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알렉산데르 1세(Pope Alexander I, AD.?~c.119) : 제6대 교황(AD.c.109~c.119)
- Pope Alexander I
- [Greek : Αλέξανδρος]
- 출생 : 미상 / Rome, Italia, Roman Empire
- 사망 : c.119 / Rome, Italia, Roman Empire
- 재위 : c.109~c.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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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마리아 안티쿠아(Santa Maria Antiqua)에 있는 8세기 교황 알렉산데르 1세의 프레스코화 |
교황 알렉산데르 1세(Pope Alexander I, 라틴어: Alexander I, 이탈리아어: Alessandro I)는 기독교의 여섯 번째 교황으로, 대략 기원후 109년부터 119년까지 교황직을 수행했다. 그는 사후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축일은 5월 3일이다. 그의 재위 기간은 초기 기독교가 로마에서 점차 세력을 확장하고 조직적 기틀을 다지던 중요한 시기에 해당한다. 그의 생애와 사역에 대한 기록은 매우 제한적이며, 상당 부분이 후대의 전승에 의존하고 있어 역사적 사실성을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1. 교황직과 연대기적 불일치
알렉산데르 1세의 정확한 재위 기간과 관련된 기록은 초기 교부들의 저술에서 약간의 불일치를 보인다.
- 교부 에우세비우스(Eusebius, c.260년–c.339년)의 기록에 따르면, 알렉산데르 1세는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Trajan, 재위 98년–117년) 재위 8년에 교황좌에 올라 하드리아누스(Hadrian, 재위 117년–138년) 황제 재위 3년에 순교했다고 전한다.
- 반면 교부 예로니모(Jerome, c.347년–420년)는 알렉산데르 1세가 트라야누스 황제 재위 12년에 교황이 되었다고 증언한다.
이 두 기록은 알렉산데르 1세의 교황직 시작 연도와 총 재위 기간에서 차이를 보인다. 에우세비우스는 그가 10년간 교회를 이끌었다고 하는데, 이는 예로니모의 기록과 상충된다. 이러한 연대기적 불일치는 당시 초기 교회가 체계적인 기록 보존 시스템을 완벽하게 갖추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데르 1세가 트라야누스 및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에 활동한 로마의 주요 교회 지도자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유해의 역사 : 알렉산데르 1세의 유해는 서기 834년 독일 바이에른주(Bavaria) 프라이징(Freising)으로 이장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유해 이장 전승은 중세 시대 성인들의 유해를 중요한 성지로 옮기는 관습의 일부이다.
2. 전승으로 전해지는 주요 사역
알렉산데르 1세에게 귀속되는 많은 이야기들은 후대의 전승에 기반하고 있어, 역사적 진위 여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1) 대규모 개종 전승
후대에 전해지는 전승에 따르면, 하드리아누스 황제 치세에 알렉산데르 1세는 로마 총독 헤르마스(Hermas)와 그의 휘하에 있던 1,500여 명의 주민을 모두 한꺼번에 개종시켰다고 한다. 특히 알렉산데르 1세가 갇힌 감옥의 간수였던 노이스의 퀴리노(Quirinus of Noys)와 그의 딸 발비나(Balbina)도 개종한 무리에 포함되었으며, 이들 부녀는 훗날 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고 한다.
2) 신성한 환시와 순교 전승
알렉산데르 1세는 아기 예수(Infant Jesus)의 환시를 체험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또한 전승에 따르면, 그는 불로 살을 태우는 고문 끝에 참수형을 당하여 순교했다.
그러나 알렉산데르 1세의 순교는 역사적으로 논쟁의 여지가 있다. 초기 문헌에서는 그의 순교 사실이 명확히 언급되지 않거나, 그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이는 초기 교회의 많은 성인들이 순교 전승을 가지고 있으나, 직접적인 역사적 증거는 부족한 경우와 유사하다.
