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사적 사건들
기원전 12세기의 이야기는 주로 격동의 이야기지만 연속성과 점진적 변화의 강한 요소들도 있었다. 파괴의 정도는 지중해 동부 지역, 즉 에게 해와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가장 강하였고 후에 조금 떨어진 파괴력으로 동쪽으로 확대되었다. 시리아 해안 지역과 레반트는 내륙 지역보다 심하게 영향을 받았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강대국들은 주요 파괴 세력에 저항할 수 있었으나 그들과의 국경 전투의 영향으로 그 후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미케네와 키프로스
미케네는 15세기에서 13세기 근동의 특징적인 국제 체제의 일부였다. 미케네의 영향은 그리스 본토의 대부분과 크레테를 포함한 에게 해 섬들도 확장되었다. 그리고 키프로스와 레반트 지역과의 무역이 활발하였다. 그러나 미케네 세계는 12세기 초에 사라졌다. 쇠퇴와 파괴가 두드러진 대부분의 에게 해 지역과는 대조적으로 키프로스 섬의 문명은 오히려 발전한 것 같다. 미케네 세력이 사라진 공백을 키프로스인들이 메웠던 것 같다.
아나톨리아, 히타이트의 붕괴
아나톨리아도 1200년경에 근본적인 정치적 변화를 겪었다. 하티가 붕괴되었으나 어떻게 하티가 붕괴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이미 13세기에 하투사의 왕은 아나톨리아 남쪽에 세워진 또 하나의 왕조(타르훈타사 지역)와 경쟁해야 했다. 하티의 마지막 왕인 숩필룰리우마 2세는 키프로스에 위치한 알라시야 왕국을 놓고 바다에서 전쟁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이집트와 우가릿 문서에 곡물 수입에 대한 언급을 근거로 하여 그 지역에 기근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남부에서는 카르케미스의 히타이트 총독이 살아남아 이전 대왕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이로써 히타이트 왕조의 역사는 연장된다. 그러나 그렇게 연장된 히타이트 왕조는 그 지역의 통일을 유지하지 못했고 작은 독립 국가들의 수가 1100년까지 점진적으로 증가하였다.
시리아에서 독립국가들의 등장
히타이트의 패권이 끝나자 시리아의 도시 국가들은 독립국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 특히 시리아 해안가의 도시들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우가릿의 마지막 왕인 암무라피는 하티 왕의 충복이었다. 하티 왕은 침략자들 중 하나를 ‘배에 사는 퀴칼라유’(Shikalayu)로 불렀고 잡힌 포로를 심문할 수 있도록 보내 달라고 암무라피에게 요청하였다. 알라시야의 왕은 암무라피에게 마을을 요새화하고 군사와 전차를 모으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암무라피의 답장은 우가릿이 이미 어려움이 빠져있음을 암시한다. 우가릿은 파괴되었고 그 후 1,000년 동안 사람이 다시 그곳에 정착하지 않았다. 우가릿의 항구인 라스 이븐 하니(Ras Ibn Hani)도 파괴되었다.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에서도 선택적인 파괴의 패턴이 지속되었다. 비블로스와 시돈과 같은 주요 항구들은 파괴되지 않고 생존했으나 아스글론과 하솔과 같은 도시들은 파괴되었다. 팔레스타인에서 특징적인 도시 문화가 점점 촌락 문화로 대체되었다. 블레셋 사람들과 같은 새 민족이 그 지역에 정착하여 남부 해안 지역에서 이집트 국경에 이르는 지역을 다스렸다.
이집트와 해상 국가들
이집트의 메르넵타(재위 1213~1204) 왕은 자신이 리비안인들과 북쪽으로부터 침입한 일군의 사람들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물리쳤다고 보고하면서 후자를 ‘해상 국가들’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아마 이집트에서 정착하려 했던 것 같다. 람세스 3세(재위 1187~1156)의 재위 5년 되던 해에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들의 공격을 언급한 후 재위 8년의 사건 보고에서 지중해 동부 연안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전체적인 관점에서 서술하였다. 침략자들은 북시리아에서 전열을 가다듬었고 이집트를 향한 남진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땅과 바다에서 람세스 3세에 격퇴당한다. 펠레셋과 쉐켈레스는 우가릿에서 발견된 편지에 언급된 쉬칼라유와 동일한 민족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람세스 3세는 시리아에 있는 민족들과의 충돌을 이집트와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왕국 침략자와의 큰 전쟁으로 과장 서술했을 수 있다. 어떤 학자들은 심지어 람세스 3세가 선왕인 메르넵타가 작성한 이야기를 반복하면서 선왕의 업적을 자신의 승리인 양 말한다고 주장한다. 확실한 것은 이집트가 시리아-팔레스타인 영토에 대한 직할권을 상실하였다. 이제 이집트는 시내 반도에 있는 광산 사용권만 유지하였다. 람세스 3세 이후 이집트는 내부 혼란과 사회적 격동을 겪었고, 외국과의 교역이 감소했으며 결국 1100년경 정치적으로도 사분오열하게 된다.
