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Asa, BC. ?~870년경) : 유다의 세 번째 왕(BC. 911~870년경)
- Asa [Hebrew : אָסָא, / Modern : ʾAsaʾ / Tiberian : ʾĀsāʾ / Greek : Ασά / Latin: Asa]
- 출생 : 미상
- 사망 : 기원전 870년경
- 재위 : 기원전 911~870년경
- 전임 : 아비야(Abijah)
- 후임 : 여호사밧(Jehohshaphat)
- 부친 : 아비야(Abijah)
- 배우자 : 아수바(Azubah) : 열왕기상 22장 42절, 역대하 20장 31절
- 자식 : 여호사밧(Jehohshap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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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 왕 |
1. 유다 왕국의 세 번째 왕
아사(Asa)는 히브리 성경에 따르면 유다 왕국의 세 번째 왕이자 다윗 가문의 다섯 번째 왕으로 전한다. 전통적 성경 연대에 따르면 통치 시기는 기원전 10세기 말에서 9세기 초 범위로 비정되며, 일반적으로 재위 기간은 약 기원전 911년부터 870년으로 제시된다. 아사는 아비야(Abijah)의 아들로 기록되고, 후계자는 아들 여호사밧(Jehohshaphat)이다. 에드윈 R. 타일(Edwin R. Thiele)의 연대에 따르면 아사는 병이 시작된 해에 여호사밧을 공동섭정으로 세우고 2년 후 사망한다는 설명이 덧붙는다.
2. 가계
1) 아비야의 아들
아사는 아비야(Abijah/Abijam)의 아들로 전해지며, 즉위는 아비야의 뒤를 이은 직계 승계로 이해된다. 그의 통치 초기는 내부 개혁과 종교 질서 재정비에 집중되었고, 산당 철폐, 우상 파괴, 제의 질서의 정비 등이 핵심 과제로 등장한다. 이러한 조치는 역대기 사가의 신학적 관점에서 유다의 정당성과 다윗 언약의 연속성을 공인받는 근거로 제시된다.
2) 모후 아수바
모후 마아가(Maacah)의 표기는 성경 본문 전승에서 혼동을 낳아, 때로 아비야의 어머니이자 아사의 ‘어머니’로 호칭된다. 여기에는 히브리어 친족 용어의 관습이 작용하여 ‘딸/손녀’, ‘어머니/할머니’가 동일 어휘로 쓰인다는 주석 전통의 설명이 따른다. 따라서 “아브살롬의 딸 마아가”와 “우리엘의 딸” 표기는 세대 압축을 반영하는 표현으로 해소할 수 있다는 견해가 제시되어 왔다. 또한 일부 주석가들은 만일 아사의 모후가 마아가가 아니었다면 이름이 별도로 제시되었을 가능성을 지적한다. 이러한 논의는 본문 내 ‘모후’의 정치적 영향력과 종교 노선 갈등을 해석하는 단서로 사용된다.
3. 아사의 통치
아사의 통치는 유다의 종교 정체성 회복과 방어 체계 강화라는 두 축으로 요약된다.
1) 우상 척결과 제의 개혁
그는 전통적 야훼 예배 유지에 열심이었고, 우상 숭배와 그에 수반된 비도덕적 관습을 뿌리 뽑는 정책을 추진했다. 아사는 유다 전역에서 산당을 제거하고, 우상과 기물을 파괴하는 대대적 정화 작업을 단행했다. 이는 도덕적 타락을 동반한 우상 숭배의 질서를 따르지 않겠다는 선언이자, 예루살렘 성전 중심 제의의 회복을 가속한 조치였다. 역대기 사가는 이 개혁을 다윗·솔로몬 전통의 신앙 질서 회복으로 평가하며, ‘백성의 마음을 야훼께로 향하게 했다’는 신학적 함의를 부여한다. 반면 열왕기 편집 전통은 산당의 완전 철폐 여부에 대해 비교적 더 엄격한 평가 잣대를 유지한다는 점이 병기된다.
2) 전쟁과 방어 사업
아사는 국경 방어를 위해 요새화 사업과 방어 도시 정비에 힘썼다. 재위 10년 무렵 세라(혹은 제라, Zerah, 에티오피아 혹은 구스)와의 전투가 기록되며, 승리를 통해 한동안 평화를 누렸다는 기술이 이어진다.
재위 36년에 북왕국 바아사바아사(Baasha)가 라마를 요새화하며 남유다를 압박하자, 아사는 성전과 왕궁의 보물을 취해 다메섹의 벤하닷 1세(Ben-Hadad I)에게 보내 동맹을 청하고 북왕국의 배후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공세가 완화되었고 바아사는 라마의 공사를 중지하게 되었다는 결과가 정리된다. 그러나 이 외교적 성공은 곧바로 예언자 하나니(Hanani)의 책망으로 이어져, 신의 구원 대신 외세를 의지했다는 도덕·신학적 문제를 남겼다.
