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8일 금요일

윌리엄 맥킨리(William McKinley, 1843~1901) : 미국 제25대 대통령(1897~1901)

윌리엄 맥킨리(William McKinley, 1843~1901)
미국 제25대 대통령(1897~1901)

 
윌리엄 맥킨리는 공화당 소속으로 1896년과 1900년 대선에서 연이어 승리하며 제25대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그는 산업 보호를 위한 고관세 정책, 금본위제 확립, 스페인미국 전쟁을 통한 영토 확장, 그리고 미국의 세계 강국 진입을 이끈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또한 그의 대통령 재임은 미국의 현대적 행정 및 외교 모델을 형성한 전환점이었다.
 
윌리엄 맥킨리(William McKinley, 1843~1901)

윌리엄 맥킨리(William McKinley, 1843~1901)


1. 출생과 정치 입문

 
맥킨리는 1843년 오하이오주 네일즈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정치·법조 계열이었으며, 그는 어려서부터 법학과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 1877년부터 1891년까지 하원 의원으로 활동하며 보호무역 정책을 옹호했다. 특히 1890년 맥킨리 관세법(McKinley Tariff Act) 제정에 중심 역할을 하며 공화당 내 경제 전략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는 링컨 및 보호무역 전통을 잇는 대표적 정치인이었다.
 

2. 1896년 대선 캠페인과 재선

 
1896년 대선에서 그는 민주당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을 상대로 금본위제 지지와 산업 보호를 공약으로 내세워 당선되었다. 당시 금본위제 vs 은본위 논쟁이 핵심 쟁점이었으며, 맥킨리는 금본위제를 통해 경제 안정과 외국인 투자 유치를 주장했다. 그는 청교도적 근면과 책임 있는 정치 스타일로 유권자의 지지를 얻었고, 1900년 재선에서는 더 큰 표차로 승리하면서 재신임을 받았다.
 

3. 경제 정책 : 관세와 화폐 안정

 
대통령 취임 직후인 1897년 그는 의회에 고관세 특별 회의를 요청하여 딘글리 관세법(Dingley Tariff Act) 를 통과시켰다. 이 법은 평균 관세율을 약 50~52% 수준으로 인상하며 산업 보호와 재정 수입 증대를 목표로 했다. 이 조치로 철강, 섬유, 농산업 등 국내 산업이 성장했으나, 동시에 소비자 물가 상승과 농업 지역의 반발도 촉발되었다.
 
또한 그는 1900년 금본위법(Gold Standard Act)을 제정해 화폐 가치를 금에 고정했다. 금본위 체제 확립은 화폐 안정성과 투자 신뢰를 제고하는 효과가 있었으며, 이후 수십 년간 미국 통화 정책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농민과 노동자 집단에서는 유동성 부족과 디플레이션 우려를 제기하며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4. 독점 규제와 노동정책

 
맥킨리는 기업 독점을 단순히 비판하기보다는 좋은 신탁나쁜 신탁을 구분하며, 산업 집중을 조건부 허용하되 공익 보호를 강조했다. 그는 ‘Sherman 독점 금지법의 틀 안에서 신탁 규제 강화 가능성을 언급했지만, 본격적인 입법은 후임 루스벨트에게 맡겼다.
 
1898년 그는 미국 산업 위원회(US Industrial Commission)를 설치해 산업 조건과 노동 문제를 조사하게 했다. 이 위원회는 이후 진보시대의 정책 방향을 형성하는 실질적 토대를 제공했다. 또한 철도 노사분쟁에 대한 중재법인 Erdman Act에 서명해, 조정 중 해고를 금지하는 규정을 도입했다.
 

5. 외교 정책과 제국 확장

 
1898년 맥킨리는 쿠바 위기와 USS 메인 침몰 사건을 계기로 스페인미국 전쟁을 선언했다. 전쟁은 3개월 만에 승리로 끝났고, 미국은 푸에르토리코, , 필리핀, 하와이 등 해외 영토를 확보했다. 그는 조약 체결을 통해 쿠바가 미국 통제하에 있던 기간에도 Platt Amendment를 통해 특정 권한을 유지하도록 했다.
 
필리핀에서는 인도적 동화를 표방한 정책(‘benevolent assimilation’)을 발표하고 Schurman 위원회를 구성해 자치 가능성을 연구했지만, 1899년부터 수년간 이어진 필리핀미국 전쟁은 수만 명의 사망자를 낳았다. 또한 중국에 대해 Open Door 정책을 채택하고 Boxer 반란 진압에 일부 미군을 파견함으로써 국제 무역과 외교 참여를 확대했다.
 

6. 언론 전략과 대통령 권한의 진화

 
맥킨리는 전신, 전화, 당시 신문 기술을 활용해 전쟁 및 정책 소통을 직접 관리했다. 그는 지도부 및 참모들과 적극적으로 협업하며 현대 대통령제의 소통 모델을 정립했다. 이는 이후 미국 대통령들이 언론과 테크를 활용하는 기준이 되었다.
 
그는 마크 해나(Mark Hanna) 등 정치 후견인과의 관계에서도 주도권을 유지하며, 공화당 정책 방향의 주도자로서 역할했다. 초기에는 정치적 연줄에 의존한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최근 연구는 오히려 맥킨리가 전략적으로 이를 활용한 지도자라는 재해석을 제시한다.
 

7. 암살과 역사적 유산

 
190196일 그는 뉴욕 버팔로에서 무정부주의자 레온 촐고슈에게 피격당했으며, 이후 감염으로 인해 914일 사망했다. 이는 링컨, 가필드에 이어 세 번째 미국 대통령 암살 사건이었다. 그는 사망 전 텍사스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재선을 준비 중이었다.
 
그의 후임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필리핀과 쿠바, 파나마 운하 등 정책을 이어받으며 미국 개혁 시대의 본격적 시작을 알렸다. 맥킨리 암살 이후 입법 및 사법 제도의 강화가 이루어졌으며, 그가 제안한 정책의 일부는 다음 행정부를 통해 구체화되었다.
 
최근 학계는 맥킨리를 보호무역, 금본위제, 제국주의 확장의 주도자로 평가한다. 그는 산업 성장과 경제 정책의 초기 틀을 마련했으며, 대통령 권한과 공화당 리더십 재정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편 트럼프는 맥킨리의 관세 정책을 모방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맥킨리는 말년에 상호주의 무역협정을 지지하며 국제 무역 방식에 변화를 시도했다. 트럼프와 달리 그는 협상을 통한 평화를 선호했다.
 
윌리엄 맥킨리는 미국 산업화와 세계 진출의 발판을 마련한 대통령이다. 그는 고관세, 금본위, 해외 영토 확보, 기업·노동·관세 제도 정비 등 다방면에서 미국의 기틀을 구축했다. 그의 짧은 임기에도 후대 지도자와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유산을 남겼다. 책임 있는 권력 행사와 현실주의적 외교는 오늘날에도 주요 참고 사례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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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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