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14일 화요일

천주교의 한국 전래 (1) 일본과 중국을 통한 천주교 접촉

천주교의 한국 전래 (1) 일본과 중국을 통한 천주교 접촉

 

[한국기독교의 역사]

 

1) 임진왜란기 천주교 유입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였고, 전쟁 중에 서양인 선교사가 조선 땅을 밟았으며, 이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들 중 상당수의 천주교 개종자가 나오게 된다. 특히 선봉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천주교인이었는데,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 선교사를 요청하였으며 세스페데스 선교사가 웅천을 방문해서 고해성사 및 예배를 드리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잡혀간 포로들 중에 약 7천명이 천주교인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들 중에는 예수회 회원이 되어서 신학훈련을 받고 조선선교를 하려고 했던 권빈센트 같은 인물도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고 권력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는 1614년에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고 대대적으로 천주교를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갔다가 천주교인이 된 사람들이 많이 순교를 당했다고 한다. 그때 화형되거나 참수된 사람들 중 9명은 훗날 정식으로 로마 교황청에 의해 순교 복자로 지정되었다.

 

2) 소현세자와 선교사의 교류

 

임진왜란 이후에 중국에서는 한족의 명나라가 멸망하고 만주족의 청나라(후금)가 중국을 장악하는 혼란기로 이어졌다. 이 와중에 조선은 대의명분만 강조하다가 만주족에게 두 번이나 침략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만주족을 통합한 누르하치는 후금을 건국하였는데, 1627년에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홍타이지가 3만의 병력으로 조선에 쳐들어왔다(정묘호란). 이때 조선의 왕이었던 인조는 잽싸게 강화도로 도망쳤고, 후금은 일단 조선과 형제관계를 맺고 돌아가게 된다.

 

후금은 1636년에 청나라를 건국하고 조선을 다시 쳐들어왔다(병자호란). 미처 강화도로 피신하지 못한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항전하지만 46일 정도를 버티다가 결국 청에게 항복하고 삼전도에서 청나라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로 신하의 예를 갖추게 되었다.

 

이때 인조의 두 아들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게 되는데, 소현세자는 보기 드물게 깨어있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견부호자(개 아버지에게서 호랑이 자식이 나왔다)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을 인조가 생전에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자신은 찌질하게 만주족에게 고개를 숙였는데, 자신의 아들 소현세자는 인질로 끌려갔지만 나름대로 처신을 잘해서 심지어 청나라 지배층에게도 존경을 받은 인물이 된 것이 인조에게는 썩 기분좋은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소현세자는 북경에 머무는 동안에 예수회 신부인 아담 샬과 교류를 하였으며 천주교 서적 등을 조선으로 가지고 들어오게 된다. 이때 소현세자를 반기는 것은 싸늘한 인조의 시선이었다. 소현세자가 귀국한 지 70여 일만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천주교의 선교와 성리학을 극복하려는 조선의 미래는 암흑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인조는 소현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임명하였고, 소현세자의 아내인 강빈에게 사약을 내려 죽이고(잔인한 시아버지)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귀양 보내버렸다(매정한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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