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29일 금요일

쓰레기라는 말도 아까운 친일 경찰 노덕술

노덕술(盧德述, 1899~1968)
본관 교하 노씨, 호는 해촌(海村), 창씨개명(마쓰우라 히로, 松浦 鴻)

 

# 노덕술, 초고속 승진가도를 달리다 [1920년대]

 
일제 강점기 한국인 가운데 경시(경찰서장에 해당하는 총경급)라는 최고위 경찰직을 유지했던 인물은 8명인데 그 중 하나가 노덕술입니다. 그는 초등학교 2년 중퇴 학력임에도 21살에 일본 경찰 순사가 됩니다. [그는 울산 보통학교 2학년 중퇴하고 일본인 상점에서 일하다가 돈을 더 벌기 위해 홋카이도로 건너가서 일했다고 한다] 23살에 울산경찰서 사법계 순사부장이 되어 고향인 울산에서 근무합니다. 192425살에 경부보(경감에 해당)로 승진하여 경상남도 의령경찰서 사법주임을 지냅니다. 경찰에 입문한 지 4년 만에 경찰 중견 간부인 경부보에 오른 것은 당시로선 매우 파격적입니다. 더구나 1920년대 사법계는 경찰조직 내 경무계, 병사계, 위병계 등 여타부서와 달리 경제계 형사들처럼 시종여일 호경기를 맞는 요직이었습니다.
 
당시 사법주임 3년만 하면 평생 먹고살 수 있는 큰 돈을 긁어모은다고 했는데 특히 전라남도와 경상남도가 옥토였습니다. 일제 강점기 조선인 경찰들은 능력을 인정받고 승진과 출세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악행을 저지릅니다. 일본인 경찰보다 독립운동가 색출, 검거에 적극성을 보이는데 그것은 상전인 일제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조선말을 모르는 일본인 경찰의 수족 노릇을 하며 독립운동가 체포에 혈안이 되었습니다. 특히 노덕술은 일본어가 유창했고 일본 노래를 잘 불러서 일본 경찰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이처럼 일제 강점기의 경찰은 친일파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자 친일파의 골간을 이룹니다.
 
경부보로 승진한 이후 노덕술은 김해경찰서와 거창경찰서, 동래경찰서 경부보로 재직할 당시 신간회 활동을 했던 박일형을 체포, 고문했습니다. 또 부산 제2상업학교 동맹휴교(1928)의 배후에 혁조회(일명 흑조회)라는 항일 조직을 색출하는 가운데 독립운동가 김규직을 고문하여 사망케 했습니다(사망당시 20). 1920년에는 광주학생운동 관련자 석방을 주장한 동래고보 동맹휴학 사건 관련 학생들을 검거하여 고문귀하판락처럼 혀를 잡아 빼는 고문을 자행했습니다.
 
[대부분 친일파가 쓰레기 근성을 버리지 못하듯, 노덕술은 순사부장 시절인 1923년에 그의 외삼촌이 살인 혐의가 있는데도 놔주거나 수사를 목적으로 금품을 수수받기도 하였다. 1931년에는 상해죄로 잡혀온 사람의 어머니를 안심시키고는 그녀에게 100(현재 시세로 약 800만 원)을 받아낸 후 그 사람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아 사기 죄로 고발당하는 부패의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 1930년대, 노덕술의 친일 고공 행진

 
1932년 통영경찰서 사법주임 재직 시엔 메이데이 시위에 참여한 김재학을 체포, 고문하는 등 노덕술의 민족반역 행위는 갈수록 악랄했습니다. 잔악하기 이를 데 없는 고문으로 일제의 절대적 신임을 얻은 노덕술은 급기야 33살인 1932년에 경부(경정에 해당, 경찰서 과장급)로 승진하여 고향인 울산경찰서 경부로 발령을 받고 곧바로 경기도 경성부 본정경찰서 사법주임이 됩니다.
 
이후 노덕술은 인천경찰서, 양주경찰서, 개성경찰서 사법주임을 지내며 일제의 침략전쟁 수행에 적극 협력합니다. 1937년 일제의 중국 침략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여론 환기, 국방사상 보급 선전, 군사수송, 경계, 전쟁 협력을 독려하기 위한 시국좌담회 참석 등 전시 업무를 적극적으로 수행합니다. 그 결과 19413월 훈8등 서보장을 받고 경성 종로경찰서 사법주임으로 전근합니다. 1943년에는 경시로 승진하여 평안남도 경찰부 보안과장이 되어 치안유지, 징병, 방공, 화물자동차 징발, 군수품 수송 등 일제의 침략전쟁 수행에 적극 협력합니다.
 
