅하면서 나도 피난을 가려고 갔어야지. 그날(627) 헌병 넷이 와서 내 사지를 번쩍 들어 차에 태워서 갔어라고 변명합니다.

하성환, 진실과 거짓, 인물 한국사, 272-274
 
=-=-=-=-=-=-=-=-=
 
전쟁이 일어나면 누구나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 생기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한 나라를 통치하는 지도자라면 일말의 책임의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식이 없다면 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는 것이다. 이승만은 그런 점에서 그가 해방 이전에 독립운동을 했건 안했건 상관없이 대통령의 자격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도망칠 생각만 하고 있다는 걸 무초 미국 대사가 들었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런 함량 미달의 인물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생각해보면 중국 고대 병법서인 삼십육계 중에서 삼십육계 줄행랑을 몸소 실천에 옮긴 건가?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4왕조, ‘성스러운 왕’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 4 왕조 , ‘ 성스러운 왕 ’   스네프루는 고대 이집트의 제 4 왕조를 시작한 왕이다 . 그는 24 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남북 지역의 교류를 확대했으며 영토도 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