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26일 화요일

임시정부 국무회의 결정, “여운형을 사형시켜라”

처음부터 임정과 거리를 둔 몽양 여운형


일본이 패망했을 때 가장 빨리 반응해서 움직인 인물이 몽양 여운형이다. 그는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인 8월 14일에 총독부의 정무총감인 엔도 류사쿠와 접촉해서 행정권 이양 교섭을 벌였다. 

몽양은 송진우와 함께 해방 이후 정국 주도권을 잡고 혼란을 수습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송진우는 임정 봉대론을 주장하면서 ‘경거망동하게 행동하지 말라’며 거절하였다. 이때 여운형은 “일제의 탄압 아래서 싸워온 거대한 세력은 국외에 있는 것이 아니고 국내에 있는 3천만 민중”이라고 반박하였다. 

몽양은 8월 16일 서울 휘문중학 운동장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을 하였다. 

“이제 우리 민족은 새 역사의 제일보를 내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날의 아프고 쓰라린 것들을 이 자리에서 다 잊어버리고 이 땅에다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낙원을 건설하여야 합니다. 이때는 개인의 영웅주의는 단연 없애 버리고 집단적으로 일사불란한 단결로 나아갑시다... 우리들은 백기를 든 일본인의 심경을 잘 이해합시다. 물론 우리는 통쾌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하여 우리들의 아량을 보입시다.” 

여운형의 연설 가운데 가장 중요한 대목은 “개인의 영웅주의는 단연 없애버리고 끝까지 집단적으로 일사불란한 단결로 나아갑시다”였다. 해방 이후 전혀 그렇게 전개되지는 않았지만...



친일파들이 여운형을 친일파로 몰아가다


여운형은 이후 친일의 DNA를 가진 한민당의 주 공격대상이 되었다. 9월 10일 한민당을 대표한 조병옥, 윤보선 등은 미 군정장관 등을 만나서 인공은 “일본과 협력한 한인집단”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여운형은 “한인들에게 잘 알려진 부일협력 정치인”이라고 주장하였다. 바로 그날 하지의 개인 통역관이 된 이묘묵도 명월관에서 미군정 관리들에게 여운형과 안재홍이 잘 알려진 “친일파”이며, 인공은 “공산주의적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한민당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언론계, 특히 동아일보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이는 동아일보의 사주인 김성수와 사장인 송진우가 한민당의 주도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한민당엔 동아일보 사람들 이외에도 다른 언론계 출신들이 가담하였기 때문에 “한국민주당은 당시 최신 정보라 할 수 있는 국내의 정세에 어느 정당들보다 정통할 수가 있었”으며, 여론을 형성하거나 조작하는 데에도 유리하였다. 

한민당의 중상모략에 넘어간 미군정 하지


미군이 진주한 후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의 명의로 미군 사령관 하지에게 한국의 통일준비 수립을 도와달라는 내용을 담은 메시지를 보냈지만, 하지는 여운형이 보낸 대표를 만나주지도 않았고 편지를 읽어보지도 않았다. 여운형은 하지에게 ‘환영할 수 없는 인물’로 낙인찍혀 있었다. 

하지는 10월 5일까지 여운형을 만나려 하지 않았으며, 만나자마자 던진 질문도 “당신은 일본인들과 어떤 관계가 있소?”, “일본인들로부터 돈을 얼마나 받았소?” 따위의 것이었다. 친일파는 물론 일본인들까지 껴안았던 하지가 그런 질문을 던진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지만 중요한 건 그가 이미 한민당의 선전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이었다. 

미군정, 영어가 장땡이다!


