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5일 목요일

이승만, 패배를 모르는 불굴의 의지 - 5ㆍ30 총선 패배를 정신력으로 극복하다?

이승만은 1950530일에 치러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패했다. 이호재는 이승만의 대패는 김일성 정권이 남침을 감행할 수 있게 하는 더 좋은 정치적 여건을 만들어 주었다고 말한다. 승패를 떠나 선거에 대처하는 방법도 문제였을 것이다.
 

미국 하원의 경제원조 부결과 국회의 대응 논의

 
애치슨 선언이 나온 지 일주일 후 미 하원은 대한(對韓) 경제원조 6200만 달러 지출안을 1표 차로 부결시켰다. 한국 국회에선 미 하원의 경제원조안 부결에 대해 재고를 요망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기 위한 토의가 벌어졌다. 국회의장 신익희는 한국 정부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또 미국의 원조를 남용하고 있으니 어찌 미국이 한국을 도울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자기라도 이런 정부엔 원조하지 않을 것이라며, 미국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민주국가를 세워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지 않는 한 수백장의 결의문을 미국에 보내도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려는 민국당

 
신익희의 발언은 당시 국회의 전반적인 정서를 대변한 것이었다. 1949년 말부터 내각제 개헌을 추진해 오던 민국당은 미 하원에서의 대한 원조법안 부결을 계기로 개헌 논의를 가속화하였다.
 
국회의 개헌안에 대해 이승만이 믿는 구석은 역시 경찰과 청년단체였다. 여당인 대한국민당 최고위원 윤치영은 개헌을 추진하는 자들이야말로 정권욕에 사로잡힌 매국노라고 주장하며 개헌 저지에 앞장섰다.
 
314일 개헌안이 표결에 부쳐졌다. 개헌 통과는 32선인 123표가 필요했는데, 66명이 국회의원이 기권해 개헌안은 부결되었다. 이승만이 조종하는 청년단체들의 협박이 효과를 거둔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을 지지해서 이 개헌안에 반대한 사람은 33명뿐이었으며, 개헌안에 찬성한 사람은 77명이었다.
 

선거를 연기하려는 이승만, 미국의 경고

 
530일로 예정된 선거에서 이승만의 패배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승만은 선거를 12월로 연기하려고 했다. 이에 대해 4월 초순 미 국무장관 애치슨이 엄중 경고하고 나섰다. 이미 195031절 기념식 연설에서 미국 대사 존 무초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화에 대해 경고하였는데, 애치슨의 경고는 그 연장선상에서 나온 발언이었다.
 
애치슨은 주미대사 장면에게 보낸 외교각서에 인플레이션 억제와 예정대로의 선거를 실시하지 않을 경우 대한 원조 계획을 재고하겠다는 위협, 그리고 이승만에게 한국에 대한 군사ㆍ경제원조는 한국 내 민주적 제도의 수립과 발전에 입각한 것이라는 사실을 명기하였다.
 

정당 불신 내지 정당 무용론자이승만

 
이때만 해도 이승만은 정당 불신 내지 정당 무용론자였다. 그는 자신이 당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입장을 이용해 총선에 대한 교서에서 민국 정부를 파괴하고 부인하는 분자와 당파를 위주로 하는 정객들의 등장을 방해하라고 호소했다. 그는 영호남 지방을 순회하면서 민국당은 개헌파로 반정부분자이니 이들에게 투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제헌국회와 달리 부일협력자에게도 출마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530 총선의 입후보자 수는 2209(제헌국회 후보자 948)으로 평균 10.51의 경쟁률을 보였다. 선거 결과 무소속 126, 대한국민당 24, 민주국민당 24, 국민회 14, 대한청년단 10, 대한노동총연맹 3, 일민구락부 3, 사회당 2, 민족자주연맹 1. 대한부인회 1, 불교 1, 여자국민당 1석을 얻은 것으로 나타났다.
 

