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주화기독자동지회(민주동지회)와 장공 김재준 목사”
1) 1975년 11월 6~7일 WCC 세계선교위원회는 제네마 시내의 가톨릭영성센터에서 한국문제에 관한 긴급 비공식 모임을 소집했다. 이때 한국인 참석자들은 이틀 더 모임을 가지며 현재까지의 민주운동에 대해 논의를 하게 된다.
2) 문제점을 논의하면서 그들은 국내ㆍ국외의 제반 운동을 서로 연결해서 힘을 결집시키는 조직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한국민주사회건설세계협의회”(World Council for Democracy in Korea)를 결성하게 된다.
3) “한국민주사회건설세계협의회”는 1976년 “한국민주화운동세계협의회”, 1977년 “한국민주화기독자동지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4) 이 조직의 구심점은 결성 때부터 참여한 김재준 목사였다.
5) 1981년 밧볼 모임에서 일본을 거점으로 민주화운동을 지원하기로 한다. 이때 동경에 있었던 오재식ㆍ지명관ㆍ김용복이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게 된다.
5) 밧볼 모임 이후에 북한 조선그리스도교련맹과 해외교포 기독인들과의 “제1차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 기독자간 대화”가 개최되었는데, 이때만 해도 “한국민주화기독자동지회”는 반공사상이 분명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전략적 차원에서 북한과의 거리를 두려고 하고 있었다. (사실 이때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공식적으로 스위스 교회에 항의 문서까지 보내면서 북과의 만남을 반대하였다)
6) “한국민주화기독자동지회” 역시 통일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후 “가장 안전하고 현실적인 방법”을 모색한다. 그것은 세계교회협의회(WCC)로 하여금 통일문제를 제기하도록 제안하는 것이었다. 이 제의는 마침내 1984년 10월 일본 도잔소에서 WCC 국제문제위원회가 개최한 도잔소협의회로 나타났고, 1986년 글리온 회의로, 1988년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으로 연결되어 남북 통일 대화와 남한교회의 통일운동의 촉매 역할을 하게 되었다.
7) 민주동지회는 운동방법에서 선민주 후통일 노선에 서서 활동하였으나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도잔소협의회 및 글리온회의를 통하여 남북 종교인들 사이의 통일대화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김재준 목사는 이 조직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민주화운동의 목표와 방향을 제시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동지들과 함께 자신의 조국민주화의 비전을 민주동지회를 통해 실현하고자 했다.
[참고] 김흥수 교수의 “한국민주화기독자동지회의 결성과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