미군이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해방정국에서 가장 강력한 생존 무기는 단연코 영어였다. 영어를 할 수 있는 통역관들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일제 시대 때 해외유학을 했거나 국내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영어를 잘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대지주 집안 출신으로 해방 전엔 친일파, 해방 후엔 친미파 노선을 걷는 사람들이었다. 정당으로 보자면 바로 한민당이 그런 사람들로 구성된 정당이었는데, 한민당은 사실상 해방정국을 지배한 이른바 ‘통역 정치’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일본화된 경찰’에 매력을 느낀 미군정


맥아더 사령부의 한국에 대한 첫 보고서는 한국 경찰에 대해 “철저하게 일본화되었으며 폭정의 도구로 능률적으로 사용되었다”고 썼다. 그러나 미군정은 그 점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일본화된 경찰’에 매력을 느꼈다. ‘능률적인 폭정의 도구’라는 점에 주목했을 것이다. 미군에겐 그들 이상 더 좋은 파트너를 찾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좌익을 반대하고 분쇄하는 일에 있어선, 그들은 자기들의 안전을 지키기위한 차원에서라도 목숨 걸고 나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친일 경력과 함께 초강력 중앙집권체제로 강화된 경찰이 민주주의에 가한 가장 심각한 위협은 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직설적으로 이야기해서 경찰의 가장 큰 문제는 일제 치하에서처럼 ‘수사=고문’의 관행에 빠져있었다는 점이다. 

이승만의 귀국, 영웅의 등장(?)


1945년 10월 16일 미군 군용기를 타고 이승만이 귀국하였다. 며칠 뒤인 10월 20일 경성시민 주최의 연합군 환영회가 개최되었다. 이때 하지는 이승만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이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일생 바쳐 해외에서 싸운 분이 지금 우리 앞에 계신다. 이 성대한 환영회도 위대한 조선의 지도자를 맞이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분은 압박자에게 쫓기어 조국을 떠났었지만 그분의 세력은 크다. 그분은 개인의 야심이라고는 전혀 없다. 그분이 여기 살아서 와 계신다.” 

하지는 미 국무성에서 박대를 받은 이승만을 왜 그렇게 환대했던 걸까? 우선 맥아더가 미소 협조를 기조로 하는 국무부의 동북아 구상에 강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이승만은 10월 13일에서 15일가지 3일간 도쿄에서 맥아더와 서울에서 날아온 하지와 3자 회담을 했다. 여기서 한국의 정세에 대처하기 위한 카드의 하나로 이승만을 활용하는 방안이 논의되었을 것이다.

여운형의 임시정부 추대 반대


여운형은 “임시정부는 30년 간 해외에서 지리멸렬하게 유야무야 중에 있던 조직이니 국내의 기초가 없어 군림하기 불가하다는 점, 연합군한테 승인되지도 될 수도 없다는 점, 미주ㆍ연안ㆍ시베리아ㆍ만주 등지의 혁명단체 중에는 임시정부보다 몇 배가 크고 실력 있고 맹활동한 혁명단체가 있으며 그네들 안중에는 임시정부가 없다는 점, 국내에서 투옥되었던 혁명지사가 다수인데, 안전지대에 있었고 객지고생만 한 해외 혁명가 정권만을 환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점, 중경 임정을 환영하는 자들은 혁명 공적이 없는 자들도 호가호위하려는 것이고 건준의 정권수립권을 방해하는 수단이 된다는 점, 중경 임정만 환영하는 것은 해내해외의 혁명단체의 합동을 방해하고 혁명세력을 분열시키는 과오라는 점”을 들면서 임정 추대에 반대하였다. 

해방 직후 여운형은 설산 장덕수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설산, 나도 상해에 있어 보았지만, 임정에 도대체 인물이 있다고 할수 있겠소? 누구누구 하고 지도자를 꼽지만, 모두 노인들뿐이고 밤낮 앉아서 파벌싸움이나 하는 무은무위한 사람들뿐이오. 임정 요인 중 몇 사람은 새 정당이 수립하는 정부에 개별적으로 추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임정의 법통을 인정할 수 없소.” 

임정 추대 반대와 임정의 법통 주장은 어느 쪽이 더 옳고 그르건 양쪽 모두 한치의 양보도 없는 결사적인 자세를 취하였기 때문에 향후 정국의 분열과 대립을 악화시키는 주요 이유가 되었다. 이는 그들에게 양보와 타협의 훈련을 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는 점에서 일제 식민통치의 불행한 유산이기도 했다. 

