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3일 수요일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Herennius Etruscus, AD.?~251) : 로마 제국 제30대 공동황제(251)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Herennius Etruscus, AD.?~251) : 로마 제국 제30대 공동황제(251)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 전장에서 막을 내린 공동 황제의 짧은 재위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Herennius Etruscus, ?~251)2515~6월 사이에 아버지 트라야누스 데키우스(Decius, 201~251)와 함께 공동 황제로 선포되어 제국을 통치한 인물이다. 그는 모에시아 인페리오르 아브리투스 인근 전장에서 전사하여 재위가 단절되었고, 이후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가 군대에 의해 즉시 추대되었다는 점에서 3세기 군인 황제기의 권력 작동 방식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기록된다.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Herennius Etruscus, AD.?~251) : 로마 제국 제30대 공동황제(251)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Herennius Etruscus, AD.?~251) : 로마 제국 제30대 공동황제(251)
 

출생ㆍ가계와 칭호의 윤곽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의 아버지는 트라야누스 데키우스, 어머니는 헤레니아 에트루스킬라(Herennia Etruscilla, 생몰년 미상)이다. 그의 즉위명은 임페라토르 카에사르 퀸투스 레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 메시우스 데키우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Quintus Herennius Etruscus Messius Decius Augustus)’이며, 동시대 주화에는 “IMP C Q HER ETR MES DECIO AVG”와 같은 전설이 확인되어 공식 칭호와 선전 문구가 일치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카이사르에서 아우구스투스로, 공동 통치의 개시

 
데키우스는 대외 전선이 긴박해지던 251년에 아들을 공동 황제로 선포하여 지휘와 계승의 연속성을 함께 확보하려 하였다. 이로써 에트루스쿠스는 짧지만 정식 아우구스투스로서 황제 권한을 행사하는 지위에 올랐고, 전장에서의 지휘에도 관여하였다.
 

고트 전쟁과 아브리투스의 매복, 최후의 순간

 
251년 초 데키우스와 에트루스쿠스는 고트족 지도자 크니바(Cniva)를 상대로 반격을 개시하였다. 전황은 한때 유리했으나, 6월 아브리투스 인근 습지대에서 매복에 걸려 대패하였고 두 황제는 모두 전사하였다. 주요 전승은 에트루스쿠스가 너무 과감하게 공격을 밀어붙이다가전사했다고 전하며, 데키우스는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도 전투를 이어가다 함께 전사한 것으로 전한다. 예비대의 미도착이 배신이었는지 단순한 불운이었는지는 확정되지 않았다.
 

사후 정국 수습 : 갈루스의 즉위와 굴욕적 강화

 
양 황제의 전사 직후 남은 병력은 모에시아 총독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를 황제로 추대하였다. 갈루스는 포로와 노획물을 고트족이 보유하도록 허용하는 조건의 평화를 맺어 전선을 봉합하였고, 민심 안정을 위해 헤레니아 에트루스킬라를 아우구스타로 존중하며 황실 일원 호스틸리아누스를 공동 황제로 승격시켰다. 호스틸리아누스는 그해 11월 역병 또는 피살로 사망하였고, 이어 갈루스의 아들 볼루시아누스가 승격되었다.
 

전임ㆍ후임의 표준 배열과 3세기 권력 이동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의 즉위 정보는 표준 배열에서 전임자 필리푸스 아라부스, 후임자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로 요약된다. 공동 황제로서는 데키우스가 병기되며, 재위는 2515~6월로 한정된다. 이 배열은 군단의 추대와 원로원 인준이 교차하던 시기의 빠른 승계 리듬을 간단명료하게 드러낸다.
 

주화ㆍ비문이 전하는 젊은 황제의 초상

 
그의 안토니니아누스 주화 전면에는 즉위명이 약칭으로 새겨지고, 후면에는 군사적 경건·제국의 안정 등 당대 통치 덕목을 상징하는 도상이 배치되었다. 이는 전선의 불확실성과 내외 위기 속에서도 제국의 정상성과 연속성을 시각적으로 설파하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3세기 황제 선전의 전형으로 읽힌다 .
 

평가 : ‘현장 지휘연속성의 정치가 맞닥뜨린 한계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의 재위는 3세기 전반의 구조적 취약을 응축한다. 지휘권의 현장화와 계승 연속성의 제도화가 동시에 시도되었으나, 변방 전선의 정보ㆍ지형ㆍ병참 변수와 군단 정치의 역학이 이를 압도하였다. 그가 남긴 흔적은 독자적 정책이 아니라, 전장에서의 최후와 그 직후의 빠른 승계ㆍ강화가 제국의 회복 탄력성을 어떻게 시험했는지 보여주는 정치사적 증거이다.
 

간단 연표

 
  • 2515~6: 공동 황제로 재위.
  • 2516: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전사.
  • 2516월 이후 :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가 즉위하고, 헤레니아 에트루스킬라와 호스틸리아누스를 통해 정통성 안정을 시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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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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