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6일 월요일

사사오입 개헌 - 국민 78.8%가 반대한 초대 대통령 연임 [1954년 11월 27일]

현 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 폐지를 위한 헌법 개정에는 전체 의석의 3분의 2136석이 필요했다. 그러나 자유당이 520 총선에서 얻은 의석은 114석으로 22석이 모자랐다.
 

# 자유당의 무소속 의원 매수작전

 
자유당은 막대한 정치자금을 동원해 무소속 의원 매수작전에 돌입했다. 그래서 무소속 의원이 많으면 대가가 싸고 그 수가 적으면 값이 올라간다는 말이 나돌았다. 매수와 더불어 부정선거 고발 위협도 동원됐다. 이렇게 해서 자유당은 무소속 당선자 23명을 자유당에 입당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자유당은 195497일 선거 공약을 실현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국회에 개헌안을 제출했다. 대통령 중심제, 국무총리제 폐지, 대통령 궐위시 부통령의 자동 승계제, 중대 사항 국민투표제 관련 내용이 들어갔지만 핵심은 초대 대통령의 중임제한 철폐였다. 이승만은 개헌안을 제출하면서 개헌에 반대하는 자는 국가시책에 대한 파괴행위자 내지 반역행위자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정부에 반대하는 어떠한 정당이나 단체라도 개헌안의 국민투표 조항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 개헌안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

 
그러나 개헌안의 국회 본회의 상정이 여의치 않았다. 여론이 워낙 나빴기 때문이다. 한국일보19541011일자가 보도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개헌안 가운데 국가 안위에 대한 중대 사항을 국민투표로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찬성 28.5% 반대 65.7%, 국무총리제 폐지는 찬성 28.8% 반대 63.7%, 초대 대통령 연임은 찬성 16.9% 반대 78.8%였다.
 
개헌안 처리가 지지부진해지자 이승만은 1019일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다. 이승만은 국가의 위급한 문제는 소련과 중공이 침략하려고 하고 일본이 다시 병합하려고 하는 것인데, 이런 때에 또 다시 2년 전의 소위 정치파동과 같은 난국이 전개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번 개헌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투표제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에 반대하는 사람은 나라의 국권을 회복코저 하는 생각은 없고 외국의 재정이나 세력을 빌어서 국권을 동요시키는 반역사상을 가진 것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 ‘뉴델리 밀회사건’, 민국당의 자살골

 
그래도 개헌안은 10월말까지 끝내 상정되지 못했는데, 이때 터진 것이 바로 뉴델리 밀회사건이었다. 국도신문19541012일자 보도에 의해 터지기 시작한 이 사건의 내용인즉슨, 195362일 당시 국회의장 신익희가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 대관식에 참여하고 귀국하던 중 인도의 뉴델리 공항에서 625전쟁 때 납북된 조소앙과 만나 밀담을 나눈 한편, 3세력을 규합해 남북협상을 추진하여 한국의 중립화를 도모하기로 밀담을 나누었다는 것이다.
 
이 설의 발설자는 한민당 선전부장을 오랫동안 지냈던 민국당 선전부장 함상훈이었다. 함상훈은 전 민국당우에게 고함이란 성명서를 발표해 신문에 보도된 자신의 발설을 뒷받침했다. 민국당이 허위 사실을 조작해서 신문에 제보한 것을 이유로 함상훈을 당에서 제명하자, 함상훈은 다시 성명서를 발표해 확실한 증거가 있다고 주장했다. 1029일 자유당 의원 김종신은 국회 본회의에서 뉴델리 밀담설의 진상을 규명하자는 긴급동의를 했다. 이는 즉각 국시에 관한 중대사로 인정되어 1029일 국회에서는 함씨 성명을 긴급 상정해 진상 규명 활동을 시작했다.
 

# 뉴델리 밀담설이 자유당에게는 호재로 작용함

 
연시중은 이 파문을 지켜본 자유당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고 말한다.
 
마침 개헌안을 추진중이었는데 뉴델리 밀담설이 호재로 작용해서 함상훈의 행각에 흐뭇해했다. 자유당은 제3세력 침투설과 개헌안을 결부시켜서 국가 안위에 관한 중대한 사항은 국민투표로 결정한다는 국민투표제 개헌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개헌에 대한 명분을 국민투표제로 호도하던 자유당으로서는 아주 훌륭한 기회를 선취하게 된 셈이다.”
 
