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25일 월요일

교황 식스토 1세(Pope Sixtus I, AD. 42~125) : 제7대 교황(AD.c.115/119~c.125/128)

교황 식스토 1(Pope Sixtus I, AD. 42~125) : 7대 교황(AD.c.115/119~c.125/128)

 
  • Pope Sixtus I
  • [Greek : Σίξτος] Xystus
  • 출생 : 42/ Rome, Italy, Roman Empire
  • 사망 : c.125/ Rome, Italy, Roman Empire
  • 재위 : c.115/119~c.125/128
 
식스토 1세의 삽화
이 삽화는 1911년 미국 가톨릭 출판 협회(New York: The Catholic Publication Society of America)에서 출간된 슈발리에 아르토 드 몽토르(Chevalier Artaud de Montor)의 교황들의 생애와 시대(The Lives and Times of the Popes)에서 나온 것이다원래는 1842년에 출판되었다.
 
교황 식스토 1(Pope Sixtus I, 라틴어: Sixtus I, 이탈리아어: Sisto I)는 초대 로마 교회의 일곱 번째 교황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대략 기원후 117년부터 126년까지 교황직을 수행한 것으로 전해진다. 모든 초기 교황들과 마찬가지로 사후 성인으로 시성되어 오늘날까지 공경받고 있다. 식스토 1세의 재위 기간은 초기 기독교가 로마에서 점차 세력을 확장하고 조직적 기틀을 다지던 중요한 시기에 해당한다. 그의 생애와 사역에 대한 기록은 매우 제한적이지만, 남아있는 단편적인 정보들을 통해 당시 로마 교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1. 이름의 혼란과 그 배경

 
식스토 1세의 이름은 흥미로운 논란을 포함하고 있다. ‘식스토(Sixtus)’라는 이름은 라틴어로 여섯 번째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그가 성 베드로(Saint Peter) 이후의 교황 계승에서 여섯 번째에 해당한다면(베드로를 제외하고 계산할 때), 그의 이름은 이 계승 서열에 잘 들어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포함할 경우, 그는 교황 계승에서 일곱 번째 인물이다. 이로 인해 식스토(여섯 번째)’라는 이름은 그의 실제 계승 서열과 맞지 않는다는 혼란이 발생한다.
 
더 나아가, 일부 고대 문헌에서는 그의 이름이 식스토(Sixtus)’가 아니라 그리스어에서 면도한을 의미하는 시스토(Xystus)’로 기록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식스토라는 이름이 사실은 시스토를 잘못 표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제기된다. 이러한 이름의 혼란은 초기 기독교 기록이 체계적이지 못했고, 여러 언어가 혼용되던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 생애와 로마 교회의 계승

 
식스토 1세는 로마 태생이다. 그의 아버지 이름은 파스토르(Pastor)라고 교황 연대표(Liber Pontificalis)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전임 교황 알렉산데르 1(Alexander I)의 뒤를 이어 교황직에 올랐으며, 그의 후임 교황은 텔레스포로(Telesphorus)이다.
 
그의 재위 기간인 기원후 117년부터 126년까지는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 기독교가 서서히 성장하던 시기였다. 트라야누스(Trajan, 재위 98117) 황제의 통치 말기와 하드리아누스(Hadrian, 재위 117138) 황제의 초기 치세에 해당한다. 이 시기 로마 제국은 대체로 기독교에 대해 강경한 박해보다는 법적 테두리 내에서의 통제와 감시를 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식스토 1세의 교황직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 로마 교회의 내부적 정비와 성장에 초점을 맞추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교황 식스토 1세의 주요 법령과 기여

 
비록 교황 연대표에 기록된 그의 업적들이 후대에 추가되었거나 신뢰성에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이 법령들은 당시 초기 로마 교회가 직면했던 문제들과 해결하려 했던 노력들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교황 연대표는 식스토 1세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법령을 제정했다고 전한다.
 
성직자가 아닌 사람은 미사 때 사용하는 제구를 절대로 만져서는 안 된다.
  • 이 법령은 성찬례(Eucharist)에 사용되는 제구(성배, 성반 등)의 신성함을 강조하고,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구별을 명확히 하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초기 교회에서는 성찬례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고, 제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담는 도구로서 특별한 경외심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이를 평신도가 함부로 다루지 못하게 함으로써, 성찬례의 신성성과 질서를 유지하려 했을 것이다. 이는 교회의 전례와 직책에 대한 규율이 점차 확립되던 시기의 흐름을 반영한다.
 
