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제12왕조(주전 1991-1786년)
제1중간기의 혼돈이 끝나고, 주전 21세기 중엽에 테베 한 가문 출신 군주인 멘투호텝(Mentuhotep)이라는 사람이 승리와 함께 이집트는 재통일되었다(제11왕조). 이때부터 중왕조가 시작한다. 제11왕조가 이집트 전체를 통치한 기간은 짧았고(대략 주전 2040-1991년) 다시 혼란기를 맞아 끝장이 났지만, 그 통치권이 총리였던 아메넴헷(Amenemhet)에게 넘어감으로써 제12왕조가 시작되었다.
이 왕조는 수도를 테베로부터 멤피스로 옮기고 200년 이상이나 통치를 계속하였다. 이 왕조 아래에서 이집트는 그 전체 역사를 통해 가장 두드러지게 안정된 한 시대를 보냈다. 모두 아메넴메스(Amenemmes, 아메넴헷〈아메넴헷〉) 또는 세소스트리스(Sesostris, 세누스렛〈Senusret〉)이라 불린 여섯 명의 왕들의 평균 통치기간은 약 30년이었다. 대다수의 왕들에 의해 실시된 왕세자 섭정제도, 즉 부왕(父王)이 죽기 전에 왕세자가 부왕과 함께 왕권에 참여하는 제도에 의해 안정은 더욱더 굳게 보장되었다. 봉건적 자치라는 혼돈 상태는 끝이 났고, 비록 고왕조의 단일한 전제 정치로 되돌아가지는 못했지만, 모든 권력은 다시 한번 왕권으로 집중되었고 나라는 왕을 중심으로 한 관료제도에 의해 경영되었다.
하지만 이집트는 어떤 내적인 변화 없이 고왕조에서 중왕조로 이행된 것은 아니었다. 고왕조의 붕괴, 봉건 귀족의 발흥과 뒤이은 억압은 의심할 여지없이 사회 구조의 전복을 가져왔고 새로운 계층이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게 하였다. 더구나 옛 전제 정치의 약화는 왕의 대권들의 민주화를 가져왔다. 우리는 이것을 내세(來世)에 관한 신앙 속에서 아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고왕조에서는 내세는 바로만을 위한 문제였던 것으로 보이는 데 반해, 중왕조에서는 (관 문서들〈the Coffin Texts〉이 보여주듯이) 귀족들-그리고 해당 장례의식을 치를 만한 돈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은 내세에 오시리스(Osiris) 신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것을 기대할 수 있었다. 또한 제12왕조의 발흥과 함께 이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아문(Amun) 신이 최고의 지위로 올라서 아문-레(Amun-Re’)라 불리며 레(Re’)신과 동일시되었다.
제12왕조의 바로들은 국가의 번영을 촉진시킬 목적으로 많은 야심적인 사업들에 착수하였다. 정교한 운하 체계는 파윰(Fayum) 호수를 나일강의 홍수를 잡아 두는 저수지로 바꾸어 놓았고 광활한 땅을 개간하여 경작할 수 있게 하였다. 수에즈의 이스트무스(Isthmus)를 가로질러 있는 일련의 요새들은 셈족의 무리들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켰다. 시내 반도의 구리 광산들은 다시 열려서 채굴되었다. 교역은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가 누비아(Nubia)까지, 와디 함마맛(Wadi Hammamat)을 거쳐 홍해로 내려가 푼트(Punt, 소말리란드〈Somaliland〉)까지, 바다를 건너 뵈니게와 그레데, 심지어 바빌로니아까지 미쳤다 – 우르 제3왕조와 그 이전의 양식에 속하는 물건들을 풍부하게 간직하고 있는 이른바 ‘토드’ 퇴적지가 보여주듯이. 요컨대 이집트는 자신의 긴 역사를 통해 거의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번영을 누렸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평시의 학예(學藝)도 번성하였다. 의술과 수학은 그 발달의 절정에 이르렀다. 교훈적인 저술(“메리카레〈Merikare〉의 교훈”, “아메넴헷〈Amenemhet〉의 교훈” 등), 설화들과 자전적인 이야기(“조난당한 선원”, “시누헤의 이야기”), 시와 예언서들(“네페레후〈Neferrehu〉의 예언”)을 비롯하여 온갖 종류의 문학 작품들이 생산되었다. 이집트 문화의 황금 시대였다.
