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8일 금요일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AD.51~96) : 로마 제국 제11대 황제(AD. 81~96)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AD.51~96)
로마 제국 제11대 황제(AD. 81~96)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AD.51~96)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AD.51~96)

 

도미티아누스의 출생과 즉위

 
도미티아누스는 511024, 로마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티투스 플라비우스 도미티아누스(Titus Flavius Domitianus)였다. 그는 제국의 통치자 베스파시아누스의 둘째 아들로서 태어났고, 형 티투스와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에 이어 플라비우스왕조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형 티투스가 81년 병사하자 도미티아누스는 프라이토리안 근위대에 의해 다음 날 황제에 선포되었고, 15년 동안 재위했다. 이는 티베리우스 이후 가장 긴 기간이었다.
 

통치 초반과 정치 구조 개편

 
즉위 초기 도미티아누스는 공화제적 요소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노력을 거의 포기하고, 즉시 전제적 통치로 전환했다. 그는 85년 자신을 영구 검열관(censor perpetuus)으로 선언해서 원로원의 직책과 권한을 크게 약화시켰다. 이를 통해 황제의 뜻에 맞지 않는 인물은 상원에서 퇴출시켰고, 친정부 인물은 쉽게 진입시킬 수 있었다. 이같은 검열관 권한은 단순한 도덕 감시가 아니라 상원 구성, 인사, 재정 관리, 여론 조작까지 포괄하는 폭넓은 권력이었다.
 

재정 개혁과 경제 안정

 
도미티아누스의 재정 정책은 매우 실용적이었다. 그는 은화 순도를 약 90% 수준에서 최대 98%까지 회복시켜 화폐 신뢰성을 확보했다. 동전 주조 방식을 개선하고 청동화 발행을 중지했으며, 세금과 국고채무를 철저히 통제하면서 부패를 줄였다. 이와 함께 군대 급여를 약 1/3 인상하여 군의 충성도를 확보하고, 광범위한 건축 사업 비용을 뒷받침했다. 이 같은 개혁은 후세 황제들이 직면한 재정 위기를 일정 기간 완화시켰다.
 

군사 활동과 외교 관계

 
도미티아누스 재위 기간 중 군사적 긴장은 국경지대에서 지속되었다. 브리타니아에서는 아그리콜라가 스코틀랜드 북부까지 진출했지만, 칼레도니아 정복을 이루지 못했다. , 다키아 전쟁에서는 86년 모에시아 지역이 공격받자 도미티아누스는 즉시 대응하여 성공적으로 방어했지만, 데체발루스(Decebalus, 다키아 왕)와의 장기전에서는 결정적 승리를 이루지 못했다.
 
게르마니아에서는 카티족(Chatti)에 대한 공격 작전을 명령했으며, 이 작전은 일부에서 허영을 위한 원정이라 비판받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플라비우스 가문은 게르마니아에서 약 100년간 유지된 강력한 게르마니아 경계선’(Limes Germanicus)을 구축할 수 있었다.
 

종교 정책과 유대인·기독교인에 대한 영향

 
도미티아누스는 유대인에게 부과된 피스쿠스 유다이쿠스’(Fiscus Judaicus, 유대인 특별 세금)를 확대 적용했다. 그는 유대인뿐 아니라 유대적 삶의 방식을 관습적으로 따르는 사람에게도 과세했다.
 
이로 인해 고발과 블랙메일이 로마 전역에서 빈번하게 발생했고, 서기 95년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스(Titus Flavius Clemens) 등은 이러한 이유로 처형되었다.
 
기독교인들에게도 초기 탄압의 배경이 되었으며, 일부 학자들은 이를 도미티아누스 시기 이후 초기 기독교 박해의 계기로 본다.
 

문화, 문학, 건축에 대한 후원

 
도미티아누스는 로마의 대규모 건축 사업을 추진했다. 대표적으로는 팔라티노 언덕의 플라비우스 궁전(Domus FlaviaDomus Augustana), 그 뒤의 정원과 스타디움 오브 도미티아누스(오늘날의 피아자 나보나), 판테온 복원, 베스파시아누스ㆍ티투스 신전, 그리고 아치형 기념물(Arch of Titus) 등이 있다.
 
또한 도미티아누스의 오데온’(Odeon of Domitian, 도미티아누스 소극장)이라는 음악ㆍ연극 경기장도 건립했다. 이 극장은 약 11,000명 수용 규모였고, 초기 로마에서 그리스적 공연문화를 도입했다.
 
문학계에도 예산을 지원하여 마르티알리스, 스타티우스 같은 시인들이 황제 숭배와 로마의 위대함을 노래했다.
 

통제와 정보망 운영

 
도미티아누스는 프루멘타리이(frumentarii)라는 비밀 정보망을 통해 반대 세력을 감시했다. 이는 일종의 사정보안 조직으로서 황제의 직접 통치를 보좌했다. 또한 델라토레스(delatores, 신고자들)를 활용해 고위 관료나 상원 인물을 조종했다.
 
통치 전반에 걸쳐 게임 참가자 복장 규제, 공공 질서 감시 규칙 강화 등 일상적 생활까지 통제하려 했고, 이는 엄격한 사회 규율과 감시체제를 의미했다.
 

폭정과 암살, 그리고 기억의 저주

 
도미티아누스의 말년은 원로원과의 대립, 반대파 숙청 등으로 얼룩졌다.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수십 명의 상원 인사가 반란 혐의 또는 종교적 이유(‘유대인화)로 처형되었다. 클레멘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등이 대표적이다.
 
96918일 도미티아누스는 자신의 궁정 내부 궁정 관료 및 수행자들이 음모를 꾸며 암살되었고, 주된 암살자는 스테파누스(Stephanus)였다. 그날 즉시 상원은 그의 이름을 삭제하고 조각, 기념물 등을 파괴하는 기억의 저주(damnatio memoriae)’를 시행했다. 후임자인 네르바가 즉시 황제로 선포되었고, 플라비우스 왕조는 공식적으로 종말을 맞았다.
 

현대 학자들의 평가와 재평가

 
고대 사료(타키투스, 플리니우스, 수에토니우스 등)는 도미티아누스를 폭군이자 편집증자로 묘사했다. 그러나 이들 사료는 대체로 원로원 중심의 기반에서 작성되었고, 편견이 있다. 따라서 현대 연구자들은 그의 업적을 재평가하고 있다.
 
현대 역사학계는 도미티아누스를 단순한 야만이 아니라 효율적인 전제군주, 성과 중심의 실용적 통치자로 본다. 특히 재정 개혁, 군의 충성 확보, 대규모 건축 정책은 이후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로 이어지는 2세기 로마 평화기의 기반이 됐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폭군인가? 실용성을 갖춘 전제군주인가?

 
도미티아누스는 51년 출생, 81년 즉위, 96년 암살 사망으로 요약된다. 그는 플라비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으며, 15년간 재위했다.
 
그의 통치는 격렬한 권력 집중, 화폐 개혁, 군사 강화, 대규모 건설, 감시 체계 운영, 그리고 종교적 압박으로 특징지어진다. 말년의 폭정과 상원과의 극심한 대립은 그의 사후 기억의 저주로 이어졌지만, 현대의 관점에서는 효율성과 실용성을 갖춘 전제군주의 전형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도미티아누스는 폭군이었지만, 그가 다진 기반 덕분에 다음 세대 황제들은 로마 제국의 전성기를 구축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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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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