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베루스(Lucius Verus, AD.130~169년) : 로마 제국 제16대 공동황제(AD.161~169)
-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Lucius Aurelius Verus)
- 출생 : 기원후 130년 12월 15일 / 로마
사망 : 기원후 169년 1월 23일 - 부친 :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에사르(Lucius Aelius Caesar)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 : 기원후 138년 2월 양자입적 - 모친 : 아비디아(Avidia)
- 배우자 : 루킬라(Lucilla) : 기원후 164년 결혼
- 자녀 : 아우렐리아 루킬라(Aurelia Lucilla), 루킬라 플라우티아(Lucilla Plautia), 루키우스 베루스(Lucius Verus)
- 재위 : 기원후 161년 3월 7일 ~ 169년
1. 루키우스 베루스 : 로마 제국의 첫 공동 황제가 짊어진 영광과 고뇌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공동 황제 체제는 훗날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시대의 테트라키아(Tetrarchia, 4두정치)와 같은 모습으로 정착되지만, 그 시작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후반, 서기 161년에 처음으로 실현되었다. 이 특별한 역사적 순간의 주인공이 바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121~180년)와 함께 로마 제국을 통치했던 루키우스 베루스(Lucius Verus, 130~169년)이다. 그의 생애는 비록 짧았지만, 그는 강력한 파르티아 제국을 상대로 한 대규모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혼란한 시기에 제국의 안정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혈통보다는 능력과 제국의 안정을 우선시했던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양자 계승' 원칙 아래, 루키우스 베루스는 제국의 미래를 함께 책임질 파트너로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의 생애와 통치, 그리고 로마 역사에 남긴 발자취를 자세히 살펴본다.
2. 탄생과 어린 시절 : 황제가 될 운명을 타고난 귀족
루키우스 베루스는 서기 130년 12월 15일 로마에서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Lucius Ceionius Commodus)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황제 하드리아누스(Hadrian, 76–138년)의 첫 번째 양자이자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Lucius Aelius Caesar, ?~138년)였다. 어머니는 아비디아(Avidia)였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황제 가문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가 서기 138년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하드리아누스는 새로운 후계자로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 86~161년)를 지명하게 된다. 이때 하드리아누스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에게 루키우스를 양자로 삼으라고 지시했고, 동시에 당시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외조카이자 훗날 위대한 철학자 황제가 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함께 양자로 삼도록 했다. 이로써 루키우스는 하드리아누스의 양손자이자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양자가 되었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는 의형제가 되었다. 초기에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딸 파우스티나(Faustina)와 약혼하기도 했으나, 이 약혼은 곧 파기되고 파우스티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결혼하게 된다. 이처럼 어린 시절부터 루키우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함께 제국의 차세대 리더로 교육받으며 성장했다.
3. 공동 황제 : 로마 제국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다
서기 161년, 평화로운 통치를 이어가던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사망했다. 로마 원로원은 자연스럽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단독 황제로 선포하려 했다. 그러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고심 끝에 원로원과 군단의 동의를 얻어 루키우스 베루스를 자신과 동등한 권한을 가진 공동 황제로 임명하는 전례 없는 결정을 내렸다.
이는 로마 제정기 역사상 처음으로 두 명의 황제가 대등한 권력을 가지고 제국을 통치하는 체제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루키우스에게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Lucius Aurelius Verus Augustus)라는 정식 황제 칭호를 부여했으며, 심지어 황제명에 자신의 ‘아우렐리우스’를 부여하여 혈연적 동등성을 강조했다. 이는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하드리아누스의 의지에 따라 두 양자를 모두 황제 후보로 교육했던 배경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동생 베루스의 군사적 재능과 잠재력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공동 통치 체제는 방대한 로마 제국의 효율적인 통치를 위한 시도이자, 위기 상황 발생 시 빠른 의사결정과 책임 분담을 가능하게 하는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4. 파르티아 전쟁의 승리 : 군사적 업적을 빛내다
공동 황제 즉위 직후, 로마 제국은 동방에서 심각한 위협에 직면했다. 강력한 숙적 파르티아 제국이 로마 영토를 침공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루키우스 베루스에게 동방 전선 지휘권을 맡겨 이 전쟁을 총괄하게 했다. 루키우스 베루스는 서기 162년 동방으로 향했으며, 이후 4년간 진행된 이 전쟁은 그의 재위 기간 대부분을 차지했다.
루키우스 베루스는 사령관으로서 전략적 통찰력과 리더십을 발휘하며 파르티아군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그는 아르메니아(Armenia)를 탈환하고, 파르티아의 수도 크테시폰(Ctesiphon)을 함락시키는 등 여러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쟁은 로마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고, 제국은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일부 영토를 얻는 등 군사적 영광을 되찾았다. 전쟁의 승리는 황제 베루스에게 ‘파르티쿠스(Parthicus)’라는 칭호를 안겨주었고, 로마 시민들은 그에게 개선식을 베풀며 열광했다. 이 전쟁은 루키우스 베루스가 단순한 명목상의 황제가 아닌, 제국의 군사적 역량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유능한 지도자였음을 입증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 승리는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기도 했다. 동방에서 돌아온 군단병들은 치명적인 역병, 즉 ‘안토니누스 역병(Antonine Plague)’을 로마 제국 전역으로 퍼뜨렸고, 이 역병은 이후 수십 년간 로마의 인구를 급감시키고 사회ㆍ경제적 혼란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었다.
5. 마르코만니 전쟁과 갑작스러운 죽음
파르티아 전쟁을 성공적으로 마친 루키우스 베루스는 서기 167년경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함께 제국의 북부 국경을 위협하던 게르만 부족, 특히 마르코만니족과의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이 전쟁은 ‘마르코만니 전쟁(Marcomannic Wars)’으로 알려져 있으며, 로마 제국에 큰 위협을 가했던 장기적인 충돌이었다.
그러나 서기 169년, 마르코만니 전쟁 중에 루키우스 베루스는 갑작스러운 질병에 걸려 사망했다. 그의 나이 38세였다. 명확한 병명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뇌졸중이나 안토니누스 역병의 후유증이라는 추측도 있다. 그는 알티눔(Altinum)으로 향하던 도중 사망했으며, 시신은 로마로 옮겨져 하드리아누스의 마우솔레움(Hadrian's Mausoleum, 현재 카스텔 산탄젤로)에 안장되었다. 원로원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를 ‘신성한 베루스(Divus Verus)’로 신격화했다. 이로써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단독 황제로서 남은 제국 통치를 이어가게 된다.
6. 평가와 유산 : 역사 속에서 기억되는 루키우스 베루스
루키우스 베루스의 통치는 단 8년이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군사 원정으로 보냈다. 그는 역사적으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는 위대한 ‘철학자 황제’의 그늘에 가려져 상대적으로 덜 조명받는 경향이 있다. 일부 기록에서는 그가 향락적이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다고 묘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지휘했던 파르티아 전쟁의 승리는 분명한 군사적 업적이며, 공동 황제로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부담을 덜어주어 제국의 안정을 도모한 점은 간과할 수 없다.
그의 죽음은 로마 제국의 통치 방식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단독 통치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훗날 자신의 친아들 콤모두스(Commodus, 161~192년)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만약 루키우스 베루스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로마 제국의 역사는 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루키우스 베루스는 비록 로마의 가장 유명한 황제 중 한 명은 아닐지라도, 그는 로마 제국 역사상 최초의 공동 황제이자, 혼란스러운 시기에 제국의 번영과 군사적 위업에 기여한 중요한 인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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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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