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근동] 아시리아 왕들의 계보 : 신의 대리자에서 우주의 지배자까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강력한 제국이었던 아시리아의 역사는 그들의 왕들, 즉 ‘아시리아 왕 목록(Assyrian King List)’을 통해 전해진다. 이 목록은 수세기 동안 고대 아시리아인들 스스로 보관하고 발전시킨 기록으로, 현대 학자들이 아시리아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이 목록은 히타이트(Hittite), 바빌로니아(Babylonian), 고대 이집트(ancient Egyptian)의 왕 목록들과 잘 일치하며 고고학적 기록과도 부합하여 대체로 신뢰할 수 있는 자료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목록의 일부는 정치적 목적이나 실제와 다른 계승 관계를 포함하고 있어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기도 하다.

 

1. 아시리아 왕 목록의 특성과 신뢰도

 

아시리아 왕 목록은 고대 아시리아의 수도였던 아수르(Assur), 두르-샤루킨(Dur-Sharrukin), 니네베(Nineveh) 등지에서 불완전한 형태로 여러 개의 사본이 발견되었다. 이 사본들은 원래 하나의 목록에서 파생되었으며, 대체로 일관성을 보인다. 특히 기원전 1178년경 중기 아시리아 제국의 아슈르-단 1세(Ashur-dan I, 재위 기원전 1178~1133년)의 통치 이후의 목록은 내용이 완전히 동일하다.

 

이 목록은 각 연도의 명예로운 관리(limmu)의 임명 기록을 기반으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여기에 언급된 재위 기간은 대체로 정확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모든 부분이 역사적으로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일부 왕들은 목록에 존재하지 않거나, 반대로 목록에 있지만 독립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아슈르-니라리 2세(Ashur-nirari II, 재위 기원전 1424~1418년)는 목록에 전임자인 엔릴-나시르 2세(Enlil-Nasir II, 재위 기원전 1430~1425년)의 아들로 되어 있지만, 실제 비문에는 그가 아슈르-라비 1세(Ashur-rabi I, 재위 기원전 1472~1453년)의 아들이자 엔릴-나시르의 형제라고 기록되어 있어 불일치가 발견된다.

 

또한 이 목록의 작성 의도가 단순히 연대기적 정확성보다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내전이나 혼란기에 목록은 단일한 왕실 혈통만을 고수하여 왕위 계승의 경쟁자들을 의도적으로 누락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가장 오래된 왕 목록은 기원전 1800년경 샴시-아다드 1세(Shamshi-Adad I, 기원전 1808년~기원전 1776년) 시대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현재는 그보다 훨씬 후대인 아슈르나시르팔 1세(Ashurnasirpal I, 기원전 1049년~기원전 1031년) 시대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 아시리아 역대 왕 목록(1) : 초창기 아시리아 통치자들

[참고] 아시리아 역대 왕 목록(2) : 고대 아시리아 시대(기원전 2025년~1364년)

[참고] 아시리아 역대 왕 목록(3) : 중기 아시리아 시대(기원전 1363년~934년)

[참고] 아시리아 역대 왕 목록(4) : 신 아시리아 제국(기원전 911년~609년)

 

2. 아시리아 왕들의 칭호 : 신의 총독에서 대제국의 지배자로

 

아시리아 왕들의 칭호는 아카드 제국(Akkadian Empire, 기원전 약 2334년~기원전 2154년) 시대의 경향을 따르면서 점진적으로 발전했다. 초기 아시리아 시대(Old Assyrian period, 기원전 약 2025년~기원전 1364년)의 대부분의 아시리아 왕들은 ‘이쉬아크 아슈르’(Iššiʾak Aššur)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이 칭호는 ‘아수르의 총독’ 또는 ‘아수르의 대리자’로 번역되며, 당시 아시리아인들이 자신들의 주된 신인 아수르(Ashur)를 진정한 왕으로 여겼기 때문에 왕(šar)이라는 칭호 대신 사용했다.