3. 전례 및 행정적 기여 논란
알렉산데르 1세는 로마 교회의 전례와 행정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전승들도 가지고 있으나, 이에 대한 신뢰성 역시 논란이 있다.
1) 미사 경본 삽입 전승
《교황 연대표(Liber Pontificalis)》에 따르면, 알렉산데르 1세는 로마 미사 경본에 성찬 기도 제1양식 축성 직전 기도인 “Qui pridie(예수께서는 수난 전날...)”를 삽입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로마 미사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1907년 《가톨릭 백과사전(Catholic Encyclopedia)》의 성 알렉산데르 1세 항목을 보면, 미국의 가톨릭 신학자 토머스 샤한(Thomas Shahan)은 이 전승을 신뢰성이 없는 것으로 단정했다. 오늘날 가톨릭교회에서도 이 전승을 신뢰하지 않는 입장이다. 《교황 연대표》의 해당 부분은 5세기 후반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교황의 칙령에 따라 교회가 움직이던 초대 교회의 모습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된다.
2) 성수 및 성찬례 관례 도입 전승
기독교에서 악마를 내쫓거나 부정한 것을 정화하는 목적으로 소금과 물을 섞어 만든 성수(Holy Water)를 뿌리는 전통과 성찬례 때 물과 포도주를 섞는 전통은 모두 알렉산데르 1세가 도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이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그렇지만 알렉산데르 1세가 로마 교회의 전례 및 행정의 초기 발전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은 학계에서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이는 비록 특정 전승의 사실 여부는 불분명해도, 그가 초기 교회의 조직화와 전례 확립에 기여했음을 시사한다.
4. 성인으로서의 공경과 이름의 혼란
알렉산데르 1세의 축일은 5월 3일이며, 이는 순교자 성 알렉산데르(Saint Alexander), 성 에벤시오(Saint Eventius), 성 테오둘로(Saint Theodulus)와 함께 기념되는 날이다. 과거 《로마 미사 경본(Roman Missal)》의 일부 판본에서는 5월 3일이 축일로 지정된 성 알렉산데르가 교황 알렉산데르 1세와 동일 인물이라는 표기가 있었다. 그러나 1570년 교황 비오 5세(Pope Pius V, 재위 1566년–1572년)가 공포한 《트리엔트 로마 미사 경본(Tridentine Roman Missal)》에서는 이러한 표기가 사라졌다.
순교자 성 알렉산데르와 성 알렉산데르 1세 교황의 동일시는 그들의 이름이 같다는 점 외에는 아무런 정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혼용되었다. 이러한 혼란은 1960년 교황 요한 23세(Pope John XXIII, 재위 1958년–1963년)에 의해 로마 전례력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는 역사적 연구를 통해 불확실한 전승을 바로잡으려는 교회의 노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5. 결론 : 초대 로마 교회의 발전과 전승 속에 남은 인물
교황 알렉산데르 1세는 로마 교회의 여섯 번째 수장으로서 초대 교회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재위 기간에 대한 정확한 연대는 초기 교부들의 기록에서 약간의 불일치를 보이며, 그에게 귀속되는 많은 전승들(대규모 개종, 신성한 환시, 순교, 특정 전례 관례 도입 등)은 후대에 추가되거나 신뢰성이 부족하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전승들의 존재 자체가 역설적으로 알렉산데르 1세가 초대 기독교에서 얼마나 중요한 인물로 인식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비록 일부 세부 사항은 불확실하더라도, 그가 로마 교회의 조직과 전례가 발전하는 데 기여한 바는 분명하다. 그는 사도 시대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교회의 기반을 다지고, 신앙 공동체를 이끌어 로마에서 기독교가 더욱 견고하게 뿌리내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교황 알렉산데르 1세의 역사는 초기 로마 교회의 복잡한 형성 과정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통찰을 제공하며, 그의 유산은 오늘날까지 가톨릭교회의 기원에 대한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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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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