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재(李商在) 1850-1927. 기독교인, 독립운동가, 육영사업가, 정치인. 호는 월남(月南), 자는 계호(季浩)
【1850년】
- 1850년 10월 26일(음력) 충남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에서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을 지낸 이희택(李羲宅)과 밀양 박씨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전형적인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1851년 출생]
- 그의 집안은 고려말의 학자 이색의 후손으로, 이색의 장남 이종덕(李種德)의 15대손이었다. 13대 방조인 이개(李塏)는 사육신의 한사람으로 단종 복위 거사에 가담했다가 실패하고 처형당하기도 했다. 또한 12대 방조인 이계전의 후손 중에는 조선 중기의 철학자 토정 이지함과 화가 이산보,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가 배출되기도 했다.
【1856년】
- 7세 때부터 향리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864년】
- 16세에 강릉 유(劉)씨와 결혼하였다.
- 이 해에 그 고을 토호와 소송사건이 일어나 패소당한 뒤 부친 대신 옥에 갇혔으며 석방되자 군수를 찾아가 그 억울함을 진정하여 재심한 결과 승소했다.
【1867년】
- 1867년 18세 때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고 승지 박정양(朴定陽)의 문객(門客)으로 있었다.
【1881년】
- 1881년(고종 18) 어윤중ㆍ홍영식ㆍ박정양 등이 이끄는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일본의 개화상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1884년】
- 1884년 신관제에 따라 우정 총국이 개설될 때 홍영식의 추천으로 주사가 되어 인천우정국에서 근무하였고 그해 12월 갑신정변으로 개화파의 홍영식이 피살되자 관직을 내놓고 하향했다.
【1887년】
- 1887년 박정양의 요청으로 다시 상경하여 친군영(親軍營)의 하급관리로 있다가 이해 6월 박정양이 주미 초대공사로 파송될 때 그 공사관 서기로 동행하여 외교업무를 보좌하였다.
【1888년】
- 청나라의 압력으로 정부로부터 소환령을 받고 귀국하였다.
【1892년】
- 1892년 새로운 통화정책으로서 전환국이 인천에 개설될 때 그 위원으로 일했다.
【1894년】
- 1894년 7월 갑오경장 직후 군국기무처가 설치되면서 승정원 우부승지 겸 경연각 참찬의 관직에 올랐다. 이후 정부기구 개편으로 학무아문참의에 취임하여 학무국장직을 겸직하면서 신교육령을 반포, 사범학교ㆍ중학교ㆍ소학교ㆍ외국어학교 등을 설립하였고 이해에 부친이 별세하자 모든 관직을 내놓고 하향했다.
【1895년】
- 이듬해(1895년) 정부의 간청으로 다시 상경하여 학무참사관ㆍ법무참사관에 취임하였다.
- 1895년 12월 갑신정변으로 역적으로 몰린 서재필이 귀국하자 그의 지지자가 되었다. 서재필을 국제 정세에 밝다는 이유로 대한제국 중추원의 의장, 외무부의 협판으로 천거하였다. 그러나 귀국 후 미국시민권자를 자칭하며 조선인을 냉담하게 대하는 서재필의 태도에 충격을 받고 점차 반감을 품게 된다.
【1896년】
- 민비가 시해된 뒤 1896년 내각총서 및 중추원 일등의관으로 임명되어 고종을 보필했다.
- 또한 1896년 7월 2일 서재필ㆍ윤치호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 그 부회장이 되어 보좌관을 독립관으로, 영은문을 독립문으로 개조하는 일에 참여하였고 독립신문 창간에 힘썼다.
【1897년】
- 1897년 독립협회가 주관하는 만민공동회의를 진행하였다. 또한 이해에 민중의 제의에 따라 정부시책의 그릇됨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작성하여 독립협회 이름으로 정부에 제출하는 한편 외세배척과 왕권확립을 골자로 한 6개조의 결의안을 상소하였다.
【1898년】
- 1898년 2월에는 러시아의 절영도(絶影島) 조차(租借)를 친로수구파 정부가 허락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는 구국선언상소를 올리고 독립협회 회원들과 함께 서울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러시아의 내정간섭과 이권요구를 물리치는데 성공하였다.
- 1898년 과격한 상소문 때문에 체포되어 16명의 연루자와 함께 경무청에 구금되었다가 10일만에 석방, 그해 12월 25일에 독립협회가 황국협회의 방해로 해산되면서 관직을 떠났다.
【1902년】
- 1902년 6월 탐관오리의 부패상과 비정을 탄핵한 탓으로 집권층의 주목을 받아 「국체개혁의 음모」를 꾸몄다는 죄목으로 2남 승인(承仁)과 함께 경위원에 구금되었고 2개월간의 가혹한 고문 끝에 다시 감옥으로 압송되었다.
【1903년】
- 1903년 옥중에서 선교사들이 차입해 준 기독교 서적과 성서를 읽다가 심경의 변화를 입어 54세에 결신, 입교하였다.
【1904년】
- 1904년에 노일전쟁의 여파로 석방되어 연동교회에 입적하였고 황성기독교청년회에 가입하였다.
