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근동] 동서양의 교차점, 강력한 기마 민족의 제국 : 파르티아 제국(BC. 247 ~ AD. 224)
1. 헬레니즘과 로마의 틈새에서 피어난 제국 : 파르티아의 서막
고대 이란의 역사는 강력한 제국들의 흥망성쇠로 점철되어 왔다.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제국(Achaemenid Empire)이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er the Great)에 의해 멸망한 후, 광대한 옛 영토는 그의 후계자들, 즉 디아도코이(Diadochi)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그중 이란 고원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셀레우코스 제국(Seleucid Empire)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제국의 지배가 완벽했던 것은 아니었다. 거대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는 것은 쉽지 않았고, 특히 제국 동부 변경 지대는 중앙 정부의 통제가 약했다. 바로 이 틈새를 비집고 새로운 강대국이 등장했으니, 바로 파르티아 제국(Parthian Empire)이었다. '아르사케스 제국(Arsacid Empire)'으로도 알려진 이 나라는 기원전 247년부터 서기 224년까지, 무려 470여 년간 고대 이란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정치적, 문화적 세력이었다.
파르티아 제국은 로마 제국과 한(漢)나라 사이의 실크로드(Silk Road) 무역로 상에 위치하면서 동서양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를 통해 엄청난 부와 영향력을 축적했다. 이들은 셀레우코스 제국과 로마 제국이라는 당대의 거대한 세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고대 근동의 역사를 송두리째 뒤바꿔 놓은 주요 행위자였다.
2. 기마 유목민의 후예, 파르티아의 건국과 확장
파르티아 제국의 역사는 기마 유목민족의 용맹함과 전략적 지혜에서 비롯되었다. 제국의 창건자는 아르사케스 1세(Arsaces I)였다. 그는 중앙아시아 스텝(steppe) 지역에서 온 이란계 유목민 부족인 파르니족(Parni)의 지도자였다. 기원전 247년경, 아르사케스 1세는 파르니족을 이끌고 당시 셀레우코스 제국의 사트라피(province)였던 파르티아 지역을 정복했다. 이 지역은 안드라고라스(Andragoras)라는 총독이 셀레우코스 제국에 반기를 들었던 곳이었다.
아르사케스 1세의 초기 정복 이후, 파르티아 제국의 영토는 점진적으로 확장되었다. 특히 미트리다테스 1세(Mithridates I of Parthia, 재위 기원전 171–132)는 대대적인 정복 활동을 통해 제국의 지도를 크게 넓혔다. 그는 셀레우코스 제국으로부터 메디아(Media)와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를 빼앗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파르티아는 강력한 지역 강국으로 부상하게 되었고, 이란 고원의 새로운 패자가 되었다.
전성기 때 파르티아 제국의 영토는 유프라테스강(Euphrates) 상류(오늘날 터키 중동부)에서부터 현재의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과 파키스탄 서부까지 걸쳐 있었다. 그들의 수도는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크테시폰(Ctesiphon), 엑바타나(Ecbatana), 헤카톰필로스(Hecatompylos), 수사(Susa), 니사(Nisa), 아삭(Asaak), 라게스(Rhages) 등이 주요 중심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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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94년, 파르티아 제국의 최대 판도 — 미트리다테스 2세(재위: 기원전 124–91년) 통치기 |
3. 로마와의 피할 수 없는 대결 : 동서양 패권의 충돌
파르티아 제국은 초기에는 서쪽의 셀레우코스 제국과 북쪽의 스키타이족(Scythians)을 주요 적대 세력으로 두었다. 그러나 제국이 서쪽으로 확장하면서 아르메니아 왕국(Kingdom of Armenia)과도 충돌했고, 결국에는 당대 세계의 양대 패자였던 로마 공화국(Roman Republic), 그리고 이후 로마 제국(Roman Empire)과 피할 수 없는 대결을 펼치게 되었다.
로마와 파르티아는 특히 아르메니아의 지배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었다. 아르메니아는 양대 제국 사이의 완충 지대이자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 카르헤 전투(Battle of Carrhae, 기원전 53) : 로마의 삼두정치 중 한 명이었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가 이끄는 로마군이 파르티아의 기마 궁수들에게 전멸당한 사건은 파르티아의 군사적 우수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전투였다. 이 패배는 로마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고, 로마인들의 동방 진출 야심에 큰 좌절감을 안겼다.
- 레반트 점령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반격 : 기원전 40-39년에는 파르티아 군대가 티레(Tyre)를 제외한 레반트 전역을 로마로부터 점령하기도 했다. 이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k Antony)가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반격에 나서면서 로마와 파르티아는 오랜 전쟁의 역사에 돌입했다.
