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3일 수요일

볼루시아누스(Volusianus, AD.c.230~253) : 로마 제국 제31대 공동황제(AD.251~253)

볼루시아누스(Volusianus, AD.c.230~253) : 로마 제국 제31대 공동황제(AD.251~253)

 

볼루시아누스, 아버지와 함께 제국을 이끈 2년의 공동 통치

 
가이우스 비비우스 볼루시아누스(Volusianus, 230~253)251년부터 253년까지 부친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Trebonianus Gallus, 206~253)와 공동으로 로마 제국을 통치한 황제이다. 그의 재위는 고트족과의 전쟁, 사산 왕조와의 긴장, 역병의 확산이라는 삼중의 압력 속에서 전개되었고, 최후는 반란군 에밀리아누스(Aemilianus, ?~253)의 진군에 겁을 먹은 자군에게 피살되는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즉위 배열은 데키우스(Decius, 201~251)와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Herennius Etruscus, ?~251) , 에밀리아누스 앞에 놓이며, 3세기 위기의 급박한 승계 리듬을 상징한다.

볼루시아누스(Volusianus, AD.c.230~253) : 로마 제국 제31대 공동황제(AD.251~253)
볼루시아누스(Volusianus, AD.c.230~253) : 로마 제국 제31대 공동황제(AD.251~253)
 

출생·가문과 이름, 정체성의 윤곽

 
볼루시아누스는 아버지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와 어머니 아피니아 게미나 베비아나(Afinia Gemina Baebiana)의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로 기록된다. 라틴식 전명은 가이우스 비비우스 아피니우스 갈루스 벨둠니아누스 볼루시아누스로 전하고, 즉위명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비비우스 아피니우스 갈루스 벨둠니아누스 볼루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로 표기된다. 가능한 초상으로 투르 미술관의 대리석 흉상이 지목되어 왔으나, 비정에는 신중함이 요구된다.
 

생년의 범위와 분류

 
현존 분류에서 볼루시아누스는 대체로 230년 출생대로 정리되며, 사망은 2538월 이탈리아 인터람나(오늘날 테르니)로 기록된다. 생년은 정밀 연대가 아니라 범주형 분류에 기반해 추정되는 수준이므로, “230으로 보는 것이 균형 있다.
 

즉위의 배경과 카이사르에서 아우구스투스로의 상승

 
2516, 데키우스와 공동 황제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가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전사하자 야전군이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를 현지에서 황제로 추대하였다. 갈루스는 데키우스의 생존 아들 호스틸리아누스(Hostilian, ?~251)를 아우구스투스로 올려 정통성의 연속을 표방하고, 같은 달 볼루시아누스를 카이사르로 격상하였다. 7~8월경 호스틸리아누스가 역병으로 사망하자 볼루시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로 승격되어 부자 공동 통치 체제가 완성되었다. 볼루시아누스가 호스틸리아누스의 누이와 혼인했다는 전승도 전한다.
 

재위의 구조와 공식 배열

 
볼루시아누스의 재위는 대략 2518월부터 2538월까지로 정리되며, 전임 배열에는 데키우스와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가, 공동 황제에는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가, 후임에는 에밀리아누스가 명기된다. 사망지는 인터람나로 기록되고, 부자 동시 피살이라는 결말이 표준 서술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배열 자체가 군단 추대와 원로원 인준이 얽힌 3세기 승계의 형식을 간결히 요약한다.
 

역병과 대외 여건, ‘방어적 평화의 선택

 
갈루스볼루시아누스 공동 통치 초기 제국에는 대규모 역병이 돌았고, 이는 호스틸리아누스의 사망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동쪽으로는 사산 왕조의 위협이 고조되고, 북동 변방에서는 고트족의 침입과 약탈이 이어졌다. 갈루스 정권은 당면한 전선의 소모를 줄이기 위해 고트족과 조공·불침입을 골자로 한 강화를 체결하였고, 당대 사가 중 일부는 이를 수치스러운 조약으로 비판하였으나, 군사·재정 여건을 고려한 방어적 선택이었다는 해석이 병존한다.
 

화폐와 선전, ‘새 시대영원한 로마의 언어

 
볼루시아누스 치세의 금화(aureus)와 복수의 방사관 주화에는 전면 흉상과 함께 후면에 아이퀴타스, 아에테르니타스, 아폴로, 유노, 빅토리아, 콩코르디아, 펠리키타스, 리베르타스, 프로비덴티아, 살루스, 비르투스 등의 도상이 배치되었다. 몇몇 주화에는 사이쿨룸 노붐(새 시대)”이라는 문구가 전통적 로마에 아에테르나에(영원한 로마)”·“팍스 아에테르나에(영원한 평화)”와 함께 새겨져, 혼란 속에서도 연속성과 재건의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전파하였다.
 

사망과 정국의 급전, 에밀리아누스의 등장

 
253년 여름, 모에시아 방면 장수 에밀리아누스가 반기를 들고 이탈리아로 속진하자, 갈루스볼루시아누스의 군대는 교전 전후의 혼란 속에서 두 황제를 살해하였다. 사료의 세부는 다소 엇갈리나, “자군이 반란자의 위세에 겁먹고 황제를 제거했다는 공통된 요지는 유지되며, 정국은 곧바로 에밀리아누스로 넘어갔다. 부자의 최후는 군단 충성의 급변이 제국 최고 권력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 있었던 3세기 권력 구조의 민낯을 드러낸다.
 

볼루시아누스의 위치, 3세기 위기 속 연속성의 장치

 
볼루시아누스는 독자적 개혁을 펼칠 시간도, 안정적 전황을 기반으로 한 치적을 남길 여지도 갖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승격, 공동 통치의 운용, 주화와 의전이 반복한 연속성의 언어는, 병영 정치의 급류 속에서도 제정이 유지하려 한 최소한의 질서를 증언한다. 단명한 그의 치세는 합법성의 외피군단의 실질 권력이 불안한 균형을 이루던 시대의 표본으로 남는다.
 

연표로 보는 핵심 이정표

 
  • 2516: 갈루스가 황제로 추대되고, 호스틸리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 볼루시아누스가 카이사르로 격상된다.
  • 2517~8: 호스틸리아누스가 사망하고, 볼루시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로 승격되어 부자 공동 통치가 확립된다.
  • 2538: 에밀리아누스의 반란 속에 인터람나에서 부자 동시 피살로 통치가 종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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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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