【아시아에서 이집트】
중왕조는 본질적으로 평화의 시대였지만, 중왕조의 바로들은 평화적인 활동만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제2폭포에 이르는 나일강 유역을 장악하였고, 또한 누비아 너머까지 원정하였으며, 서쪽으로는 리비아인들을 제압하였고, 동쪽으로는 시내반도의 광산에 이르는 길을 확보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집트의 지배권이 팔레스타인, 뵈니게, 남부 수리아의 대부분까지 미치고 있었다는 증거가 있다. 물론 이 지배권이 얼마나 효력이 있었는지(느슨했을 것이다)는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딱히 오직 한번의 군사적 원정에 대해서만 알고 있지만(세소스트리스 3세에 의한 원정, 이 과정에서 세겜이 점령당했다), 이집트가 이 지역들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심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비블로스는 식민지적인 속령(屬領)이었고, 이 시기의 많은 기간을 토착 군주들이 아니라 직접 이집트에 의해 통치되었을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여러 곳(게셀, 므깃도 등)에서 발견되는 이집트산(産)의 수많은 물건들은 이 지방에서의 이집트의 영향력을 입증해 준다. 카트나(Qatna), 라스 샴라(Ras Shamra) 등지에서 나온 이와 비슷한 물건들은 이집트의 외교적 및 상업적 관심이 수리아 전역에 미쳤음을 보여 준다.
아시아에서 이집트의 지배권이 미친 정도는 주문(呪文) 문서들을 통해 가장 잘 추론될 수 있다. 오랫동안 두 부류의 주문 문서들만 알려져 왔지만 이제 세 번째의 부류가 더해졌다. 이 주문 문서들의 연대는 주전 2000년대 초기의 세기들로서 바로들이 자기 권위에 도전하는 현실적 또는 잠재적 반역자들을 제압하기 위해 어떻게 주술의 힘을 이용하고자 했는지를 보여 준다. 첫 번째 부류의 문서에서는 여러 원수들에 대한 저주 문구를 항아리나 사발에 쓴 다음 그것들을 박살냈다. 그래야 그들에 대한 저주가 효력이 있었다. 두 번째 부류의 문서에서는 포박된 포로들을 나타내는 토우(土偶)들에 저주 문구들이 씌었다(세 번째 부류의 문서에서는 두 가지 유형을 모두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거기에 나오는 지명들은 이집트의 세력권에 서부 팔레스타인, 비블로스 북쪽의 뵈니게, 남부 수리아가 포함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시누헤의 이야기”(주전 20세기)는 이러한 결론을 밑받침해 준다. 왜냐하면 시누세-바로의 미움을 샀던 이집트의 한 관리-는 바로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비블로스를 떠나 동쪽의 케뎀(Qedem) 땅으로 도망해야 했기 때문이다.
【주전 2000-1750년경의 팔레스타인】
팔레스타인에서 주전 2000년대 초기의 세기들은 격변과 혼란의 시대를 벗어나 점차 회복을 찾아가는 시대였다. 주전 3000년대 후반에 팔레스타인에서는 유목민 침입자들이 이 지역으로 밀려오면서 커다란 붕괴를 겪었는데, 성읍들은 차례차례 파괴되어 버려지고 초기 청동기 문화는 끝장이 났다는 것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이 새로운 침입자들은 초기 청동기 문화의 생존자들과 더불어 반유목민적인 삶을 그대로 추구하다가 상당한 기간이 지나서야 점차로 요새화되지 않은 작은 촌락들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주전 3000년대 말에는 이러한 촌락들이 팔레스타인 곳곳에, 특히 요단강 동부 지역과 네게브에 산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변경 지방에서는 이러한 부락들이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북부 요단 동편에서는 그후의 여러 세기 내내 정착생활을 하는 주민들이 있었고 남부 요단 동편에서는 중기 청동기 시대 제1기가 끝난 후(대략 주전 19세기)에 정착생활은 실질적으로 사라지고 주전 13세기까지 아주 드물게 잔존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네게브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이곳에서는 주전 10세기까지 정착 부락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주전 19세기가 시작되면서 서부 팔레스타인은 팔레스타인과 수리아 전지역에 파급되고 있었던 새롭고 활기찬 문화적 영향에 자극되어 두드러지게 회복세를 보였다. 강력한 도시들이 다시 건설되고 도시 생활이 번창하기 시작했다. 아마 새로운 이주자의 무리들이 도착하고 또한 점차로 많은 수의 반유목민들이 정착하게 됨에 따라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이 재정착(再定着)의 과정은 고고학적 증거만이 아니라 앞에서 말한 주문 문서에 의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이 주문 문서들 가운데 가장 초기의 것들(세데〈Sethe〉군)은 수많은 유목민 씨족들과 그 추장들은 열거하면서도 성읍들은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남부 팔레스타인에서는 오직 예루살렘과 아스글론만을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후대의 주문 문서들(포세너〈Posener〉군)은 특히 뵈니게, 남부 수리아, 북부 팔레스타인의 상당히 많은 성읍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이것은 기껏해야 2, 3세대밖에 안되는 짧은 기간 안에 정착 생활이 발달했다는 사실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도 그 밖의 넓은 지역들, 특히 중앙 및 남부 고원지대(세겜과 예루살렘만이 유일하게 확인될 수 있는 이름들이다)에서는 정착 인구가 계속 희박하였다.