이후 수세기 동안, 여러 로마 황제들이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하여 셀레우키아(Seleucia)와 크테시폰을 점령하는 등 양대 제국은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이 로마-파르티아 전쟁(Roman–Parthian Wars)은 고대 세계사에서 가장 길고 중요한 국경 전쟁 중 하나였다.
4. 독특한 문화와 불안정한 내부 : 파르티아 제국의 통치
파르티아 제국은 여러 문화적 요소가 혼합된 독특한 사회였다. 공식 언어로는 파르티아어(Parthian language)가 사용되었고, 그리스어(Greek) 또한 공식 언어로서 통용되었다. 아람어(Aramaic)는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로 널리 쓰였다. 종교적으로는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가 지배적이었지만, 바빌로니아 종교와 불교도 존재했다.
파르티아의 통치 형태는 봉건제적 군주제(Feudal monarchy)였다. 그러나 넓은 영토와 다양한 민족을 통치하는 과정에서 중앙 권력은 종종 약화되곤 했다. 특히, 왕좌를 놓고 벌어지는 잦은 내전은 외부의 침략보다 제국의 안정성에 더 큰 위협이 되었다. 왕자들 간의 분쟁과 귀족들의 권력 다툼은 제국의 국력을 소진시켰고, 이는 훗날 제국의 몰락에 큰 영향을 미쳤다.
파르티아의 군사력은 기마 궁수(horse archers)와 중장 기병(cataphracts)이라는 두 가지 핵심 전력을 기반으로 했다. 기마 궁수들은 빠르고 유연한 기동력을 바탕으로 원거리에서 적을 교란했고, 카타프락트라고 불리는 중장 기병대는 철갑옷으로 무장하고 충격력을 극대화하여 적진을 붕괴시키는 데 탁월했다. 로마군조차도 이들의 기마 전술에 여러 번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다.
5. 쇠퇴와 사산조 페르시아의 등장 : 파르티아의 종말
로마와의 끊임없는 전쟁과 제국 내부의 잦은 내전은 파르티아 제국의 국력을 서서히 약화시켰다. 특히 서기 3세기 초에는 로마 황제들의 계속되는 메소포타미아 침공으로 제국의 피해가 누적되었다.
이러한 약화된 상황 속에서 결정적인 몰락은 제국 내부로부터 찾아왔다. 페르시아 남부의 파르스(Pars) 지역 이스타흐르(Istakhr)의 통치자였던 아르다시르 1세(Ardashir I)가 아르사케스 왕조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파르티아의 마지막 통치자였던 아르타바누스 4세(Artabanus IV)를 서기 224년에 살해했다.
아르다시르 1세는 파르티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새롭게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Sasanian Empire)을 건립했다. 사산조는 이후 7세기 이슬람 정복기까지 이란과 근동 지역의 대부분을 지배하며 고대 페르시아의 영광을 다시 한번 재현했다.
비록 파르티아 제국 자체는 사라졌지만, 아르사케스 왕조의 후손들은 아르메니아(Armenia), 캅카스 이베리아(Caucasian Iberia), 캅카스 알바니아(Caucasian Albania) 등지에서 왕가의 명맥을 이어가며 로마와 사산조 사이에서 독자적인 세력으로 존재했다.
6. 파르티아 제국의 유산
파르티아 제국은 고대 세계사에서 독특하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 동서양 문명 교류의 가교 : 실크로드의 핵심 구간을 통제하며 중국의 한나라와 로마 제국 사이의 문화적, 경제적 교류를 가능하게 했다. 이는 다양한 사상, 기술, 예술 양식의 전파에 기여했다.
- 이란 민족의 자존심 : 헬레니즘 세력인 셀레우코스 제국에 대항하여 독자적인 이란계 제국을 세우고 로마 제국과 대등하게 맞섰다는 점에서, 파르티아는 이란 민족에게 깊은 자긍심을 안겨주었다. 이는 훗날 사산조 페르시아의 부흥에도 영향을 미쳤다.
- 군사 전술의 혁신 : 기마 궁수와 중장 기병이라는 파르티아의 군사 전술은 로마를 비롯한 다른 군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고대 전술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 문화적 혼합 : 파르티아 문화는 헬레니즘과 이란 전통의 독특한 혼합을 보여주었다. 예술, 건축,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동서양의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며 발전했다.
파르티아 제국의 역사는 힘, 전략, 그리고 끈기 있는 저항의 기록이다. 그들은 강력한 제국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고, 반세기 가까이 동서양 문명의 거대한 축으로서 기능하며 고대 세계사에 깊은 족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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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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