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Trebonianus Gallus, AD.c.206~253) : 로마 제국 제31대 황제(AD.251~253)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내전과 공동 통치의 경계에 선 황제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Trebonianus Gallus, 약 206~253)는 251년 6월부터 253년 8월까지 로마 제국을 통치한 황제이다. 그는 즉위 내내 공동 통치 형태를 유지하였고, 재위 말에는 윗세대와 아랫세대의 권력 교체가 순식간에 일어나는 3세기 위기의 한가운데서 생을 마감하였다. 전임자는 데키우스(Decius)였고, 후임자는 에밀리아누스(Aemilianus)였다. 이 표준적 배열만으로도 그의 재위가 군단 정치와 원로원 인준이 교차하던 격동의 리듬 위에 놓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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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Trebonianus Gallus, AD.c.206~253) : 로마 제국 제31대 황제(AD.251~253) |
출생ㆍ가계와 기본 프로필
갈루스는 로마 이탈리아권에서 태어난 것으로 전하며, 대략 206년생으로 비정된다. 배우자는 아피니아 게미나 베비아나(Afinia Gemina Baebiana)로 전하고, 자녀로는 볼루시아누스(Volusianus)와 비비아 갈라(Vibia Galla)가 기록된다. 사망은 253년 8월경 이탈리아의 인터람나(오늘날 테르니)에서 발생하였다. 그의 정식 군주명은 Imperator Caesar Gaius Vibius Trebonianus Gallus Augustus로, 주화와 비문에 반복적으로 새겨져 통치의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고정하였다.
즉위의 맥락과 공동 통치의 구도
갈루스는 데키우스가 전장에서 전사한 뒤 251년 6월 황제에 올랐으며, 같은 해 데키우스의 아들 호스틸리아누스(Hostilianus)를 공동 황제로 두었다. 이어 자신의 아들 볼루시아누스(Volusianus)를 251~253년 공동 황제로 격상시켜 부자(父子) 공동 통치 체제를 구축하였다. 이 연속적 공동 통치의 배열은 전선의 불확실성과 승계 안정이라는 두 과제를 동시에 관리하려는 3세기 황제정의 표준 처방을 보여준다.
주화와 메달리온이 전하는 ‘부자 공동 황제’의 이미지
당대 메달리온에는 갈루스와 볼루시아누스가 서로를 향해 선회한 초상으로 함께 새겨져 있으며, 월계관과 갑주·어깨 걸침 장식으로 군주적 상징을 강조한다. 이 도상은 통치 정통성의 언어를 혈통·군사·의전의 프레임으로 묶어 시각화하는 역할을 하였고, 흔들리는 시대에 ‘연속성’과 ‘안정’의 메시지를 대량 유통하는 수단이 되었다.
청동상과 초상 조각, 물질 문화에 남은 흔적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된 3세기 중엽의 대형 청동상은 전통적으로 갈루스를 묘정하는 대표적 사례로 알려져 있다. 또한 피렌체 국립고고학박물관의 청동 두상과 안타키아 박물관의 흉상 일부가 갈루스로 비정되기도 한다. 조각의 양식과 비문·주화의 초상 비교는 ‘군인 황제’기의 심상, 즉 위압적 체구와 직선적 윤곽, 군사적 권위를 강조하는 이미지 전략을 가늠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에밀리아누스의 도전과 253년의 종말
재위 후반, 군은 갈루스에게 불만을 표출하였고 모에시아 방면 장수 에밀리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였다. 갈루스는 갈리아에서 증원군을 이끌고 오던 장차 황제 발레리아누스(Valerian)에게 소집령을 내리는 등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에밀리아누스는 신속히 이탈리아로 진군했고, 발레리아누스가 합류하기 전에 인터람나 부근에서 갈루스를 포착하였다. 이후 전개에 관해서는 사료가 엇갈리는데, 한 전승은 선전에서 패배한 뒤 갈루스와 볼루시아누스를 자군이 살해하였다고 하고, 다른 전승은 전투를 치르기도 전에 군대가 에밀리아누스에게 집단 투항했다고 전한다. 분명한 사실은 부자가 253년 8월에 모두 목숨을 잃으며 정국이 전격 교체되었다는 점이다.
재위 구조와 승계의 리듬이 말해 주는 것들
갈루스-볼루시아누스 공동 통치, 후임 에밀리아누스의 급거 즉위라는 배열은 3세기 전반 제정이 ‘군단의 충성’과 ‘법제의 외피’를 병치하며 유지되었음을 보여준다. 전임자·후임자·공동 황제의 촘촘한 명기, 재위 시기의 월 단위 표준화는 내전적 압력 속에서도 제국이 최소한의 제도 언어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지속했음을 말해 준다. 이러한 구조적 맥락 없이는 갈루스의 짧은 재위를 정확히 평가하기 어렵다.
근위대ㆍ원로원ㆍ군단의 삼중 역학 속 통치
갈루스의 권력 기반은 원로원의 인준, 프라이토리아누스의 기류, 변경 군단의 충성이라는 삼각형 위에 있었다. 그러나 251~253년의 실제 정치는 변경에서의 승·패 소식과 지휘관 인사, 병참과 세수의 압력 같은 변수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결국 에밀리아누스의 봉기는 이 삼각형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을 드러냈고, 갈루스는 제도적 장치를 동원해 방어하려 했으나 군단 정치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였다.
이미지 정치와 ‘정상성’의 연출
갈루스의 청동상ㆍ메달리온ㆍ주화는 통치 메시지를 압축한다. 월계관과 갑주, 마주 보는 부자 초상, 경건ㆍ안정ㆍ풍요의 후면 도상은 ‘무력ㆍ혈통ㆍ의전’의 삼박자를 조형적으로 구현한다. 이 물질 문화의 층위는 그가 비록 짧게 통치했더라도, 황제정이 작동하는 상징 기제를 통해 ‘정상성’을 끊임없이 연출하고자 했음을 증언한다.
간단 연표
- 206년경 : 이탈리아권 출생으로 비정된다.
- 251년 6월 : 데키우스 사후 황제로 즉위한다.
- 251년 : 호스틸리아누스를 공동 황제로 두고, 이어 볼루시아누스를 공동 황제로 격상한다.
- 253년 8월경 : 인터람나 인근에서 피살되거나 군의 이탈로 몰락한다.
- 후임 : 에밀리아누스가 즉각 추대된다.
맺음말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의 재위는 ‘군인 황제’기 초반부의 표본에 가깝다. 그는 공동 통치와 상징 정치를 통해 연속성과 안정의 언어를 유지하려 했으나, 군단 정치의 급류와 야전의 속도를 끝내 돌파하지 못하였다. 그의 최후는 3세기 로마가 합법성ㆍ무력ㆍ상징을 어떻게 조합하며 버텼는지, 그리고 그 조합이 언제 붕괴하는지를 보여주는 응축된 장면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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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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