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30일 토요일

4ㆍ19혁명,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 : 김치호(1939-1960)

그리스도인의 삶과 향기를 보여 준 김치호 군의 죽음

하복부 총상을 입고도 어린 학생들에게 수술 차례를 양보하다

4ㆍ19혁명 당시 희생된 서울대 재학생들

 
1960419혁명 당시 경무대(오늘날 청와대) 앞에서 총상을 입고 수술을 받기 위해 기다리던 대학생은 자신에게 돌아온 수술 차례를 어린 중ㆍ고등학생들에게 계속 양보합니다. 그 대학생은 이튿날 새벽녘이 되어서야 수술을 받지만 결국 사망합니다. 그는 서울대학교 문리대 수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치호 군(1939년생)입니다. 시대의 의로운 죽음은 역사에 길이 기억될 것이며 그 순결한 영혼의 울림은 우리들 가슴에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김치호 군은 해방 직후 월남한 부모님의 영향으로 기독교 모태신앙을 간직한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가 시무한 영락교회를 어려서부터 다녔고 성경 말씀을 일상 생활 속에 실천하며 삶과 신앙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한 영혼이 맑은 청년이었습니다. 김치호 군은 아인슈타인과 같은 과학자를 꿈꾸었고 사랑을 실천한 슈바이처 박사의 삶을 동경했습니다. 과묵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주변 친척들에겐 순진무구한 이상주의자로 비치기도 했지만 내면에 충실한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간직한 학생이었습니다. 새색시처럼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전형적인 외유내강형 품성으로 개성이 분명했으며 주위를 따뜻하고 평온하게 했습니다.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난 탓에 419혁명 당일 가회동 집을 나설 때도 부모님은 걱정 어린 당부를 잊지 않았습니다. “치호야, 조국의 앞날을 생각할 때 젊은이로서 시위에 참여 안 할 수는 없겠지만 너무 시위가 격렬하게 문란해지면 그 대열에서 뛰쳐나오고 어두워지거든 곧장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아버지 김익순 씨는 유달리 귀엽고 사랑스러운 막둥이 아들을 근심 가득한 얼굴로 배웅했습니다.
 

나는 오늘도 정의를 위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련다!”

 
김치호 군의 둘째 형 김치선 박사(전 서울대 법과대학장)는 한국 노동법학계의 선구자적인 학자로 한경직 목사를 직접 모시고 월남한 인물입니다. 19606사상계잡지에 막내 동생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며 기고한 글에는 김치호 군이 평소 일기를 꼬박꼬박 적으며 자신의 생각들을 매일 정리해 놓는 생활을 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실제로 김치호 군은 1960419일 시위에 나가기 전 자신의 수첩에 짤막한 메모로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신성한 민권! 이것을 빼앗는 자는 누구인가? 나는 이를 사수하리라. 나는 오늘도 정의를 위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련다. 419!”
 
김치고 군은 419일 부모님과 함께 살던 큰형님ㅇ 집을 나와 곧장 동숭동 대학로 문리대 교정으로 갔습니다. 이미 이른 아침부터 수백 명의 무장 경관들이 학교 주변에 배치돼 있었습니다. 교정 여러 곳에는 정치학과 사회학과, 철학과 2-3학년 학생들이 며칠 전부터 밤새 써 붙인 구호와 격문, 그리고 플래카드로 어수선했습니다. 실제로 1960416일 서울대 문리대 3학년 학생 15-16명이 정치학과 연구실에 모여 항의 데모를 결의했고, 417일에는 서울 시내 다른 대학들과 연대하여 419일 동시에 데모하기로 연락을 취했습니다.
 
당시 서울 시내 9개 대학 가운데 학생회 차원에서 4월 혁명에 조직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대학은 이화여대 한 곳이었습니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세계 역사상 가장 긴 쿠데타를 일으켰음에도 바로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지 못했던 것은 당시 학생운동 세력이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1980서울의 봄당시 전두환을 비롯한 정치 군인들은 학생운동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권력욕으로 가득 찬 신군부가 주목한 곳이 바로 이화여대였습니다. 당시 이화여대는 학생운동의 구심인 전국 각 대학 학생회장들이 집결하여 조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회의가 개최되었던 역사적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980년과 달리 19604월 혁명 당시, 이화여대는 너무도 조용했습니다. 서울대학교 학생 80%가 참여한 4월 혁명의 물결에 이화여대는 학생회 차원에서 불참하는 역사적 오점을 남깁니다.
 