[194011월부터 경성 콤그룹 검거 때 노덕술은 경성 콤그룹 지도자였던 이관술을 자신이 갖고 있는 고문기술을 총동원해서 고문했다.]

 

# 해방후 월남하다

 
노덕술은 19458월 평안남도 평양경찰서 서장으로 근무하다 소련군의 진주로 월남합니다. [이때 잠시 공산주의 세력에게 체포되어 몇 달간 구금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공산주의 세력의 너그러움에 대해 아쉬운 생각이 든다]
 
[월남한 이후 장택상에 의해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에 기용되어 경찰 내의 반이승만 세력 숙청, 좌익분자 검거를 주도하였다. 19465월 미군정 조작사건인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발생하자 일제강점기 이래 가장 악연이 깊던 독립운동가 이관술을 지목해 누명을 씌우는 데 가담하였다. 7월 이관술이 체포되자 노덕술은 일제강점기 수차레 고문했던 그를 또 다시 고문했다. 이관술과 노덕술은 다 같은 울산 사람이었는데, 노덕술의 입장에서 이관술이 살아 있으면 자기의 전죄가 언젠가는 폭로될 것을 우려했을 것이다.]
 
노덕술을 등용하는데 앞장선 장택상

[19464월 당시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의 암살범 한현우 등 일당을 검거함으로써 경찰 수뇌부의 인정을 받았고, 이승만에게서 반공 투사라는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노덕술의 최고 후견인이었던 이승만

# 노덕술, 의열단 김원봉을 체포ㆍ고문하다 [19473]

 
인간백정고문 기술자 노덕술은 해방 직후 의열단 단장 출신이자 해방 공간 진보세력인 민주주의민족전선’(약칭 민전’) 공동의장이던 김원봉을 체포합니다. 1947322일 체포 당시 이유는 노동조합 전국평의회(약칭 전평) 시위가 발생했을 때 배후 조종했다는 포고령 위반 혐의였습니다. 군사법정에서 무죄로 석방되지만 노덕술은 걸출한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 선생을 연행하여 뺨을 때리고 모욕감을 줍니다. 그리고 심각한 고문을 자행합니다.
 
해방 공간에서 일제 치하 애국 독립지사들을 잡아다가 고문하면서 노덕술은 이런 말을 내뱉곤 했습니다. “이래 뵈도 일제 때 독립지사들을 때려잡은 실력이야.” 그 표현처럼 수도경찰청 사찰과 형사들은 독립지사들을 때려잡았던 그 수법 그대로 해방 후 애국지사들을 도문했습니다. 인적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사찰과 경찰 대부분이 고등게 형사 출신들로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약산 김원봉 선생은 무죄로 풀려난 후 예전 의열단 동지 유석현의 집에 기거하면서 3일 밤낮을 울면서 통곡했습니다.
 
내가 조국 해방을 위해 중국에서 왜놈들과 싸울 때도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수갑을 차다니 이럴 수가 있소.”
 
결국 약산 김원봉 선생은 백색테러가 횡행하는 이승만 정권에서 목숨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월북을 결심합니다.
 

# 해방후 월남한 노덕술, 제버릇 개 못준 고문ㆍ조작 사건 [19481]

 
월남 후 남쪽에서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으로 재직하던 중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저격 사건으로 검거된 민주 청년 박성근을 19481월 고문 끝에 사망케 합니다. 이때 노덕술은 마치 박성근이 도주하려고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다 사망한 것처럼 조작했습니다. 노덕술은 사건 조작이 어렵게 되자 고문치사한 박성근의 시신을 몰래 한강에 내다 버리고 사건을 은폐한 혐의로 수도경찰청 경무국에 체포돼 조사를 받습니다.
 

