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22일 수요일

베트남은 어떤 나라일까? [2차대전 이전까지의 간략한 베트남 역사]

베트남은 어떤 나라일까? [2차대전 이전까지의 간략한 베트남 역사]

 

베트남은 세계에서 15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로 알려져 있다. 베트남이라는 나라 이름은 1945년부터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옛날 베트남 왕조인 남월’(南越)의 베트남어 남비엣의 명칭을 거꾸로 쓰고 있는 것이다.

 


베트남 최초 국가 : 홍방 왕조


베트남 최초 국가는 기원전 2879년부터 기원전 258년까지 있었던 홍방(Hồng Bàng) 또는 반랑(Văn Lang)이라는 국가였다. 대월사기전서에는 염제 신농의 후손인 락롱꿘(貉龍君)이 산신의 딸 어우꺼(Âu Cơ)와 결혼하여 100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그 자식들의 후손들 가운데 가장 강한 사람이 훙브엉(雄王)이 되어 반랑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국가 이름을 문랑이라고도 한다). 고촉의 왕자였던 안즈엉브엉은 홍방 왕조를 멸하고(기원전 257) 어우락(구락)이라는 국가를 형성하였다(기원전 257~기원전 179), 진나라의 장수 조타(趙佗)가 정벌하였다가(기원전 207) 진나라가 멸망한 후 기원전 203년에 남월국(남비엣)을 건국하였고 어우락을 병합했다고 한다.

 

대월의 왕조들


기원전 111년 중국의 한나라 무제가 남월국(남비엣)을 정벌한 이후 800여년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던 베트남은 응오 왕조의 시조인 응오꾸엔(吳權)이 박당강 전투(938)에서 중국의 남한을 몰아내며 중국의 지배권에서 독립하였다. 이후 대월’(大越) 또는 다이비엣이 베트남의 정식 국호로 1804년까지 사용되었다. 그 기간 동안 리 왕조(1009~1225), 쩐 왕조(1225~1400), 호 왕조(1400~1407), 후레왕조(1428~1527, 1533~1789), 막 왕조(1527~1677), 떠이선 왕조(1778~1802)가 흥망성쇠를 이루었다.

 

1802년 응우엔 푹 아인(阮福映)이 프랑스의 지원을 떠이선 왕조를 멸망시켰고, 갈라졌던 대월을 다시 통일시키며 순화(順化, 후에)를 수도로 하여 응우옌 왕조를 열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1804년 청나라에 의해 안남국왕(安南國王)에 책봉받았다.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한 베트남


1842년 중국에서 영국이 아편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본 프랑스는 동남아시아에 눈독을 들였고, 베트남에서 가톨릭에 대한 탄압이 가행되자 그것을 핑계로 18474월 베트남의 항구(다낭)을 공격하였다. 프랑스는 1858년에 전쟁 개시를 선언하였고 1862년에 결국 베트남의 뜨득 황제는 항복을 하게 된다. 1862년 사이공 조약을 통해서 베트남은 프랑스와 불평등조약을 맺게 된다. 이후 베트남은 프랑스의 외교적인 압력 아래에서 1874년에 평화와 연맹조약(2차 사이공조약)을 체결하였는데 프랑스는 베트남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는 대신 중국의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부인하게 만들었다.

 

1884년 베트남이 프랑스에게 넘어가는 것을 좌시하지 않던 청나라와 프랑스가 종주권을 놓고 맞대결을 했지만 결과는 프랑스의 승리로 끝나고 18856월 청나라는 텐진조약을 통해서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후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 베트남에 대한 식민통치를 지속하게 된다.

2021년 9월 15일 수요일

개신교의 전래와 수용 (3) 선교사들의 선교활동

개신교의 전래와 수용 (3) 선교사들의 선교활동


[한국기독교의 역사]

 

1. 의료선교

 

  •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 복음화, 문명화, 근대화를 위해 일하였다. 당시 복음선교가 허락되지 않은 상황에서 문명화 내지는 근대화의 작업인 의료와 교육 선교가 적격일 수밖에 없었다. 초창기 의료 선교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열악한 환경에서 헤론이 5년 만에 이질에 걸려 순직하게 되었고, 그의 사망으로 한국에는 외국인을 위한 묘지가 책정되었는데 오늘날 서울 양화대교 근처 양화진이다.
  • 전통적 유교 윤리가 지배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여자 의사와 여자 치료소가 시급하였다. 어려운 난관을 뚫고 세브란스 의학교가 생겼고 1908년에 7명의 한국인 의사와 5명의 간호사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국왕의 호의를 받으며 의료선교가 진행되었는데 종두법으로 천연두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고, 콜레라 등의 전염병을 다스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선교사들과 한국인 기독교 신자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용기는 기독교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 의료 선교는 한국사람들에게 기독교의 사랑과 헌신의 정신을 몸으로 경험하게 하였다.