임시정부 국무회의 결정, “여운형을 사형시켜라”


임정은 여운형과 같은 중도 좌파에 대해서도 인내심이 약했다. 여운형의 방문마저 거부했다. 여운형은 훗날(46년 5월), 자신을 찾은 기독청년연합회의 강원용에게 이렇게 털어 놓았다.

“김구 선생이 중경에서 돌아온다고 할 때 사실 나는 그분을 만날 생각이 없었어. 왜 그런 줄 아나? 임시정부가 중경을 떠나올 때 마지막 국무회의가 결정을 내린 것 중의 하나가 나에 대한 사형선고야. 그리고 떠나면서 청사 대문 앞에다 ‘여운형이는 사형을 시킨다’고 써붙였어. 그런 사람들을 내가 무슨 이유로 보고 싶었겠는가? 그러나 그들이 돌아왔을 때 나는 내 개인 감정은 차치하고, 해외에서 오랜 세월 독립운동 하느라 애쓴 노고에 경의를 표하려고 그들에게 인사를 갔었네. 그런데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거기서 얼마나 모욕과 냉대를 당했나? 나를 그냥 기다리게 하고 들어오라는 말을 안하는 거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정치도 사람들이 하는 건데...”

친일 협력자들에 대해 유보적인 자세를 취한 임정


임정은 인공과 조선공산당에 대해선 단호한 태도를 취한 반면, 친일 협력자들에 대해선 유보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미 11월 24일의 기자회견에서 김구는 ‘통일전선에 있어 친일파와 민족반역자에 대한 문제’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했다. 

“통일전선을 결성하는 데 있어 불량한 분자가 섞이는 것을 누가 원하랴. 그러나 우선 통일하고 불량분자를 배제하는 일과 배제해 놓고 통일하는 것의 두 가지가 있을 것이므로 결과에 있어 전후가 동일한 것이다.”

김구는 “그러나 악질분자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면 통일 후의 배제는 혼란스럽지 않은가?”라는 질문에 대해선 “여하간 정세를 모르니 대답할 수 없다”고 답했다.

김구와 방응모, 정치자금


이처럼 친일파 처단 문제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김구와 임정은 친일 자본가 한민당의 접근은 받아들였다. 『조선일보』 사주인 방응모는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의 재정부장을 맡았다. 김구 역시 “해방 뒤의 현실정치에서 정치자금 문제 때문에라도 일정하게 친일파들과 손을 잡”은 것이다. 

[방응모가 한국독립당의 재정부장을 맡았다는 것은 한홍구의 견해에 따른 것인데, 정지환은 〈친일파가 애국자로 : 조선일보의 ‘방응모 한독당 재정부장설’ 날조기〉라는 글에서 방응모는 한독당의 재정부장을 맡은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당시 방응모가 김구와 ‘개인적으로 가까웠던 것은 사실’이며 『조선일보』 역시 김구 노선을 지지하는 논조를 보였거니와 한독당이 꼭 방응모가 아니라 하더라도 친일파의 지원금을 받은 것도 사실이므로 한홍구의 견해를 따른다.]

임정의 정치자금 미화 20만 달러의 행방


그간 임정의 정치자금은 해외 한인들의 성금과 중국 정부의 지원으로 조달되었다. 장개석은 김구의 귀국시 미화 20만 달러(현 가치 최소 300억여 원)라는 거금을 주었다. 이와 관련 김영신은 “중국은 수십 년간 임정에 행사해 왔던 영향력을 바탕으로 한반도에서 김구를 자신들의 대리인으로 키우고자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구는 미군정의 방해로 이 돈을 국내에 들여오지 못했다. 얼마 후 이 돈의 반입을 포기한 김구가 이승만과 재미교포 사회에서 받은 지원에 대한 보답으로 이승만에게 이 돈을 주기로 약속하자, 이승만은 중국 정부로부터 이 돈을 받아내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비록 이승만은 그 돈을 손에 넣지는 못했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 1940년대편 1권』, 인물과사상사, 2004, 32-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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