# 노덕술, 반민특위 활동에 앞장선 인물들의 암살을 음모하다

 
노덕술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정치인들을 암살하고자 음모를 꾸밉니다. 특히 반민특위 활동에 앞장선 신익희(국회의장), 김병로(대법원장), 김상덕(반민특위 위원장) 및 소장파 국회의원들 암살을 음모합니다. 친일 경찰 출신 최난수(서울시경 수사과장), 김태선(서울시경 국장), 최연 등과 함께 살인청부업자 백민태를 시켜 요인 암살을 시도했지만 백민태의 심경 변화로 노덕술이 꾸민 암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 친일 경찰 노덕술, 반민특위에 체포되다 [1949125]

 
친일 경찰, 고문 경찰의 대명사노덕술이 반민특위 특경대장 이병창에게 체포된 것은 1949125일 아침 7~8시 무렵입니다. 반민특위는 194918일 박흥식을 체포한 데 이어 숱한 독립지사를 탄압했던 친일 경찰 김태석, 이성근, 하판락, 노덕술 등 고등계 친일 경찰들을 차례로 검거합니다. 노덕술은 일제 치하 독립운동가를 무수히 체포, 고문하여 이미 2명의 독립지사를 고문치사시킨 전력이 있습니다.
 
일각에서 대한민국이 민족사를 계승한 국가로서 정통성을 의심받는 데에는 노덕술 등 친일반민족행위를 일삼던 세력들을 이승만 정권이 비호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노덕술은 해방 후에도 장택상(미군정청 수도경찰청장)의 오른팔(수사과장)이 되어 몽양 여운형 암살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의열단장 김원봉을 체포, 고문하는 등 그 죄행이 너무나 컸습니다.
 
[1949126일 백민태의 자수로 그가 반민특위 간부들을 암살하려 음모를 꾸몄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는 백민태에게 노일환, 김웅진, 김장열, 이문원 등을 납치하여 우리는 이남에서 살수 없으니 북으로 가겠다라는 가짜 유서를 강제로 받도록 하고 이후 암살하면 뒤처리는 경찰이 알아서 하겠다는 지령을 내렸었다.]
 

# 노덕술을 노골적으로 석방하라고 지시한 이승만, 거부한 김상덕

 
33차 국회본회의 속기록(1949217서울신문보도)에 따르면 반민특위 부위원장 김상돈 의원은 국회 본회의에서 이렇게 발언합니다.
 
우리 위원회에서 비상한 노력을 계속하던 차에 대통령이 부르시기에 반민특위 활동을 무슨 원조나 하여 주시려는가 보다 하고 기쁜 마음으로 찾아갔다. 그랬더니 기대와는 천양지차로 노덕술을 석방하라는 말이 있었다. 그래서 노덕술을 석방할 수 없다고 말했더니 그래도 노덕술은 경찰기술자이며 공훈이 있는 자이다. 이 사람이 없이는 신생국가의 치안유지가 안 된다고 말하며 다시금 석방을 요청하기에 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그러한 기술이 필요치 않다고 거절했다. 그랬더니 대통령은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 당신들이 그대로 나가면 나는 나대로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특위 활동 때문에 치안이 혼란 상태에 빠졌다고 말했는데 그렇다면 제주도 사건을 비롯하여 전남반란사건, 38선의 혼란상태 이 모두가 반민특위의 고문 난타 때문에 그렇다는 말인가? 대통령의 담화는 부당한 것이며 다시는 대통령이 신생국가의 건전한 발전을 위하여 꿈에라도 그러한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을 회유하려고 시도한 이승만 [19495]

 
19496월 공세(국회 프락치 사건 - 반민특위 해체사건 - 백범 김구 암살 사건)를 앞둔 5월말엔 다급했던지 이승만이 한밤중에 직접 반민특위 관사가 있던 중구 필동 3가로 김상덕 위원장을 찾아갑니다. 그는 장관 자리 감투를 제안하며 최후 담판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28 도쿄 독립선언의 주역이자 강직하고 온화한 성품의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은 독립운동가 출신답게 격노한 상태로 대통령 이승만의 감투 흥정을 거부합니다.
 

# ‘국회 프락치 사건’, 친일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 사건 [194966]

 
노덕술 등 친일 세력들은 반격의 기회를 엿보다 19494~6국회 프락치 사건을 터뜨리면서 반민특위에 앞장선 국회의원들을 남로당과 내통한 공산주의자로 몰아가는 데 성공합니다. 결국 반민특위는 결정타를 맞고 크게 흔들리게 됩니다. 그러던 차에 194966일 아침에 친일 경찰 윤기병(중부경찰서장)은 반민특위 사무실을 전격 습격합니다. 이승만의 지시와 장경근 내무차관의 비호 아래 중부경찰서 사찰과 형사들 수십 명을 무장시킨 채 반민특위 특별경찰대(일명 특경대)의 무장을 전격적으로 해제시킵니다.
 