 

2. 교육사업

 

1) 언더우드의 고아원

 

  • 의료 사역은 질병에 걸린 사람들만을 상대로 하는 것이지만, 교육 사업은 모든 아이들과 배우지 못한 어른들까지도 포함하는 것이어서, 의료사업보다 더욱 포괄적이고, 직접 전도의 기회를 갖기에 적당한 계기가 되었다.
  • 언더우드는 길가에 버려진 고아들을 눈여겨 보고, 그들을 수용하였는데, 자연히 이것이 고아원이 되었다. 이것은 언더우드 학당으로 불렸는데 후에 경신중고등학교로 발전하였다. 한국에 대학이 세워진 것은 평양에서 장로교 감리교가 연합하여 세운 숭실대학교였다. 이 대학에서 1808513일에 두 사람이 졸업하면서 한국에서 처음으로 학사학위를 받는 기록을 남겼다.

 

2) 이화 학당

 

초기 한국 선교에서 장로교가 복음 선교에 역점을 두었다면, 감리교회는 교육에 더 역점을 두었다. 한국에 최초로 근대식 여학교를 세운 이는 감리교회 의사이며 목사였던 윌리엄 스크랜톤의 모친 메리 스크랜톤이 세운 이화학당이었다. 민 왕후는 조선왕조 상징의 꽃인 배꽃을 이 학교의 이름으로 지어 이화학당이라고 명명하였다.

 

3) 배재학당

 

아펜젤러는 한국에 영어교육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영어학교를 만들려는 시도를 하였고, 1887년에 고종으로부터 좋은 일꾼을 많이 길러내라는 의미에서 배재학당이라고 지어주었다. 이 학교가 오늘의 배재 중고등학교가 되었다.

 

3. 전도사역

 

1) 최초의 수세자 노춘경

 

  • 한국에서 선교사들에 의해 최초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노도사라고 불리던 노춘경이었다. 그는 알렌의 서재에서 성경을 몰래 갖고 나와서 기독교의 진리를 접하였다. 그는 세례문답을 마친 뒤 1886718일 언더우드의 집례로 헤론 의사의 집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날 헤론 의사의 어린 딸 사라 앤이 함께 세례를 받았다.
  • 이듬해(1887) 봄에 황해도 솔내에서 서상륜이 그의 동생 서경조와 최명오, 정공빈을 데리고 상경하여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베풀어 줄 것을 청하였다. 1887년 가을에 언더우드가 가을에 솔내로 가서 7명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이때 서경조의 아들 서병호에게 유아세례를 주었다.
  • 한편 감리교의 아펜젤러는 언더우드의 노도사보다 3개월이나 빠른 1886년 부활절에 세례를 베풀었으나 세례 받은 사람은 한국인이 아니고 일본 영사관 직원이었다. 이후 배재학당의 학생 박중상에게 1887724일에 세례를 베풀었다. 188710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권서의 아내에게 세례를 줌으로 한국에서 첫 여자 수세자가 탄생되었다.

 

2) 최초의 교회 설립 - 정동교회(새문안교회)

 

  • 언더우드는 1887년에 한국에서 최초의 조직교회를 세웠다. 그는 정동에 있는 자기 집에서 1887927(화요일)14명의 교인들을 데리고 두 명의 장로를 선출하여 교회를 조직하였다(정동교회). 이 교회는 후에 새문안교회로 바꾸었다. 첫 예배에 만주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전도했던 존 로스 목사가 참석하였다.
  • 이 교회의 교인들은 언더우드가 전도해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아니고 언더우드가 입국하기 전에 권서들이나 매서들을 통해 복음서를 읽고 예수를 믿은 사람들로서 그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이 교회는 어떤 의미에서 한국 사람들 자신에 의해 세워진 자생적 교회였다. 1895년 옛 돈의문, 즉 새문의 안쪽 터를 사서 옮겨가 신문내’(新門內) 또는 새문안교회가 되었다.
  • 그런데 교회 설립 과정에서 두 사람의 장로를 선택하고 안수하였으나 이들은 교회로부터 징계를 받았는데, 그 중 한 사람은 출교까지 되었다고 한다. 언더우드가 지나치게 자신의 선교 업적만을 생각하고 아직 믿음이 성숙하지 못한 이들을 장로로 세움으로써 좋지 않은 결과를 갖고 온 것은 서둘러 업적만을 남기려는 성급한 모든 선교사들에게 좋은 교훈을 남겨주게 된다.
  • 아펜젤러는 언더우드가 정동교회를 세우고 난 2주일 후, 1887109일에 자기가 머물던 정동에 작은 집을 하나 구입하고 벧엘 예배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지금 정동감리교회의 전신이 된다. 1901년 감리교회의 무어 감독은 한국인 김창식과 김기범을 집사로 안수하여 그들에게 세례와 결혼주례를 할 수 있는 권위를 부여하였다. 이들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평신도 목사로 안수받은 사람들이 되었다.