한국일보경향신문113일자는 함상훈의 성명이 야당의 전열을 흐트러뜨리면서, 자유당 내분을 잠재우고, 태도가 모호하던 의원들을 붙잡아두며, 국민투표제가 필요하다는 여론 곧 공산당의 흉모를 막기 위해 개헌이 필요하다는 여론을 만들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 매카시즘 열풍

 
실제로 국회에 매카시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국회는 114일 긴급동의로 들어온 남북협상 중립배격 결의안을 통과시킨데 이어, 116일과 11일에도 계속 반공 결의문을 채택했다. 국회 밖에서는 이른바 민의’(民意)가 동원되었다. 지방의회 의원들이 부산 정치파동 때처럼 다시 들고 일어나 국민 전체가 갈망하는 개헌안을 조속히 통과하라는 결의문을 전달하였다. 또 백주에 자동차로 수십만 장의 전단이 뿌려지고 벽보가 나붙었다. 11월 하순 들어 헌병총사령관 원용덕은 휴전감시위원단 중 적성국 대표들은 일주일 이내에 철수하라, 불응하면 단호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124일에는 서울운동장에 170개 학교 10만여 중고등학생들이 모여 주권수호 학생총궐기대회를 열었다.
 

# 136표에 1표가 모자란 135

 
1120, 그 살벌한 바람의 와중에서 개헌안이 상정되었다. 1127일 토요일에 열린 제90차 국회 본회의는 표결에 들어갔다. 표결에 앞선 토론에서 무소속 의원 송방용은 자유당 지도부가 소속 의원들에게 표의 이탈을 막기 위해 암호 투표 방법을 사용하게 해서 심리적인 압박을 가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가부(可否)의 표시가 있는 투표용지에 각 도 단위로 부()자를 지우는 방식을 달리해 개헌안이 부결되었을 경우 이탈자를 색출해 내겠다는 것이었다. 논란 끝에 비밀 보장을 약속받고 표결에 들어갔다.
 
개표 결과, 출석 의원 203명 중 찬성은 헌법 개정에 필요한 136표에 1표가 모자라는 135표였다. 2033분의 2135.333명이기 때문에 이건 분명 부결된 것이었다. 그래서 사회자인 부의장 최순주도 부결을 선포했다.
 

# 사사오입 개선 - 수학계의 권위자들이 제공한 논리

 
그런데 일요일을 보내고 나서 월요일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29일에 열린 국회 제91차 본회의에서 최순주는 27일의 본회의에서 개헌안의 부결을 선포한 것은 계산 착오에 의한 것이므로 이를 취소하고, 개헌안은 사사오입의 수학 원리에 따라 가결되었다고 선포한 것이다. 자유당은 135.333를 사사오입하면 135가 된다는 해괴한 논리를 내세웠다. 그래서 이 개헌에 사사오입 개헌이라는 별명이 붙게 된 것이다.
 
자유당 원내총무 이재학은 1353분의 2라는 담화를 발표하면서 최윤식, 이원철 박사 등 수학계의 최고 권위자도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삼웅에 따르면, “자유당이 본회의장에서 개헌안의 부결을 선포한 후 패배와 실의에 빠져있을 때 서울대학의 최, 이 교수가 경무대로 이승만 대통령을 은밀히 방문, 이 같은 수학적인 원리를 곡언하여 이미 부결 선포된 개헌안이 전격적으로 번복되기에 이른 것이다.”
 

# ‘3세력 사건

 
박태순과 김동춘은 뉴델리 밀회설은 이기붕의 두 번째 정적 제거 작업이며 그 이전에 저지른 게 3세력 사건이라고 말한다. 1954520 총선 직후 신익희가 자유당만으로는 정국을 이끌어갈 수 없으니 거국내각으로 보수연합정치를 펴야 한다는 건의를 은밀히 이승만에게 하면서 서울시장 김태선을 통해 비밀리에 거국내각 후보 명단을 이승만에게 전달했었다는 것이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이기붕은 이정재에게 그 명단을 돌려 과거 송진우, 장덕수, 여운형, 김구에게 가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방식을 강구토록 하였는데, 하수인들이 암살 테러를 결행하기 직전에 내분을 일으켜 오히려 그 사건이 폭로되고 말았다. (후일 4월혁명 재판 당시 이정재에 대한 기소장에서, 그가 자유당 감찰부 차장으로 있을 때엔 195411월 신익희, 조병옥 등 42명의 이름이 포함된 3세력도표를 만들어 심복부하인 김동진에게 제시하면서 암살을 교사했다는 3세력 제거 음모 사건이 기소 이유의 하나로 밝혀진 바 있다)”
 

# ‘뉴델리 밀회설은 민국당의 내분을 시사한다

 
그러나 사사오입의 개헌을 부른 뉴델리 밀회설에 관한 한 이승만과 자유당만 탓할 일도 아니었다. 뉴델리 밀회설은 민국당의 뿌리 깊은 내분을 시사해주는 사건이었다. 뉴델리 밀회설은 사실무근으로 밝혀졌지만, 이미 모든 게 끝난 뒤였다. 나중에 민국당 내분으로 인해 김준연이 탈당할 때 조병옥과 김준연 사이에 설전에선 상호 뉴델리 밀회설 사건을 조작하는 데 가담했다는 비난전이 오고 갔다.
 
