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4일 목요일

콘스탄티누스 2세(Constantine II, AD.316~340) : 로마 제국 제45대 황제(AD.337~340)

콘스탄티누스 2(Constantine II, AD.316~340) : 로마 제국 제45대 황제(AD.337~340)

 

로마 제국 분할 통치의 서막, 비운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2

  •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콘스탄티누스(Flavius Claudius Constantinus)
  • 출생 : 기원후 316
  • 사망 : 기원후 340
  • 재위 :
    Caesar : 기원후 31731~ 33799
    Augustus : 기원후 33799~ 3404

콘스탄티누스 2세(Constantine II, AD.316~340) : 로마 제국 제45대 황제(AD.337~340)
콘스탄티누스 2세(Constantine II, AD.316~340) : 로마 제국 제45대 황제(AD.337~340)
 

1. 혼돈의 시대 속 태어난 황실의 아이

 
기원후 3세기는 로마 제국에 ‘3세기의 위기라 불리는 극심한 혼란과 변화의 시기였다. 끊임없는 내전과 빈번한 황제 교체, 그리고 제국 안팎의 위협은 로마를 심각한 불안정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러한 혼돈을 잠재우고 제국을 재통일한 위대한 황제 콘스탄티누스 1(Constantine I)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중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1세와 파우스타(Fausta)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이자 제국의 서방 지역을 통치했던 인물이 바로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콘스탄티누스(Flavius Claudius Constantinus), 즉 콘스탄티누스 2(Constantine II, 316~340). 그는 아버지의 위업을 이어받아 제국을 통치했으나, 결국 권력에 대한 야망과 서열 의식으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며 로마 제국의 분열 시대를 가속화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2. 카이사르로의 성장과 황실 교육

 
콘스탄티누스 2세는 316년 갈리아(Gaul)의 아를(Arles)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와 그의 아내 파우스타(Fausta)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1세의 두 번째 아들이었지만, 어머니 파우스타의 첫째 아들이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31731, 그는 아버지에 의해 카이사르(Caesar)’의 지위에 올랐다. 당시 로마 제국은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의 사두정치 체제에서 비롯된 황제들의 분할 통치 개념이 여전히 남아 있었고, 콘스탄티누스 1세는 자신의 아들들을 차기 통치자로 육성하기 위해 일찍이 권한을 부여했다.
 
콘스탄티누스 2세는 어린 시절부터 군사 훈련과 행정 교육을 받으며 황제로서의 자질을 길렀다. 그는 320, 321, 324, 그리고 329년에 걸쳐 네 번이나 콘술(Consul)’ 직을 수행하며 중요한 국정 경험을 쌓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사르마티아족(Sarmatians), 알라마니족(Alamanni), 고트족(Goths)을 상대로 한 군사적 승리에 이름을 올리며 군사적 역량 또한 인정받았다. 그는 특히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깊이 의지하며 많은 조언을 받았다고 한다.
 

3. 아버지의 죽음과 계승의 피바람

 
3375, 콘스탄티누스 1세가 사망하면서 로마 제국은 다시 한번 혼란에 빠졌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제국을 자신의 아들들인 콘스탄티누스 2, 콘스탄티우스 2(Constantius II), 콘스탄스(Constans)와 사촌들인 달마티우스(Dalmatius), 한니발리아누스(Hannibalianus) 등과 함께 공유하도록 계획했지만, 이러한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콘스탄티누스 2세와 그의 동생들은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 결과, 콘스탄티누스 1세의 남성 친족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이 일어났다. 달마티우스와 한니발리아누스 등 잠재적인 경쟁자들이 콘스탄티우스 2세의 지시에 의해 살해되었다. 비록 콘스탄티누스 2세가 이 학살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는지에 대한 증거는 불분명하지만, 동전 분석을 통해 그와 동생들이 이 계승 경쟁자들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공동 대응에 합의했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결국 콘스탄티누스 2세는 두 동생인 콘스탄티우스 2, 콘스탄스와 함께 제국의 황제로 등극했다. 그는 갈리아(Gaul), 히스파니아(Hispania), 브리타니아(Britain)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고, 콘스탄티우스 2세는 동방, 콘스탄스는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포함하는 중부 지역을 맡았다.
 

4. 장자의 권리 주장과 동생과의 갈등

 
콘스탄티누스 2세는 장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의 모든 유산을 이어받을 정당한 계승자라고 생각했으며, 동생들보다 더 우월한 지위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막내 동생인 콘스탄스에게 자신의 장자권(primogeniture)을 강요하려 했다. 이는 사두정치의 개념과는 거리가 먼 태도였으며, 제국을 공동으로 통치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의도와도 상충되는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 2세의 이러한 장자권 주장은 두 형제 사이에 긴장을 유발했다. 그는 337년에 추방된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주교가 콘스탄티우스 2세의 통제 아래 있는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로 돌아갈 수 있도록 명령을 내리며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기도 했다. 그의 동기는 불분명하지만, 아마도 콘스탄티우스 2세의 통치에 문제를 일으키고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이미 권력을 놓고 대립하던 형제들 사이의 불화를 더욱 심화시켰다.
 

5. 비극적인 이탈리아 침공과 최후

 
결국 콘스탄티누스 2세의 권력에 대한 야망과 동생 콘스탄스와의 갈등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340, 콘스탄티누스 2세는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스의 통치 영역인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그의 정확한 동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아마도 콘스탄스에게서 이탈리아 북부 지역을 빼앗고 자신의 권위를 확고히 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이탈리아 침공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3404, 그는 아퀼레이아(Aquileia) 근처에서 콘스탄스의 매복 공격에 걸려들어 전사했다. 그의 나이 불과 23세 또는 24세였다. 이로써 콘스탄티누스 2세는 자신이 가진 장자권을 주장하려다 오히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6. 기억 말살과 남겨진 유산

 
콘스탄티누스 2세가 죽자, 그의 영역이었던 갈리아, 히스파니아, 브리타니아는 모두 동생 콘스탄스의 지배하에 놓였다. 콘스탄스는 로마 제국 서방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2세는 로마 시대의 극형인 기억 말살형(damnatio memoriae)’을 당했다. 이는 반역자로 낙인찍힌 인물의 이름과 모든 기록을 역사에서 지우는 조치였다.
 
콘스탄티누스 2세의 죽음은 로마 제국의 분할 통치 체제를 더욱 단순화시켰다. 두 명의 아우구스투스 체제로 재편되면서 형제들 간의 권력 다툼은 계속되었지만, 그의 죽음은 형제 간의 화합을 강조했던 아버지의 이상이 결국 얼마나 불안정했는지를 보여주었다. 콘스탄티누스 2세는 위대한 아버지의 후광 아래 군사적 업적을 쌓았으나, 권력에 대한 야망과 장자권에 대한 맹신으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인물로 로마 역사에 기록된다. 그의 짧은 통치는 콘스탄티누스 왕조 내부의 갈등이 어떻게 제국의 안정에 위협이 되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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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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