3) 만년의 균열과 병
하나니의 질책에 격분한 아사는 그를 옥에 가두고 일부 백성을 압박하는 등, 초반과 다른 태도를 보였다는 기록이 남는다. 재위 39년에 발병한 발(발바닥 혹은 발병) 질환은 심각했고, 그는 여호와가 아니라 ‘의사들’을 찾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타일의 연대에 따르면 이 해에 아사는 아들 여호사밧을 공동섭정으로 세운다. 아사는 2년 뒤 사망하고, 예루살렘에 자신을 위해 판 묘에 장사되며 장작더미(화장 pyre)를 피워 그를 예우했다는 기록이 덧붙는다. 이 만년의 기록은 ‘의로움’의 출발에서 ‘인간적 한계’로 이행하는 통치의 양면을 드러낸다.
4. 연대 주석과 조정
아사의 즉위ㆍ재위 숫자와 북왕국 왕들의 연차와의 맞물림에서 불일치가 발생한다. 학계의 대표적 설명은 공동섭정(co-regency) 도입, 기준 연도 차이(즉위년/연초기산), 숫자 반올림 혹은 서기관 전승의 이본 등을 통한 조정이다. 타일의 체계에서는 재위 말기 질병의 시작점에 여호사밧 공동섭정이 놓이며, 총 재위 숫자와 사건 배열의 간극을 메운다. 이러한 연대 주석은 본문들 사이의 차이를 ‘오류’가 아닌 ‘기록 관습의 상이함’으로 해소하려는 시도로 평가된다.
5. 아사에 대한 평가
1) 랍비 문헌의 해석
랍비 전승은 히스기야 시대의 놋뱀 파괴와 관련해 “아사와 여호사밧이 우상 정화 과정에서 놋뱀은 일부러 남겼다”는 해석을 전한다. 그 이유는 후대의 경건한 개혁이 칭찬받을 여지를 남기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전승에서는 아사를 ‘아담에게 있었던 신체적 완전성’을 지닌 다섯 인물 중 하나로 언급하면서, 그가 그 ‘발’을 남용했기에 노년의 발병으로 고통받았다고 설명한다. 아사가 전쟁에 유다 전체를 동원하며 토라 학자들과 신혼 남자들까지 면제 없이 징발한 점이 징벌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주석이 함께 전한다. 이러한 라비적 독해는 율법적 윤리와 왕권의 책무를 긴밀히 연결한다.
2) 기독교 주석 전통
기독교 전통에서 아사는 ‘남은 자’ 신학과 다윗 언약의 연속성을 보존한 왕으로 이해되며, 초반 개혁은 신앙적 모범으로, 만년의 외교·의존은 경계로 읽힌다. 역대기의 예루살렘 제의 중심주의와 열왕기의 평가 공식은 설교와 교리 교육에서 각각 회복의 약속과 심판의 경고라는 상보적 메시지로 사용된다. 교회 주석에서는 하나니의 책망과 발병 대목을 통해, 신앙 공동체의 지도자가 성취 이후에도 의존의 방향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교훈을 도출한다.
3) 전승 속의 아사
아사는 서구 도상학에서 종종 우상 파괴와 개혁의 상징으로 그려진다. 샤르트르 대성당의 북장미창과 시스티나 성당 천장 루넷 등에서 아사와 여호사밧, 요람의 계보가 함께 묘사되며, 이는 메시아 계보 속 선조로서의 상징적 위상을 반영한다. 근세 판화·연대기류에서는 즉위와 우상 파괴 장면이 병치되며, 통치의 핵심 정체성이 시각적으로 요약된다 .
4) 경건한 개혁자와 인간의 한계
총평에서 아사는 대체로 ‘의로운 왕’으로 간주되나, 말년에 드러난 외세 의존과 예언자 탄압, 발병 서사는 그의 한계를 분명히 각인시킨다. 초반의 우상 척결과 제의·방어 체계의 정비는 유다 공동체의 안정과 정체성 회복에 기여했으며, 그의 뒤를 이은 여호사밧의 개혁과 장기 통치로 이어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다. 편집사 관점에서 역대기는 그의 공로를 부각하고, 열왕기는 평가 공식에 따른 절제된 서술을 유지함으로써, 하나의 인물에 대한 상이한 신학적 초점을 함께 남긴다 .
5. 마무리 – 오늘의 독서를 위한 좌표
아사의 기록은 개혁과 성취가 곧 영구적 안정으로 이어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정치·외교의 능란함이 신학적 정당성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경고와, 지도자의 건강·만년의 선택이 공동체의 기억 속 평가를 바꾼다는 교훈이 함께 남는다. 라비 문헌과 기독교 주석은 같은 본문에서 서로 다른 각도의 윤리적 결론을 끌어내며, 연대 주석은 상이한 기록 전통을 조정하려는 학문적 노력을 보여준다. 오늘의 독자는 개혁의 열정과 의존의 방향, 권력의 책무와 신앙의 중심을 함께 점검하는 독서를 통해 이 인물을 현재적 질문으로 소환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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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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