서중석은 뉴델리 밀회설민국당의 극우세력이 유화파인 신익희를 공격하고 제거하기 위하여, 조병옥ㆍ김준연 등이 작용하여벌어진 사건이라고 말한다. 서중석에 따르면, “정치감각이 뛰어난 조병옥 같은 사람이 그 과정에서 일역을 맡은 것은 국민에 대한 일종의 배신행위였다.”
 

# 민국당의 발전적 해체를 통한 범야권 대동단결의 필요성 대두

 
민국당에 희망은 없었다. 530 총선의 결과 원내 15석의 군소정당으로 전락해 있던 처지에서 그런 어이없는 자해(自害)까지 저지른 정당에 미래가 있을 리 만무했다. 이제 반() 이승만 세력은 민국당의 발전적 해체를 통한 신당 결성을 위해 범야권 대동단결을 촉진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사사오입 개선시 반대표를 던진 자유당 의원들도 그런 대동단결의 대상이었다. 개헌에 공개적 찬성을 표명한 무소속 윤재근을 비롯하여 박재홍, 임홍순 등 10명이 가표를 던진 것으로 알려졌다. 개헌 파동 후 자유당 의원들 가운데 현석호, 민관식, 김영삼, 황남팔, 이태용, 김홍식 등 12명이 자유당을 탈당해 범야권 신당 창당에 참여한 것으로 보아 이들 12명이 부결표를 던졌을 것이다.
 

# 불온문서 투입 사건

 
범야권 신당 창당 움직임을 그대로 내버려 둘 이승만 정권이 아니었다. 이승만의 정치 공작기구인 헌병총사령부는 이른바 불온문서 투입사건으로 그 움직임에 타격을 가하고자 했다.
 
1218일 국회의원 신익희, 곽상훈, 김상돈, 김준연, 정일형, 소선규 등 야당 중진 의원들 집에 동아일보석간과 함께 남북 평화협상을 촉구하는 북한 최고인민위원회 명의의 평화통일 호소문이 인쇄된 불온문서가 일간지 속에 넣어져 투입되었다. 이는 곧 당국에 신고되었고, 당국은 북한의 공작대원이나 좌익 계열에 의해 투입된 것으로 공식 발표하였다. 1220일 국회 본회의에서 김준연은 이 투입 사건이 북한의 소행이 아니라 내부의 소행이라며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 국방부장관 손원일의 발표 : 헌병총사령부 제5부가 실행한 행위

 
그로부터 20여 일이 지난 1955113일 국방부장관 손원일은 헌병총사령부 제5부가 중심이 되어 실행한 행위라고 발표했다. 헌병총사령부 중령 김진호가 야당 의원들의 충성심을 시험하고 제3세력(중립화통일방안)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하여조직적으로 계획한 정치공작이었다는 것이다. 원용덕은 211일 국방부 차관실에서 국회 진상 조사단에게 자신의 지시하에 이뤄진 일임을 시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 “불온문서 투입 사건은 야당 국회의원의 충성도를 시험한 것

 
불온문서 투입 사건은 현하 미묘한 국제 정세에 편승한 북한 괴뢰집단의 상투적인 선전의 평화협상론을 지지하여 이를 달성 내지 이에 동조하는 제3세력이 국내에 침투한 사실과 그 증거품인 동 불온문서를 입수하였음을 계기로 국내 저명 인사, 특히 그들이 적극적인 포섭 대상이 될 가능성과 영향력이 큰 야당 의원들의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의 정도를 파악하여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으므로 본인이 직접 부하인 헌총 제5부장 김진호 중령에게 지시한 것이며…….”
 
손원일의 돌연한 진상 발표는 원용덕의 지나친 독주와 헌병총사령부의 정치 개입이 야권은 물론 여권과 군부 내에서도 질시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것이었다. 질시가 아니라 이건 해도 너무한다는 문제의식이 이승만 정부 일각에 존재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이승만은 원용덕을 처벌했는가?

 
장성급 이상의 재판에 대해서는 대통령의 재가가 필요로 했으므로, 원용덕을 처벌하기 위해선 대통령의 결단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정반대로 나아갔다. 그는 323헌병총사령부는 그러한 것을 아는 것이 그 직책이며 또 헌병총사령관이 직접 시켜서 행한 것이 알려진 뒤에는 문제될 것이 없으므로 이 일로 갇힌 사람들을 석방하여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래서 원용덕이 처벌받지 않은 건 물론이고 군법회의에 회부 중이던 범인들도 모두 석방되었다. ‘불온문서 투입을 신고하지 않고 그냥 넘어 갔더라면 또 무슨 피바람이 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니, 당하지 않고 무사히 넘어간 것만으로 감지덕지하라는 뜻이었을까?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ㆍ1950년대편 제2, 202-2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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