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근동] 칼데아 왕조(신바빌로니아 제국)의 흥망성쇠 : 기원전 626~539년
1. 폐허를 딛고 일어서다 : 칼데아 왕조의 탄생 배경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심장, 바빌론은 한때 강력했던 아시리아 제국(Neo-Assyrian Empire)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다. 특히 기원전 732년부터 시작된 아시리아 왕들의 직접 통치 시대는 바빌론에게 굴욕의 시기였다. 센나케리브(Sennacherib, 재위 기원전 705–681)가 바빌론을 파괴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기도 했지만, 아들 에살하돈(Esarhaddon, 재위 기원전 681–669)이 바빌론을 재건하는 등 아시리아의 정책은 강압과 유화를 오갔다. 그러나 아시리아의 지배는 바빌론인들의 독립 열망을 잠재우지 못했다.
기원전 7세기 후반, 아시리아 제국은 내분과 주변국들의 압력으로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강력한 왕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재위 기원전 669–627)이 사망하자 제국은 급격한 혼란에 빠졌다. 이 혼돈의 틈을 타 바빌론에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으니, 바로 나보폴라사르(Nabopolassar, 재위 기원전 626–605)였다. 그는 '칼데아(Chaldea)'라는 남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기반을 둔 세력이었는데, 바빌로니아의 독립을 주장하며 아시리아에 대한 반란을 주도했다. 기원전 626년, 나보폴라사르는 마침내 바빌론의 독립을 선언하고 '칼데아 왕조', 즉 '신바빌로니아 제국(Neo-Babylonian Empire)'을 수립했다. 이로써 바빌론은 수십 년간의 아시리아 지배에서 벗어나 다시 한번 고대 근동의 패권을 잡게 된다.
'칼데아 왕조'라는 명칭은 창건자인 나보폴라사르가 칼데아 출신이라는 가정에서 유래했지만, 사실 그의 정확한 민족적 기원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다. 일부 현대 역사학자들은 그를 바빌론인이나 아시리아인으로 보기도 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데아 왕조'라는 이름은 이 시기의 바빌론을 상징하는 중요한 역사적 용어가 되었다.
2. 영광의 시대 : 나보폴라사르와 네부카드네자르 2세
나보폴라사르(Nabopolassar, 재위 기원전 626–605)는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기틀을 다진 위대한 통치자였다. 그는 바빌론을 독립시킨 후, 아시리아의 오랜 숙적이던 메디아(Media)와 동맹을 맺고 아시리아 제국을 최종적으로 무너뜨리는 데 주력했다. 기원전 612년, 나보폴라사르와 메디아군은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Nineveh)를 함락시키며 아시리아의 상징적인 힘을 완전히 파괴했다. 이는 고대 근동 역사의 거대한 전환점이었고, 아시리아는 더 이상 강대국으로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나보폴라사르는 또한 이집트(Egypt)와 다른 주변 세력들의 침략에 맞서 바빌론의 국경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Nebuchadnezzar II, 재위 기원전 605–562)는 나보폴라사르의 아들이자 칼데아 왕조의 가장 유명한 왕이었다. 그의 통치기는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최전성기였다고 평가된다. 그는 아버지의 정복 사업을 이어받아 이집트와 레반트(Levant) 지역을 성공적으로 장악하며 제국의 영토를 확장했다. 특히 유다 왕국(Kingdom of Judah)을 정복하고 예루살렘(Jerusalem)을 함락시킨 사건(기원전 586년)은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수많은 유대인들을 바빌론으로 끌고 간 '바빌론 유수(Babylonian captivity)'로 유명하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군사적 업적 외에도 바빌론을 고대 세계에서 가장 웅장하고 아름다운 도시로 재건했다. 그는 바빌론의 수도 성벽을 강화하고, 마르둑(Marduk) 신의 대형 지구라트인 '에테멘앙키(Etemenanki)'와 마르둑 신전인 '에사가일라(Esagila)'를 복원했다. 전설적인 '바빌론의 공중 정원(Hanging Gardens of Babylon)'도 그가 자신의 아내를 위해 건설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물론 그 존재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있지만). 또한, 수많은 신전과 궁전, 운하와 도로를 건설하며 제국의 위용을 과시했다. 이 시기의 바빌론은 고대 근동의 정치, 경제, 문화, 종교의 중심지였다. 그의 통치 아래 바빌론은 황금기를 구가하며 옛 영광을 되찾는 것을 넘어 더욱 발전된 문명을 이룩했다.