 

4. 성경번역과 사경회

 

1) 성경번역 사업

 

  • 선교사들이 선교지에 와서 맨 먼저 착수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성경번역 사업이었다. 이미 한글로 된 성경이 보급되어 있었고, 이들은 이전에 번역된 성경이 번역상 오류와 용어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을 발견하고 수정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번역 작업의 결과 1900년 신약성경이 완역되었고, 1910년에 구약이 완역되었다. 이듬해 1911년 성경 전체가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 이 성경은 1937년 다시 전면적으로 개정이 되었는데 이 개정판을 개역 성경이라고 하고, 그 이전의 것을 구역성경이라고 부른다.

 

2) 사경회

 

한국교회의 성경 사랑 정신은 선교사들의 사경회에서 비롯되엇다고 볼 수 있다. 사경회는 네비어스 선교정책의 일환으로 시작된 것이다. 1893년부터 모든 교회가 사경회 모임을 갖기 시작하였다. 이 사경회를 통해 교회가 성장하고 발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매서인, 전도자, 조사, 전도부인 그리고 목사까지 배출되었다. 따라서 한국 교회 성장의 밑거름은 사경회 제도에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3) 주일학교

 

  • 주일학교는 1789년 영국에서 레익스가 저소득층 가정의 자녀들을 모아 성경을 가르친 것이 시작이었다. 한국에서는 1907년 서울의 연동, 평양의 장대현, 선천의 북, 전주의 서문교회 등에서 소아회를 조직하여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 주일학교 사업 중 가장 괄목할만한 일은 하기아동성경학교프로그램이었다. 주일학교 프로그램은 처음에 유년주일학교에서 시작되었으나 후에는 중ㆍ고등부, 대학부, 청년부, 장년부에까지 확산되었다.

 

5. 찬송가의 출판과 문서 사업

 

  • 성경과 아울러 찬송가 출판도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공동으로 찬송가를 편집하려고 했으나 사정상 따로 출판하게 되었다. 장로교에서는 언더우드의 찬양가와 리와 기포드 부인이 편찬한 찬성시가 사용되다가 1902년에 장로회 공의회에서 찬성시를 공인찬송가로 결의하였다.
  • 감리교회는 1892년에 나온 찬미가1895년에 증보하였는데, 이때 윤치호가 작사한 애국가가 들어있는 것이 흥미롭다. 이후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하여 1928년에 신정찬송가를 출판했는데 불신자인 이광수와 이은상이 작사한 곡이 들어있다는 이유로 장로교회에서는 1934신편찬송가를 따로 출판하였다. 이후 1983통일찬송가가 나오기까지 양 교단은 따로 찬송가를 사용하였다.
  • 찬송가 외에 교회에서는 기관지와 신문, 잡지를 편집하여 출판하였다. 1897년 감리교회는 아펜젤러가 죠션 그리스도인 회보2월에 창간하였고, 장로교회에서는 언더우드가 그리스도 신문4월에 창간하였다. 이후 19057월부터는 장로교와 감리교 연합신문인 그리스도 신문이 발행되었다. 천주교회에서는 경향신문, 구세군에서는 구셰신문을 발행하였다.
  • 맨처음 나온 잡지는 1892년 감리교 선교사 올링거가 코리안 리포지토리라는 영문 잡지를 발행하였다. 이후 장로교와 감리교는 함께 코리아 미션 필드라는 잡지를 발행하였다. 한글로 된 잡지는 1900년 감리교 선교사 존스가 신학월보를 발행하였다.
  • 한글로 된 최초의 단행본은 만주에서 로스 목사에 의해 1883년에 발행된 예수셩교문답, 예수셩교요령이었고, 국내에서 발행된 것은 1889년에 나온 언더우드의 속죄지도, 아펜젤러의 셩교촬요였다. 한국인들에 의한 단행본은 1895년 홍정후의 칠득(七得)이었다.
  • 초기 선교사들의 어학공부를 위해 가장 애를 많이 쓴 사람은 언더우드였다. 언더우드가 만든 한영사전에 대해서 백낙준 박사는 모든 한영 사전의 아버지라는 평가를 내렸다. 선교사들의 문서 활동은 선교사 올링거의 관할하에 운영된 삼문출판사(1889)가 충실한 역할을 하였다.

 

6. 여러 선교부들의 내한

 

1) 호주 빅토리아(Victoria) 장로교회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는 그 규모는 작지만 강력한 해외선교사업 펼치던 교회였다. 188910월 처음으로 한국 선교사로 나온 데이비스 목사가 한국에 도착한지 6개월만에 세상을 떠난 후에, 호주 빅토리아 교회는 더욱 한국 선교에 힘을 기울였다.