이 새로운 이주자들이 “아모리인들”, 즉 우리가 메소포타미아에서 만난 민족들과 같은 서북 셈족이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한 듯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에 있어서 그들의 이름은 한결같이 이러한 방향으로의 결론을 보여 준다. 그들의 생활 양식은 “시누헤의이야기”에 의해서 훌륭히 예시되고 있지만, 특히 창세기의 이야기들에 의해서도 예시된다. 이스라엘 선조들의 이주는 바로 이 민족 이동의 일부였다는 것이 옳다면 말이다. 이 민족들은 팔레스타인에 인종상의 근본적인 변화는 가져오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네들에 앞서 이주해 온 사람들과 같은 서북 셈족에 속하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은 정착하면서 가나안의 언어에 동화되어 가나안의 중기 청동기 문화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점령할 즈음(주전 13세기)에는 아모리인과 가나안인을 뚜렷히 구별할 수 없게 된다.
【중왕조의 종말】
아메넴헷 3세(주전 1842-1797년)의 치세 후에 제12왕조는 약화되어 수년 내에 종말을 맞이했다. 이것이 단순히 대를 이을 강력한 후계자를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오랫동안 왕권에 의해 억압되었던 봉건 귀족들이 다시 한번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인지, 또는 마침내 이집트를 무릎꿇게 하였던 이방 민족들의 압력이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인지는 한켠으로 제쳐놓아도 되는 문제이다. 제12왕조의 뒤를 제13왕조가 이었다. 이 왕조는 테베 왕조의 전통을 계승하였으므로 중왕조에 속한 것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이집트의 세력은 급속히 쇠퇴해 가고 있었다. 물론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일련의 통치자들이 지나간 뒤에 네페르호텝(Neferhotep) 1세(1740-1730년경)와 그의 후계자 아래에서 잠시 부흥의 시기가 있었는데, 이들은 당시 “아모리족”의 이름을 가진 군주들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었던 비블로스에서 이집트의 권위를 다시 주장할 수 있었다. 이집트어로 “엔틴”(Entin, 즉 Yantin)이라 불린 이 군주들 가운데 한 사람은 마리 문서에 나오는 얀틴-암무(Yantin-ammu)인 듯하다. 만약 이것이 옳다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간의 귀중한 연대 대조표가 마련된다. 그러나 이집트의 붕괴는 막을 수 없었다. 팔레스타인과 수리아의 여러 부족의 족장들-이 무렵에는 이미 정착하여 성읍들을 건설하고 작은 왕들이 되어 있었다-은 이젠 명목상으로도 이집트의 지배권에 복종하지 않았다. 국내적으로도 힘이 약화되어 있었다. 제13왕조가 시작된 이래로, 서부 삼각주의 여러 지방들이 이른바 제14왕조의 영도 아래 독립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시아 민족들이 북부 이집트 전지역에 침투해서 기반을 굳혀 가면서 그 지역에 대한 바로의 지배권은 점차 미약해졌다. 곧 이집트는 이방인이 통치하는 암흑시대로 빠져들 것이었다.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 역사】 63-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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