 

그러나 기원전 14세기 아슈르-우발리트 1세(Ashur-uballit I, 재위 기원전 1363~1328년) 시대부터 아시리아 통치자들은 ‘왕’(šar)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시리아가 점차 확장되면서 그들의 왕들은 더욱 거창하고 과장된 칭호들을 추가했다. 여기에는 메소포타미아 전역에 대한 통치권을 주장하는 ‘수메르와 아카드의 왕’(king of Sumer and Akkad), ‘우주의 왕’(king of the Universe), 그리고 ‘세계 사방의 왕’(king of the Four Corners of the World)'과 같은 칭호들이 포함된다.

 

아시리아인들은 자신들의 왕을 신성시하지 않았지만, 왕을 주신 아수르의 대리자이자 지상에서의 수석 대표로 여겼다. 그들의 세계관에서 아시리아는 질서의 장소였고, 아시리아 왕(그리고 아수르 신)이 통치하지 않는 땅은 혼돈과 무질서의 영역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아시리아의 국경을 확장하고 문명화되지 않은 땅에 질서와 문명을 가져오는 것이 왕의 의무로 인식되었다.

 

3. 초창기 아시리아 왕들 : 신화와 역사 사이

 

아시리아 왕 목록에는 푸주르-아슈르 왕조의 첫 번째로 확실하게 알려진 왕들 이전에 긴 통치자들의 계보가 포함되어 있다. 현대 학자들은 이 초기 계보의 적어도 일부가 조작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동시대의 기록에서는 이 이름들이 발견되지 않으며, 가장 초창기 왕들의 이름 중 다수가 운율이 맞아 인위적인 패턴이 의심되기 때문이다.

 

특히 ‘천막에 살던 왕들(Kings who lived in tents)’로 묘사된 가장 초기의 통치자들은, 만약 실제로 존재했다면 아수르를 통치한 것이 아니라 인근 지역의 유목 부족의 수장이었을 수 있다. 수메르 왕 목록(Sumerian King List)에서처럼 일부 이름들은 전임자나 후임자가 아니라 동시대의 경쟁자였을 가능성도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이 이름들이 아시리아와 아무 관련이 없는 아모리(Amorite) 부족-지리적 이름의 혼합이라고 보기도 한다.

 

‘조상이었던 왕들(Kings who were ancestors)’은 다른 출처에서 아수르에 존재했다는 기록이 없으며, 샴시-아다드 1세의 조상을 의미할 수도 있다. 다른 출처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일루-카브카부(Ilu-kabkabu)였다고 하는데, 이들이 아시리아의 왕이 아니라 샴시-아다드의 고향인 테르카(Terqa)의 통치자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 인물들을 왕 목록에 포함시킨 것은 샴시-아다드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으로, 그의 비-아시리아적 기원을 은폐하거나 그의 조상들을 아시리아 왕들의 계보에 편입시키려 한 것일 수 있다.

 

4. 아시리아 왕국의 종말

 

아시리아 왕조는 기원전 609년에 아시리아의 마지막 왕인 아슈르-우발리트 2세(Ashur-uballit II, 재위 기원전 612~609년)가 신바빌로니아 제국(Neo-Babylonian Empire)과 메디아 제국(Median Empire)의 연합군에게 패배하면서 막을 내렸다. 이 패배 이후 아시리아는 독립적인 정치적 단위로서의 존재를 상실하고 다시는 재기하지 못했다.

신아시리아 제국의 최대 영역

 

그러나 아시리아 왕조가 멸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시리아 민족(Assyrian people)은 제국의 몰락 이후에도 살아남아 그들의 독자적인 문화적, 종교적 전통을 지켰다. (이후 기원전 1~3세기에는 기독교화되었다.) 7세기 이후 아수르와 다른 아시리아 도시들은 아케메네스(Achaemenid)와 파르티아 제국(Parthian Empire)과 같은 외세 통치자들 아래에서도 상당한 자치권을 누리기도 했다.

 

5. 아시리아 왕 목록의 역사적 의의

 

아시리아 왕 목록은 고대 근동의 연대기를 재구성하고, 메소포타미아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도구이다. 비록 일부 허점이 존재하더라도, 이 목록은 수천 년 전의 왕조 계승을 추적하고, 특정 시대의 정치적 상황과 문화적 특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아시리아 왕들은 단순한 통치자를 넘어, 강력한 제국의 수호자이자 문명의 확장자로서 그들의 시대를 정의했고, 그 기록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우리에게 고대 세계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