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애제 사마비(晉哀帝 司馬丕, AD. 341~365년) : 동진 6대 황제(AD 361~365년)
- 진애제 사마비(晉哀帝 司馬丕)
- 출생 : 341년
- 사망 : 365년 3월 30일 (향년 23세 또는 24세)
- 통치 기간 : 361년 7월 13일 ~ 365년 3월 30일(재위 3년 260일)
- 전임 황제 : 진목제(晉穆帝)
- 후임 황제 : 진폐제(晉廢帝)
- 시호 : 애황제(哀皇帝)
- 능호 : 안평릉(安平陵)
- 연호 :
- 융화(隆和) : 362년 ~ 363년 2월
- 흥녕(興寧) : 363년 2월 ~ 365년
【기원후 341년】
- 진애제 사마비는 하내군 온현(河南省 焦作市 溫縣) 출신이다. 자는 천령이다.
- 그는 진성제(晉成帝)의 장남이며, 진목제(晉穆帝)의 사촌 형이다.
【기원후 342년】
- 남동생 사마의(司馬혁)이 태어났다.
- 342년 여름, 성제는 병이 들었다. 하충은 일반적인 계승 원칙에 따라 장남이 황위를 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성제의 숙부 유빙은 자신의 집안과도 연결된 새 황제를 원했다. 그는 북쪽의 강력한 경쟁국 후조(後趙)의 위협을 이유로 들어, 제국에는 성인이 된 황제가 필요하다고 설득했고, 결국 성제를 설득하여 그의 남동생이자 유문준의 아들인 낭야왕 사마연에게 황위를 물려주게 했다. 성제는 이에 동의하였고, 사마연을 황태자로 삼았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사마연은 강제로 즉위하였다.
- 342년에 8월 1일, 낭야왕(琅琊王)으로 봉해졌다.
【기원후 345년】
- 345년에는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임명되었다.
【기원후 356년】
- 356년에는 중군장군(中軍將軍)으로 승진했다.
【기원후 359년】
- 359년 12월에는 표기장군(驃騎將軍)이 되었다.
- 당초 진애제는 진성제의 뒤를 이어 즉위할 예정이었으나 권신 여빙(庾冰)의 반대로 즉위하지 못했다.
【기원후 361년】
- 이후 361년 진목제가 사망한 뒤에야 즉위해 연호를 '융화(隆和)'로 정했다.
- 그러나 대장 환원(桓溫)이 실권을 쥐고 있어 진애제는 사실상 권력의 허수아비였다.
【기원후 362년】
- 애제는 362년에 자신의 생모 주비(周妃)를 태비(太妃)로 존숭했으나, 예우와 공급은 태후와 비슷한 수준으로 대우하였다. 그러나 실제 정사는 대부분 장군 환온(桓溫)과 황제의 종조부 사마우(司馬昱, 회계왕 會稽王)의 손에 달려 있었다.
【기원후 363년】
- 363년, 주태비(周太妃)가 사망하였다. 예법에 따르면 어머니로서의 예우를 중단해야 했고, 저태후(褚太后)에 대한 예우를 존중하기 위해 애제는 일반적인 어머니의 삼년상을 치르지 않았다.
【기원후 364년】
- 진애제는 불교를 열렬히 좋아했고, 황로도(黃老道)도 좋아하였다.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장생술에 심취해 도사들이 전해준 장생법을 따르며 절식(斷穀)하고 단약(丹藥)을 복용하였다.
- 그러나 약물 부작용으로 인해 정사를 돌볼 수 없게 되자, 다시 저태후(褚太后)가 정사를 담당하였다.
- 그해 말, 전연(前燕)이 낙양에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고, 환온(桓溫)과 사마욱(司馬昱)은 낙양을 구원하기 위한 반격을 고려하였다.
【기원후 365년】
- 애제가 365년 3월에 사망하면서 이 계획(낙양 구원을 위한 반격)은 중단되었고, 곧 낙양은 함락되었다.
- 애제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동생 사마혁(司馬奕)이 뒤를 이어 폐제(廢帝)로 즉위하였다.
- 흥녕 3년(365년), 진애제는 약물 중독으로 태극전(太極殿)에서 사망하였으며, 향년 25세였다. 묘는 안평릉(安平陵)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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