근동의 동부지역,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엘람
근동의 동부지역은 시리아 서부와 지중해 지역으로부터 단절되었다.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그리고 엘람은 계속 군사적으로 충돌하였다. 13세기 이후 아시리아는 90년간 해마다 행해 온 해외 군사 원정을 포기했다. 1207년 투쿨티-니누르타 1세 암살 이후에 발생한 내부 문제들이 요인이었겠지만 서부 시리아에서 발생한 군사적 혼란도 아시리아의 정책 변화의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해상 민족의 활동으로 파괴된 가장 동쪽의 도시는 히타이트의 속국인 에마르였다. 에마르의 서쪽에 위치한 아시리아의 전초기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기지의 규모가 축소되었고 서기관들의 활동이 중단되었다. 시골 지역은 반 유목민인 아람인들이 통제하였다.
12세기의 바빌론에서는 카시트인의 왕조에서 소위 이신 제2왕조로 바뀌었다. 정치적인 관점에서 보면 400년 동안 통치한 카시트인들의 중앙 권력이 어떻게 붕괴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도시화의 쇠퇴는 제2천년기 초기부터 시작된 긴 과정이었다. 바빌론, 이신, 우르만이 도시의 모습을 유지했을 것이다. 닙푸르는 1200년이 되면 도시로서의 특징을 전부잃고 1000년이 되면 닙푸르에는 고대 지구라트를 중심으로 한 작은 마을만이 남게 된다. 정착 인구의 크기는 제3천년기 후반의 삼분의 일 수준으로 떨어졌다. 도시 조직과 관개 운하와 같은 사회 간접 시설이 제2천년기 말에 이르면 완전히 붕괴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역의 많은 주민들은 반 유목 생활로 돌아갔다.
중앙 권력의 약화
유프라테스강의 큰 줄기가 강의 서쪽 지류로 이동한 것 같다. 그것은 이전의 도시 중심지에 큰 인구를 유지할 만한 충분한 관개수를 제공하지 못하게 되었다. 더욱이 토양의 남용은 염화로 이어져 수확을 감소시켰다. 분명히 정치적 생태적 요인들이 복잡하게 작용한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자연 변화를 극복할 관계 사업은 중앙 권력의 약화로 불가능하게 되었다.
중세 엘람 시대의 종식을 불러일으킨 네부카드네자르 1세(재위 1125~1104)의 군사 원정은 이전의 내부 쇠퇴로 더욱 용이하게 되었던 것 같다. 중앙 권력 국가가 붕괴되고 지역은 새로운 인구 집단에 의해 잠식된다. 엘람의 경우 동쪽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사회 변화의 원인이 되었다.
2. 해석
제2천년기 말에 발생한 사건들에 대한 대부분의 설명은 학자들 사이에 제기되었다. 주로 침입, 이주, 사회혁명, 생태적 격변 등이 국가 붕괴의 원인으로 제기되어 왔다. 다른 한편 일부 학자들은 파괴의 측면보다 연속성을 강조한다. 그들은 12세기가 격변의 시기였다는 견해에 반대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1200년경에 시작된 변화가 15세기에서 13세기의 근동 세계의 종말을 촉진시켰고 이 종말의 원인은 12세기의 사건들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고대의 사료들은 에게 해, 아나톨리아, 시리아-팔레스타인에 관해 언급할 때 외부인의 침입을 그 격변의 중요한 유인으로 간주한다. 가장 두드러진 사료들은 그 시대의 이집트 사료들이다. 근동 동부지역에서 국가 간의 전쟁이 그 지역의 전반적 몰락에 대한 충분한 이유를 제공한다고 말할 수 없다.
12세기 사건들을 설명하기 위해 국가 내적 발전을 연구한 학자들도 있다. 강대국들의 국제 시스템의 중요한 특징은 자신의 통치 아래 있는 농업 사회를 이용한 궁정 엘리트들의 존재였다. 농부들과 궁전 엘리트 사이에는 엄청난 부와 생활 방식의 차이가 있었다. 이 시대의 사료들에는 하비루(habiru)라고 알려진 사람들에 대한 언급이 가득하다. 그것은 민족을 가르키는 용어가 아니라 사회적 집단을 일컫는 말이다. 하비루는 국가 구조 밖에서 살기 위해, 즉 국가 권력이 미치기 어려운 지역에서 피난해 살기 위해 사회로부터 도망한 자들이었다. 노동자들은 그들의 주인을 배반하고 그 주인들을 도전한 적대 세력에 동참하였다. 그 적대 그룹 중의 하나가 해상 민족이다.
어떤 학자들은 12세기의 국가 붕괴를 자연적 요인으로 설명한다. 어떤 고고학 유적지는 지진의 흔적을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근동 전체의 붕괴를 설명하지 못한다. 식량 공급에 어려움을 언급하는 사료들은 장기간의 기근이 아니라 단기간의 간헐적 기간을 뜻할 가능성이 있다. 환경적 요인 그 자체는 우리가 근동에서 관찰하는 모든 사건을 설명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다양한 원인이 12세기에 보는 변화에 깔려 있다. 다양한 원인들이 모두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1500년에서 1200년의 근동을 안정되게 유지시켰던 그 특징적인 시스템 전체의 붕괴를 가져왔다는 점과 관련된다. 국가의 몰락으로 권력의 재분배가 이루어졌고, 근동의 인구의 대부분은 이렇게 해서 생긴 자유와 은혜를 입게 된다.