 

2) 성공회

 

1884년 한국과 영국이 통상조약을 맺은 이후 영국교회는 한국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890년 코프 감독이 6명의 목사와 2명의 의사를 데리고 선교사업에 착수하였는데 제물포와 강화도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벌였다.

 

3) 미국 남장로교회

 

남장로교회는 1891년 언더우드가 안식년으로 미국에 갔을 때 매코믹 신학교에서 한국 선교에 대한 연설을 하였고 이 신학교의 학생이었던 테이트가 한국 선교사를 결심하게 되었다. 같은 해 10월 내쉬빌 미국 신학교연맹 연차대회에서 언더우드와 윤치호가 강연하였고, 이 강연을 들은 존슨, 레널즈 등이 선교사로 가기로 작정하였다. 이후 남장로교회의 선교지였던 그리스가 정치적 변동이 생기자 남장로교회는 다른 선교지를 물색하게 되었고, 1892년 테이트, 레널즈, 전킨 등 7명의 선교사를 임명하였고 이들이 1892113일 제물포에 도착하면서 선교를 시작하였다. 이들은 1년 동안 서울에서 한국어 수업을 하고 전라도 지방을 선교하는 데 주력하였다.

 

4) 미국 남감리교회

 

남감리교회의 한국 선교 시작에는 윤치호의 공이 컸다. 윤치호가 상해에서 남감리교회가 경영하던 중서학원에서 공부를 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았다. 이때 미국 에모리 대학의 총장 캔들러가 이곳을 방문했다고 윤치호의 비상함을 보고 에모리 대학에 유학하도록 주선하였다. 1895, 10년 만에 한국으로 귀국하던 윤치호가 남감리교회에 한국 선교를 요청하였으며 18968월 리이드 박사가 한국으로 파송되었다. 리드 목사의 사택에서 예배드리며 출발한 교회가 광희문교회가 되었다. 1900년에는 북감리교회가 선교하던 원산 지역에서 선교를 시작하였다.

 

5) 캐나다 장로교회 - 매켄지의 순교

 

매켄지는 한국을 소개하는 책자를 읽고 한국 선교사가 되기로 작정하였지만 캐나다 장로교회는 한국 선교의 계획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직접 여러 교회를 다니면서 모금하였고 독자적으로 선교비를 마련하여 189312월에 한국으로 출발하였다. 그는 솔내에서 한국인들과 동고동락하며 선교하면서 주민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일사병에 걸리고 정신착란을 일으켜서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매켄지의 소식을 들은 캐나다 장로교회는 푸트, 맥레, 그리어슨 부부를 한국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원래 매켄지가 선교하던 솔내에서 선교하려고 했지만 함경도 원산 지방으로 올라가서 선교 사업을 시작하였다.

 

6) 엘라 딩(Ella Thing) 선교단 - 침례교회의 선교

 

  • 한국에 침례교회가 시작된 것은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에 의해서였다. 정규교육이나 신학교육을 받지 않고 열정만으로 1889년 한국에 왔던 그는 신학교육의 필요성을 느껴서 1893년 미국으로 건너가서 보스턴의 클레렌돈침례교회의 고든 목사에게 신학수업을 받았다.
  • 이 교회에서 펜윅의 설교를 듣고 감동받은 실업기 딩이 자기의 외동딸의 죽음을 기념하여 엘라 딩 기념선교회를 조직하고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폴링 목사 부부와 가드라인 양은 1895년 부산에 도착했지만 이미 다른 선교회가 선교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충청도 공주 지방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하였다. 6년간 선교활동을 마감하고 자금이 부족해서 철수하였고 원산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펜윅이 가끔 돌보게 되었다.

 

7) 러시아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는 러시아가 부동항 확보라는 남진정책과 맞물려 한국과 접촉하였다. 러시아가 한국과 수호통상조약을 맺는 1885년 이후 러시아 선교사들이 한국으로 건너오기 시작하였다. 이후 고종이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해있는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성당이 새문고개에 1903년에 들어선다. 러일전쟁 이후 사제없는 교회로 지내던 러시아 정교회는 한국전쟁 때 희랍 정교회가 들어와서 회복시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8) 개별적으로 온 선교사들

 

  • 캐나다 토론토대학 YMCA1889년에 게일이라는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그는 이후 미국 북장로교회에 가입하였다. 의사 하디도 토론토 대학의 파견으로 한국에 왔다가 미국 남감리교회에 가입하였다.
  • 한국에 침례교회를 시작한 펜윅도 개인자격으로 온 선교사였다. 그는 한국순회전도단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친구들과 후원회를 조직하였고, 1896년 한국의 함경도와 원산에 정착하여 선교하였다. (그는 외국인보다는 현지인의 선교가 더 효율적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선교사들이 현지의 문화에 동화되어 살면서 선교를 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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