교황에게 소환당한 주교들은 자신의 교구로 돌아갔을 때 교황의 증명 서한을 교구민들에게 제시하지 못할 경우에는 영접을 받지 못한다.
  • 이 법령은 로마 주교(교황)의 권위를 강화하고, 다른 지역의 주교들에 대한 로마 교회의 영향력을 확립하려는 노력으로 해석된다. 당시에는 로마 제국 전역에 기독교 공동체가 확산되고 주교들이 임명되었지만, 각 지역 교회의 자율성이 강했다. 교황이 주교를 소환하고, 돌아갈 때 증명 서한을 제시해야만 교구민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로마 교회가 보편 교회의 중심으로서 주교들의 충성심을 확보하고 교회 내의 위계 질서를 확립하려 했을 것이다. 이는 훗날 교황 수위권 발전의 초기적인 단초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미사 중에 상투스(Sanctus)를 집전 사제와 회중이 함께 노래로 부른다.
  • 상투스거룩하시도다라는 의미를 지닌 찬미가로, 미사의 성찬례 부분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이 법령은 미사 전례에서 신자들이 직접 참여하여 함께 노래 부르는 것을 장려함으로써,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고 미사 전체의 활기를 불어넣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초기 교회가 전례를 정비하고, 신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하며 예배의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흔적이다.
 
이러한 법령들은 당시 로마 교회가 교회의 조직, 성직자와 평신도 간의 역할 분담, 그리고 전례적 규율을 확립하려는 노력들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다. 비록 교황 연대표가 후대(5세기 이후)에 편집된 문서이기는 하나, 이러한 내용들은 당시 교회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시사한다.
 

4. 순교 여부와 유해에 대한 전승

 
식스토 1세는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는 전통이 있으나, 이에 대한 역사적 확실성은 부족하다. 일반적으로 네로(Nero, 3768) 황제와 도미티아누스(Domitian, 5196) 황제 사이의 시기에는 로마 교회에 대한 대규모 박해가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레나이우스(Irenaeus, c.130c.202)와 같은 초기 교부들도 초대 로마 주교들 중에서는 교황 텔레스포로(Telesphorus)만을 명확히 순교자로 지명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식스토 1세의 순교 전승은 후대에 성인에 대한 공경심이 커지면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의 유해는 대부분의 선임자들과 마찬가지로 초대 교황인 성 베드로의 무덤 인근에 안장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이는 그가 베드로의 직접적인 계승자로서 로마 교회 내에서 높은 위상을 지녔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부분이다. 또한, 알반 버틀러(Alban Butler, 17101773)에 따르면, 교황 클레멘스 10(Pope Clement X, 재위 16701676)가 식스토 1세의 유해 가운데 일부를 레츠 추기경(Cardinal de Retz)에게 주었고, 레츠 추기경은 이를 로렌(Lorraine)의 생미셸 수도원(Saint-Mihiel Abbey)에 안치했다고 한다. 이는 후대에도 식스토 1세가 성인으로서 존경받고 그의 유해가 중요하게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5. 다른 식스토와의 혼란 : 식스토 2

 
가톨릭 미사 전문 중에 성찬 감사 기도 부분에서 언급되는 식스토는 식스토 1세가 아니라 식스토 2(Sixtus II, 재위 257258)이다. 식스토 2세는 3세기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Valerian)의 박해 시기에 순교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혼동은 같은 이름을 가진 인물이 여러 명일 경우 역사적 기록에서 흔히 발생하며, 정확한 인물 구분이 중요함을 보여준다.
 

6. 성인으로서의 공경

 
식스토 1세는 사후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축일은 43일이다. 비록 그의 순교에 대한 역사적 증거는 불확실하지만, 로마 가톨릭교회는 그를 초기 교회의 중요한 인물로 공경하고 있다. 그의 이름은 로마 미사 경본(Roman Missal)에 포함되어 오늘날까지 미사 중 기념되고 있다. 이는 그의 존재와 초기 로마 교회를 위한 기여가 오랫동안 교회 전통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음을 의미한다.
 

7. 결론 : 로마 교회의 기틀을 다진 미지의 교황

 
교황 식스토 1세는 로마 교회의 일곱 번째 주교로서, 교회의 초기 조직과 전례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이름에 얽힌 흥미로운 역사적 배경과, 그에게 귀속되는 법령들은 당시 로마 교회가 어떻게 신성함과 질서, 그리고 권위를 확립하려 했는지를 보여준다. 비록 그의 순교 여부와 생애에 대한 많은 부분이 미스터리로 남아 있지만, 이러한 불확실성은 당시 시대의 기록적 한계와 초기 교회의 역동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식스토 1세는 성 베드로의 사목적 유산을 계승하고, 뒤따라오는 교황들의 리더십을 위한 기반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그의 유산은 로마 가톨릭 교회가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는 데 있어 중요한 단계를 거쳐왔음을 상기시키며, 초대 교회의 역사와 그 복잡한 발전 과정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통찰을 제공하는 인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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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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