# 노덕술, 마포형무소에서 출감하다 [1949623]

 
결국 반민법으로 체포된 노덕술 등 친일파들은 처벌받지 않고 속속 풀려났습니다. ‘반민특위 습격사건’(일명 66사건)으로 반민특위가 친일 세력에 의해 무력으로 해체되고 1949623일 노덕술은 마포형무소에서 출감합니다. 그리고 3일 후 백범 김구 선생이 피살됩니다. 암살범 안두희는 미군 범죄수사대(CIC) 요원이자 해방 직후 극우 암살단체인 백의사단원이었습니다. 안두희는 말년에 백범 김구 선생 모소에서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암살에 관여한 자들의 이름을 하나씩 거명합니다. 장택산, 최운하, 노덕술, 김창룡. 마포형무소에서 나온지 3일 뒤 노덕술은 항일민족운동의 거목 백범 김구 암살에 가담한 것입니다.
 

# 1950년대 노덕술의 행방

 
노덕술은 출감한 후 경찰을 떠나 헌병으로 변신합니다. 1950년 헌병 중령으로 주특기인 고문 경력을 살려 헌병대 범죄수사대(CIC)에서 근무합니다. 그러나 김창룡과 대립각을 세우던 국무총리 정일권의 휘하에서 고문수사와 공작정치를 하다 역시 부패 독직 사건으로 군문을 떠나게 됩니다.
 
[노덕술은 특무대장 김창룡과 권력을 놓고 암투를 벌이다 이승만 눈밖에 나면서 날개가 꺾였고, 195511월에는 밀수에 가담했다는 것이 발각되어 동월 11일에 재판에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1, 전급료 몰수를 선고받고 군에서 예편했고 1958년에는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에 공천을 시도했으나 거절당했다.]
 

# 노덕술, 1960년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하다

 
노덕술은 이후 많은 재산을 축적하고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인 729선거에서 고향인 울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지만 친일 경력 탓에 낮은 득표로 낙선합니다.
 
[4.19 혁명 후에 열린 19606월에는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울산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는데, 이때 노덕술은 빨갱이를 때려잡던 반공투사라는 구호로 선거운동을 하며 자신의 반공투사경력을 살려 표를 얻고자 했으나, 선거 결과는 41,109명 중 1,744(4.24%)만 얻어 전체 후보 여덟 명 중 여섯 번째로 낙선(무소속 정해영 당선)되었다. 당시에는 친일파라 해도 고향의 인재라면 뽑아 주는 게 보통이었고 개중에는 상당히 질이 나쁜 자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노덕술이 이렇게까지 망한 것은 그가 얼마나 인망을 잃었는지 보여준다. 즉 반민특위의 처벌은 면했지만 세상의 처벌은 면하지 못한 것. 심지어 본인을 반민특위의 처벌로부터 구해준 은인인 이승만의 눈밖에 나기까지 했으니 더더욱 쓰라린 업보를 치른 셈이다. 고향을 떠난 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때까지 한 번도 고향에 온 적이 없었던 노덕술은 투표 결과가 안 좋은 것을 알게 되고는 고향 사람들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그냥 갔다고 한다.]
 

# 박정희가 죽은 궁정동 안가는 노덕술의 거주지

 
이후 울산을 떠나 69세에 사망할 때까지 마지막 거주지인 서울 궁정동에서 삽니다. 1979년 박정희가 총에 맞아 죽은 바로 그 궁정동 안가입니다. 하판락처럼 90세가 넘도록 살진 못했지만 고희에 가까운 나이까지 천수를 누립니다. 역사를 청산하지 못하고 좌절된 탓에 대한민국은 사회정의가 실종된 사회로 치달았고 친일반민족 세력들은 한국 사회의 주류가 되어 일제 강점기 기득권을 지속적으로 향유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성환, 진실과 거짓, 인물 한국사, 살림터, 2017, 223-250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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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공간에서 친일파가 버젓이 활개를 칠 수 있었던 것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자신들의 통치가 효과적이 되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민족을 배반한 행위가 어떤 처벌을 받는지를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면, 해방 이후 제2, 제3의 친일파들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쉽고 두려운 것은 지금 등장하는 친일파의 후손들은 더욱 악랄하게 자신을 애국자로 포장해서 개인의 이익과 자신들이 속한 집단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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