4월 혁명 과정에서 220명이 넘는 꽃 같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2,000명이 넘는 총상 환자가 발생하여 그분들은 평생 불구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장엄한 역사의 한 장을 넘기는 데 우리는 수천 명의 희생자를 민주 제단에 바쳤습니다. 419!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는 찬란한 역사의 그날이 그렇게 밝아 왔습니다.
 

동대문경찰서 앞에서의 투석전

 
419일 혁명의 아침! 김치호 군 역시 평소처럼 동숭동 문리대 교정으로 들어섭니다. 이미 문리대 교정 정문 앞에는 서울시경 형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교정의 분위기는 술렁였는데 김치호 학생은 정문에서 시경 형사들에게 데모 주동자로 지목돼 연행됩니다. 그때 마침 종로 5가 쪽에서 대광고등학교 학생들의 시위대가 경찰에 쫓기는 장면이 목격됩니다. 그러자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은 자연스레 데모 예정 시간을 앞당겨 교문을 박차고 거리고 진출했습니다. 분노한 학생들은 민의를 왜곡한 부정선거 규탄’,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다가 동대문경찰서 앞에서 투석전이 벌어집니다. 무장 경찰들은 곤봉과 개머리판으로 시위대 학생들을 잔인하게 난타했고 학생들은 돌멩이로 맞섰습니다. 동대문경찰서 앞에서 최초로 문리대생 17명이 연행되는데 경찰서 내에서도 학생들은 무수히 구타를 당했습니다.
 

경무대로 향한 시위대, 유충렬 경찰국장의 저지 명령

 
김치호 군은 이날 오후 서울시경에서 무수히 구타를 당하고 훈방됩니다. 그러나 곧장 태평로 국회의사당(오늘날 서울시 의회 의사당 건물) 앞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10만 명이 운집한 거대한 시위대 행렬에 동참합니다. 315 부정선거 규탄의 목소리는 이승만 대통령 하야의 외침으로 변했고, 마침내 분노에 찬 정치적 요구로 폭발하면서 경복궁 쪽 경무대(오늘날 청와대)를 향해 거세게 분출되었습니다. 419일 당일 서울시 경찰국장 유충렬을 경무대로 가는 초입인 통의동 저지선을 전 화력을 동원해 저지시키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유충렬은 일체 강점기 순사부장 출신으로 해방 후 계속 경찰에 재직하면서 한국전쟁 직전 총경으로 승진한 인물입니다. 이후 제주도 경찰국장, 충남 경찰국장, 경남 경찰국장을 역임하고 1960년 서울시 경찰국장으로 부임한 친일 경찰 출신입니다. 1130분에 통의동 파출소에서 시위 학생들을 향해 발포가 시작되었지만 시위대는 이를 뚫고 중앙청 옆 효자동 1차 경찰 저지선을 돌파했습니다. 시위대는 경무대 입구 2차 저지선마저 돌파하여 빼앗은 소방차를 앞세우고 약간 경사진 경무대 입구를 향해 사력을 다해 돌진했습니다.
 

총에 맞아 쓰러진 김치호

 
이날 경무대 입구엔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는데 그 뒤 1차 저지선엔 카빈 소총으로 무장한 경찰들이 배치되었고, 그 뒤 2차 저지선엔 헌병대 군인들이 M1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419! ‘피의 화요일!’ 이날 하루 동안 100여 명이 경찰의 무차별 총격으로 희생됩니다. 경무대 앞에서는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계속 총격 소리가 울리면서 시위 학생들과 경찰 간에 밀고 밀리는 공방 속에 학생들의 파상 공세가 계속되었습니다. 김치호 군은 고교생 10여 명으로 결사대를 편성하여 지휘했는데 총소리가 울리면 주위로 흩어졌다가 다시 경무대로 돌진해 가는 파상공세를 감행합니다. 그러다 오후 230분 김치호 군과 고교생들은 총상을 입고 쓰러집니다. 김치호 군을 쓰러뜨린 총탄은 하복부를 통해 간-갈비뼈-심장을 관통하여 하복부 출혈이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여러 차례 수술을 양보하다 세상을 떠난 김치호 군

