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15일 수요일

개신교의 전래와 수용 (2) 선교사들의 내한

개신교의 전래와 수용 (2) 선교사들의 내한

 

[한국기독교의 역사]

 

1. 선교사 내한 이전의 정지(整地) 작업

 

1) 병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의 체결

 

대원군이 물러난 후 1875(고종 12) 일본은 군함 운양호를 위시하여 함포사격으로 우리나라를 위협한 후에 강제로 18762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강화도조약은 불평등조약이었는데 조선이 중국 이외의 다른 국가와 외교관계를 시작하였다는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된다. 부산, 인천, 원산을 개방하여 외국인의 거주를 허락하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2) 한ㆍ미조약의 체결

 

서양 열강 중에서 가장 먼저 조약을 체결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미국와의 조약은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일본이 한국에서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한 청나라가 중재해서 체결하였다. 이때 황준헌의 조선책략이 조선에 소개되어 미국과의 조약 체결에 동조하는 세력이 많이 나타났다. 18825월 조선의 대표 김홍집과 미국의 대표 슈펠트 간에 한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때 최혜국 대우를 미국에게 주었다고 한다. 이후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유길준 등이 미국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미국과의 조약 이후에 서양 열강과 조약을 연달아 맺었다.

 

3) 감리교회 선교의 효시 - 가우처

 

미국으로 간 사절단 일행이 대륙 횡단 기차를 타고 여행하던 중 가우처 박사(미국 감리교회 목사)를 만난다. 이때 가우처 박사는 한국에 관심을 가지고 감리교 선교본부에 한국 선교를 제안하면서 자금 2천달러를 송금하였다. 가우처가 일본에 있던 감리교 선교사 대표 매클레이에게 편지를 보냈고, 매클레이는 18846월 한국으로 건너가서 김옥균과 만났고 한국에서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해달라는 청원서를 고종에게 전달하였다. 며칠 후 고종의 긍정적인 회신을 전달받은 매클레이는 주한 미국공사 푸트에게 선교사역을 시작할 대지를 구해달라는 부탁을 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매클레이의 편지를 받은 미국 북감리교회는 1884년 목사이며 의사인 스크랜톤, 그의 모친 메리 스크랜톤, 아펜젤러를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4) 장로교회의 선교를 가능케 한 맥윌리엄스

 

미국 북장로교회는 이수정의 편지를 받고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의견으로 주저하고 있었다. 이때 데이빗 맥윌리엄스라는 사람이 한국선교에 관심을 갖고 선교사를 파송하면 2년의 생활비 5천달러를 내어놓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이때 선교부는 의사 헤론을 선교사로 임명하였는데, 일단 일본에서 머무르며 기회를 보도록 하였다. 헤론은 18849월에 입국한 알렌이나 18854월에 입국한 언더우드보다 조금 늦은 18856월에 입국하였다.

 

2. 첫 선교사 알렌의 입국

 

  • 한국의 개신교 첫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회가 파송한 의사 알렌이었다. 알렌이 대학을 다니던 때 미국 전역을 휩쓴 제2차 대각성운동이 일어나서 많은 대학생들이 선교사가 될 것을 다짐하고 의과대학으로 진학했다. 알렌은 188325세의 젊은 나이에 중국 선교에 나섰다. 그곳에서 선교사들과 분쟁도 있어서 옮기려고 생각하던 차에 한국에 가는 것이 어떠냐는 친구의 조언을 듣고 뉴욕 선교 본부에 편지를 보내서 허락을 받고 18849월에 제물포를 통해서 한국에 입국하였다.
  • 그는 미국 공사관에서 푸트 공사에 의해 공사관 의사로 활동하다가 갑신정변 때 민비의 조카 민영익이 전신에 칼을 일곱 번 맞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알렌이 그를 기적적으로 살려내게 되었다. 이후 알렌은 왕실과 급격하게 가까워지게 되었다. 알렌은 민비의 허락으로 18854월에 광혜원이라는 근대식 병원을 개설하게 되었다. 광혜원(널리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푼다)은 제중원(많은 사람을 구제한다)으로 바뀌었고, 1887년 갑신정변 때 피살된 홍영식의 저택으로 옮겨 1904년까지 있다가 후에 세브란스 병원으로 이어졌다.

 

3. 언더우드의 입국

 

  • 안수받은 목사 선교사로 한국에 처음 발을 디딘 사람은 언더우드였다. 12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한 언더우드는 네덜란드 개혁교회 계통의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가 신학교 2학년때 한미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친구가 이 기사가 실린 신문을 오려서 교실 벽에 붙여놓은 것을 읽고서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88310월 미국 신학교연맹대회에 참가해서 선교사로 결심하였다. (이때 감리교의 아펜젤러를 만난다) 원래 인도에 선교사로 가려고 했다가 아직 한국 선교를 지원한 사람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 선교사로 지원하였다. 북장로교회는 1884728일 언더우드를 한국 선교사로 공식 임명하였다. 언더우드는 188542일에 부산에 도착했다가 5, 부활절 오후에 비내리는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그때 언더우드는 아펜젤러 부부와 함께 한국 땅에 발을 내딛게 되었다.
  • 이때 아펜젤러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우리는 부활주일에 여기 왔습니다. 이 날 죽음의 철장을 부수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매고 있는 줄을 끊으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는 생명과 자유로 이끌어 주시기를 기원하나이다.
  • 이때 공사관에서는 언더우드의 입국은 허락하였지만 임신중이었던 아펜젤러의 부인은 불편한 몸이었고 갑신정변으로 혼란하기 때문에 일단 되돌아가라고 명하였다. 아펜젤러 부부는 일단 일본에 갔다가 두달 후에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그 사이인 188553일 감리교회 목사이며 의사인 스크랜톤이 입국하였다. 아펜젤러 부부는 스크랜톤의 모친 메리 스크렌톤과 626일에 입국하였다.
  • 초기에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자질에 대해서 클라크는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한국은 처음 온 선교사들의 자질 면에 있어서 특별히 복을 받은 나라이다. 언더우드는 굉장히 열정적이고 창의적인 사람이었고, 마펫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전도열이 충만한 사람이었으며, 에비슨은 의료분야의 지도자였고 의과대학의 창설자였으며, 베어드는 문과대학의 창설자였고, 게일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도 필적할 수 없는 위대한 번역가이고 문필가였다. 선교 초기에 이렇게 풍부한 인적자원을 갖고 시작한 선교지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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