- 1904년 2월 이상재는 특별 석방되었다. 이후 이승만의 옥바라지를 했고, 이승만도 미국에 파견될 특사로 선정되어 곧 석방된다. 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YMCA에서 만난 이승만의 정치적 후견인이 되어 주었고, 후일 이승만이 미국 유학을 할 때는 그의 생활비를 지원, 후원하기도 했다.
【1905년】
-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후 고종의 간청에 따라 의정부 참찬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때부터 YMCA운동에 많은 시간을 할애, 청년운동에 몰입하였고 교육부 위원장으로 활약하였다.
【1906년】
- 1906년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키 위해 비밀리에 활동하다가 이제 통감부의 지령으로 구금되었고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으나 이때부터 완전히 관계를 떠났다.
【1907년】
- 1907년 부인 유씨와 장남(承倫)이 사망했고, 정부로부터 법무대신의 교섭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 그 해에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되자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민중시위를 진두지휘했다.
【1908년】
- 1908년 부여 군수로 가 있던 2남이 사망했고 망국의 한을 자결로 달래려다 실패한 후 YMCA 종교부 총무에 취임하였다.
【1910년】
- 1910년 제1회 기독학생회 하령회를 조직하여 새로운 학생운동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이승만을 미국에서 불러들여 학생부 간사로 임명하였다. 그해에 기독교회의 백만명 구령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이를 구국운동으로 발전시켰다.
- 1910년 황성기독교청년회 야유회에 감리교 성직자인 전덕기 목사와 같이 참여하였다. 이상재 선생은 양반이고, 전덕기 목사는 숯을 만들어서 장사하는 노동자였으니 계급이 달랐지만, 기독교인인 그에게 전덕기 목사는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한 동지였을 따름이다.
【1911년】
- 1911년 3남(承侃)을 잃는 아픔을 당했다.
【1913년】
- 1913년 YMCA 총무 질렛트(P. L. Gillett ; 吉禮泰)가 국외로 추방당하자 그 후임총무로 취임하였고 64세의 노구로 총독부의 매수공작을 일축하는 동시에 청년회의 붕괴를 막기 위해 도일하였다.
【1914년】
- 1914년 중앙 YMCA를 비롯하여 토오쿄오의 한국YMCAㆍ경신ㆍ배재ㆍ전주신흥ㆍ광주 숭일학교의 8개 YMCA 등 도합 10개 Y를 규합하여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를 조직하였고 YMCA의 자주 운영에 성공하였다.
【1916년】
- 1916년에는 중앙 YMCA의 명예총무로 추대되었다.
【1918년】
- 1918년 무단정치하에서 비밀리에 3ㆍ1독립운동 준비에 가담하였고 일요강좌ㆍ강연회 등을 통하여 청년지사들을 규합하였다.
【1919년】
- 1919년 3ㆍ1운동 때는 배후인물로 활약, 일경에 검거되었다가 6월에 석방되었다.
이때 일본인 검사 상내(上內)가 문초를 할 때 각종 고문 도구들을 준비하고 회유하였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상내 검사가 고문 도구들을 늘어놓은 다음 순순히 자백하지 않으면 고문할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그는 큰소리로 외쳤다.
“옳지. 왜놈들은 제 부모도 친다더라. 늙은 나를 치려거든 쳐 보거라.”
이 말을 들은 상내 검사는 고향의 늙은 아버지를 생각하여 감히 그를 치지 못했다.
【1920년】
- 1920년 3ㆍ1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상을 조사하기 위하여 내한한 미국 국회의원 조사단을 맞이하여 대규모 민중시위를 주도하였으며 이해에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회장으로 당선되는 동시에 중앙YMCA 고문에 추대되었다.
【1921년】
- 1921년 조선교육협회를 창설하고 그 회장에 취임하였다.
【1922년】
- 1922년 세계학생기독청년연맹의 세계대회가 중국 북경에서 열릴 때 신흥우, 이대위(李大偉), 김활란, 김필례(金弼禮) 등의 한국대표단을 인솔하고 그 대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1913년 강제로 일본 YMCA에 예속된 것을 취소하고 한국 YMCA의 완전 독립을 주장하였다.
【1923년】
- 1923년 연합소년척후단(보이스카우트)의 초대 총재가 되고 이 해부터 물산장려운동ㆍ절제운동ㆍ지방전도운동ㆍ창문사운동 등을 진두지휘하였다.
- 1923년 이상재는 서구 개신교 선교사들앞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여, 당시 조선 개신교 교회에서 선교사들과 조선인 신자들이 대립하게 된 원인인 선교사들의 백인우월주의를 비판하였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하나이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어떤 경계도 초월한다. 그러므로 민족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방해되지 않도록 하자.”
【1924년】
- 1924년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하였으며 이해에 두 번째 부인(張)이 별세하였다.
【1925년】
- 1925년 제1회 전국기자대회의 사회자가 되어 해산직전의 대회를 수습하였다.
【1927년】
- 1927년 2월 15일 민족 항일운동의 단일전선을 위해 결성된 신간회의 회장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때 이미 와병중이었는데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그해 3월 29일 향년 78세로 별세하였다. 그의 유해는 4월 7일 사회장으로 한산면 선영에 안장되었다.
【1957년】
- 그후 1957년 이승만의 배려로 그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에 이장, 부인과 합장하는 한편 묘비도 제막되었다.
【1962년】
-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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