3. 여파
궁정 체제의 위기는 사료의 수를 상당히 감소시켰다. 문서 자료와 고고학적 자료들이 희귀해지면서 근동의 역사에 또 하나의 ‘암흑 시대’가 찾아온다. 암흑 시대에서 가장 먼저 벗어난 지역은 아시리아였다.
문자의 변화
2천년기의 근동에 있던 나라들은 서기관이 아카드어로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서가를 지원했었다. 아카드어는 대부분의 서기관들에게는 외국어였다. 그것은 비교적 마스터하기 어려운 쐐기문자로 기록되었다. 궁전의 몰락과 함게 이런 전문인들을 지원할 기본 시설들도 함께 사라졌다. 11세기와 10세기에 알파벳 문자는 그 지역의 유일한 문자가 되었다.
금속 분야의 진보
금속 제련 분야도 중요한 기술적 진보가 있었다. 1200년까지 가장 흔한 금속은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 청동이었다. 12세기와 11세기에 용금 과정에서 철을 화로의 숯과 융합하는 기술이 개발되었다. 이렇게 해서 강철이 생산된 것이다. 강철은 청동보다 훨씬 단단하였다. 이런 발명은 동부 지중해(아나톨리아와 레반트)에서 발생한 것 같다. 궁전들이 강했던 지역인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철은 9세기에야 상용된다.
외국인의 이주
‘암흑 시대’를 거치면서 근동의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거의 완전한 사회 변혁이 발생하였다. 국가의 위기는 외국인들이 이주하여 들어올 수 있는 틈을 주었고 국내의 인구 이동도 활발하게 되었다.
이집트 문서에서 펠레셋(Peleset)이라고 명명된 해상 민족은 제1천년기 초기에 이집트의 북쪽 팔레스타인 해안에 정착한 블레셋이었다고 종종 이야기된다. 그러나 이름이 비슷할 뿐 그 가설을 증명할 만한 증거는 없다. 다른 가설들은 더 불확실하다. 덴옌(Danyen)이라고 불린 해상 민족은 이스라엘의 단 지파와 오늘날 아다나 지역 주변의 북시리아 지방인 디두나와 연결되었으나 그것은 이름의 유사성에만 근거한 가설에 불과하다. 해상민족의 기원과 그들의 마지막 정착지가 어디이든지 간에 그들은 당시의 인구 이동과 사회의 재구조라는 큰 흐름에 참여했던 사람들이다.
아람인들의 등장
아람인들은 1200년 이전에는 북시리아의 유목민들어었지만 국가들의 쇠퇴를 틈타 근동 전역으로 퍼져 도시를 포함한 여러 지역에서 정치 권력을 잡는 데 성공한다. 그들은 정권을 잡은 후에도 그들의 부족 체제를 유지한다. 그들은 보통 ‘누구 누구의 집’(아카드어로 비트) + 사람 이름에 속하는 것으로 자신의 정체를 규정한다. 9세기가 되면 아람인들은 시리아 전역에서 정치적 패권을 거머쥔다.
아람인들이 바빌로니아에 침입하기 시작한 것은 11세기다. 그러나 9세기에 가서야 티그리스강 유역의 영토를 차지하게 된다. 아람인들은 동일한 부족 사회구조를 가졌지만 전혀 다른 민족인 갈대아인들을 만나게 된다. 갈대아인들은 주로 유프라테스강 유역과 남부 바빌로니에 정착하였다. 아람인과 갈대아인들은 서로 다른 지역에 정착하였고 다른 부족 이름들을 사용하였으나 그 둘이 함께 바빌로니아 시골 지역의 대부분을 다스렸다. 제1천년기에는 아랍인들도 아라비아 반도로부터 중앙 바빌로니아로 들어왔다. 반면 9세기 중반까지 카시트 민족의 생존자들은 디야라 계곡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머물렀다. 거의 500년간 그 지역의 정치 상황은 매우 유동적이었다. 갈대아인, 바빌로니아인, 카시트인, 엘람인 그리고 아시리아인들은 왕위를 놓고 끊임없이 싸웠다. 이런 혼란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 626년에 등장한 신바빌로니아 왕조다.
낙타의 사용과 교통의 발달
암흑 시대 동안에 발생한 기술적 혁신인 낙타의 사용은 새로운 사람들이 근동 세계와 접촉하도록 도와주었다. 이것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제2천년기 후반에 이루어졌고 이로써 처음으로 메소포타미아와 레반트 세계로 아랍인들이 육로를 이용하여 향신료를 가져올 수 있게 되었다. 정착 사회의 주변에 있는 아랍인들은 대개 적으로 간주되었다. 암흑 시대는 근동 역사에서 두 개의 다른 세계를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