 
419일 당일 호후는 비상계엄이 선포된 삼엄한 분위기였습니다. 수도육군병원 입ㆍ퇴원과장이었던 김용규 대위는 계엄사령부로부터 경무대 입구 현장에 가서 사상사를 후송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앰뷸런스 2대에 위생병들을 인솔하여 현장에 도착한 김 대위는 경무대 정문 맞은 편 경복궁 미술관 옆 뜰에서 사상자와 체포된 군중 200여 명을 목격합니다. 현장 지휘관은 시체부터 신속히 처리하라고 요구하지만 김용규 대위는 의사로서 부상자 가운데 중상자를 유심히 관찰했습니다. 안경을 끼고 교복 차림의 대학생 한 명이 하복부 출혈 상태가 심각함을 한눈에 발견하고 즉시 후송 지시를 내립니다. 그 순간 김치호 군은 저는 괜찮습니다. 저 아이들이 더 심각하니 먼저 데려가 주십시오라고 애절한 부탁을 합니다. 생명이 위독해 화급을 다투는 상황에서도 다른 부상자들을 더 생각하는 김치호 군의 모습에 김용규 대위는 감명을 받습니다. 그리고 병원 도착 즉시 일반외과 과장인 이은태 대위에게 위중한 상태를 전하며 특별히 수술을 부탁합니다. 이은태 대위는 외과 수술 담당 군위관 김수득 소령과 함께 가장 우선적으로 위독한 상태인 김치호 학생의 수술을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김치호 군은 응급실에서도 계속 저 어린 고교생부터 치료해 달라며 더욱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했습니다. 의사들은 어쩔 수 없이 수혈을 통해 수술이 가능한 혈압을 유지하는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어린 중고교 학생들에게 수술 차례를 양보하다가 저녁 늦은 시각 수술에 들어갔지만 간에 치명상을 입은 탓에 수술한 보람도 없이 이튿날 새벽 6시 김치호 군은 운명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 김치호

 
이 땅에 민주주의가 심각하게 훼손되고 정의가 곤두박질치는 암울한 시절! 과학도로서 꿈을 키우던 한 대학생이 민주 수호를 외치다 간악한 독재 권력의 흉탄에 쓰러졌습니다. 생명이 위독한 상황에도 자신보다 어린 중고생을 걱정하며 수술을 여러 차레 양보했던 김치호 군! 내면의 신앙에 충실했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했던 맑은 영혼을 간직한 김치호 군! 스물두 해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역사는 영원히 그 이름을 기억하고 우리 후손들 가슴에 새겨질 것입니다.
 
서울대 419추모공원에 있는 ‘4월 학생혁명 기념탑’. 뒷면에는 1960419일 혁명 당시 김치호 군(서울대 수학과 3)이 시위 현장으로 떠나기 전에 자신의 일기장에 남긴 글귀, ‘오늘도 나는 정의를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련다가 적혀있다.
 
서울대 419추모공원

대학부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던 대표적인 기독청년이었던 김치호 군의 희생은 교회적으로 큰 손실이자 아픔이었을 뿐만 아니라, 기성 정치권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강한 메시지가 담겨 있엇던 것이다. ‘외쳐야 할 때 외치지 않고, 나서야 할 때 나서지 못한예언자적 기능을 다하지 못한 기성교회와 교계 지도자들을 향한 준엄한 질책의 한 거룩한 희생이었던 것이다. 김치호 군의 장례를 가족장이 아닌 교회장으로 엄수했던 것은 이렇듯 그의 죽음이 지니는 의미가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영락교회50년사, 182)
 
하성환, 진실과 거짓, 인물 한국사, 살림터, 2017, 95-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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