민국당과 이승만의 참패로 끝난 530 총선

 
530 총선은 민국당과 이승만의 참패였다. 민국당은 여당이라 할 대한국민당과 같은 24석에 9.8%의 표를 얻는데 그쳤다. 이승만 지지세력은 독촉국민회 12, 대한청년단 4명을 합해도 57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530 총선의 가장 큰 특징은 무소속 중간파 후보들의 대거 당선이었다.
 

전국 최고 득표자 조소앙

 
조병옥과 조소앙이 대결한 성북구에서는 선거일 전날 조소앙이 월북했다는 벽보와 전단이 나돌았다. 그래서 조소앙은 투표일 새벽부터 지프에 확성기를 달고 돌아다녔다. 조병옥은 단선단정 수립을 반대하고 소위 남북협상을 하러 북한에 갔다 온 자를 국회에 보낸다면 대한민국의 존립이 위험한 궁지에 빠지게 된다고 조소앙을 공격했지만 그것도 먹혀들지 않았다. 조소앙은 전국 최고 득표(3435)를 기록하면서 조병옥을 간단히 따돌린 것이다.
 

전국 2위 득표자 장건상

 
전국 제2위 득표자는 여운형 사후 근로인민당을 이끌었던 무소속의 장건상이었다. 부산 을구에 출마한 그는 공산당으로 몰려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된 상태에서 당선 소식을 들었다. 14명의 후보가 난립한 가운데 장건상의 주요 경쟁자는 군정하에서 경남지사를 지낸 김국태였는데, 장건상은 김국태보다 4배 이상의 표를 얻었다(장건상 26720, 김국태 5600). 장건상의 대승은 장건상에게 가해진 혹독한 탄압에 대한 유권자들의 응징의 결과였을 것이다.
 

국회의장으로 당선된 신익희

 
619일에 실시된 국회의장단 선거에선 신익희가 의장으로 당선되었다. 이승만 세력은 오하영을 밀었지만 1차 투표에서 46표로 신익희(96), 조소앙(48)에 이어 3위를 기록했고, 2차 투표에서도 42표로 신익희(109), 조소앙(57)에 이어 3위를 기록하였다.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

 
이승만은 530 선거 결과를 자신의 패배로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정치고문인 로버트 올리버에게 보낸 1011일자 편지에서 그렇게 말했으니, 이승만은 정말 그렇게 믿었을지도 모른다.
 
지난 530 선거에서 내가 졌다는 이야기는 사실과 다르오... 윤치영 씨가 일민주의에 입각하여 국민당이라고 하는 소규모 정당을 조직하였는데 이것은 온 국민이 신봉할 민주주의 지도이념으로서 내가 보급시킨 것이오. 이 주의는 이름 그대로 (앙반과 상놈, 빈부, 남녀, 남북 출신 등을 가릴 것 없이 평등하다는) 하나의 규범이나 국민의 평등을 의미하는 것이요. 한국의 민주주의는 남녀 모든 시민이 지지할 만큼 충분히 민주적이어야 하는 이 원리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고 나는 믿고 있소... 사실에 있어서 국민들은 내가 윤씨나 그의 정당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소. 이번 선거에 정당에 가입한 사람들보다는 무소속 입후보자들이 더 많이 당선된 것이 사실이요. 이 때문에 역시 정당과 관계가 없는 인사들은 정부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나는 국회의 지지를 잃게 되었다는 그릇된 인상을 낳게 하였소. 이러한 인상은 정확하지 않소. 실은 그와 정반대로 내가 승리한 것이요. 내가 정당정치를 찬성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오. 나는 항상 정당 정치가 아직은 한국에서 시기상조라고 말하고 있소.”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제1, 3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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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포기를 모르고 패배를 모르는 정치인이었던 것 같다. 정신승리의 끝판왕이라고 해야 하나?
 
이승만과 한 시대를 살았던 정치인들은 과연 어떤 생각으로 그를 대했을까? 이승만에 대해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그와 한배를 탔던 사람들도 대단하고... 그와 대결했던 정치인들도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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