![]() |
기원전 6세기경 신바빌로니아 제국(붉은색)과 인접 국가들의 대략적인 국경선 |
3. 피와 결혼으로 얽힌 왕위 계승의 복잡성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강력한 통치 이후, 칼데아 왕조의 왕위 계승은 매우 복잡하고 불안정하게 흘러갔다.
- 아멜-마르둑(Amēl-Marduk, 재위 기원전 562–560) :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아들로 왕위를 계승했다. 하지만 그는 2년 만에 너리글리사르에게 폐위당하고 살해되었다.
- 네리글리사르(Neriglissar, 재위 기원전 560–556) : 그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사위이자 아멜-마르둑의 처남으로 알려져 있다. 즉, 혈통적으로는 나보폴라사르의 직계 후손이 아니었지만, 결혼을 통해 왕가와 연결되었다고 추정한다.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아멜-마르둑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다. 이 사건으로 칼데아 왕조의 직계 혈통 통치는 중단되었다.
- 라바시-마르둑(Labashi-Marduk, 재위 기원전 556) : 네리글리사르의 아들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몇 달 만에 궁정 신하들에 의해 폐위되고 살해당했다. 그가 왕가 혈통(어머니를 통해)을 다시 왕위에 앉히려 했을 가능성도 있다.
- 나보니두스(Nabonidus, 재위 기원전 556–539) : 라바시-마르둑을 폐위시킨 쿠데타의 주역 중 한 명으로, 왕위에 오른 마지막 신바빌로니아 왕이다. 그는 칼데아 왕가와 혈통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었지만, 네리글리사르처럼 결혼을 통해 왕실과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딸과 결혼했을 수도 있다고 한다. 이는 그의 아들 벨샤자르(Belshazzar)가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후손으로 언급되는 후대 전승을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이다. 나보니두스는 독특한 인물이었다. 그는 전통적인 마르둑 신앙보다 달의 신 신(Sîn) 숭배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이로 인해 그는 바빌론의 마르둑 사제들과 귀족들로부터 반감을 사기도 했다. 그는 아라비아의 테이마(Tayma)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고, 그동안 아들 벨샤자르가 바빌론을 대리 통치했다. 이러한 나보니두스의 행보는 제국의 안정성을 더욱 약화시켰다.
4. 제국의 몰락 : 키루스 대제와 바빌론의 최후
나보니두스의 통치 말기, 바빌로니아는 새로운 위협에 직면했다. 동쪽에서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제국(Achaemenid Empire)을 이끄는 키루스 2세, 즉 키루스 대제(Cyrus the Great, 재위 기원전 559–530)가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키루스 대제는 메디아와 리디아(Lydia)를 정복하며 고대 근동의 새로운 패자로 떠올랐다.
기원전 539년, 키루스 대제는 마침내 바빌로니아를 침공했다. 바빌론의 군대는 옵피스 전투(Battle of Opis)에서 페르시아군에게 패했고, 나보니두스 왕은 전투에서 도주했다. 페르시아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바빌론 시내로 진입했다. 유명한 벨샤자르의 연회(Belshazzar's Feast)는 이때의 혼란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바빌론은 너무나 쉽게 함락되었고, 이는 나보니두스에 대한 백성들과 마르둑 사제들의 불만이 상당했음을 시사한다.
키루스 대제는 바빌론을 정복한 후, 포로로 잡혀왔던 유대인들을 포함한 여러 민족의 본국 귀환을 허용하고, 파괴되었던 신전들을 복원하는 등 관용 정책을 펼쳤다. 그는 자신을 바빌론의 정통 왕임을 선포하며 바빌론인들의 지지를 얻으려 노력했다. 이로써 약 87년간 지속되었던 칼데아 왕조(신바빌로니아 제국)는 막을 내리고, 바빌론은 아케메네스 제국의 한 주(州)가 되었다. 칼데아 왕조의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와 그의 아들 벨샤자르의 최후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5. 칼데아 왕조의 유산과 역사적 의미
칼데아 왕조(신바빌로니아 제국)는 비록 그 수명이 길지는 않았지만, 고대 근동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바빌론 문명의 최후의 영광 : 이 왕조는 수천 년간 이어진 메소포타미아 문명, 특히 바빌론 문명의 최후의 전성기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의해 재건된 바빌론은 그 웅장함과 아름다움으로 고대 세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시기의 건축, 예술, 천문학, 문학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 메소포타미아 패권의 전환 : 칼데아 왕조는 아시리아 제국의 몰락을 확정 짓고, 잠시 동안이나마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을 다시 바빌론으로 가져왔다. 이는 고대 근동 세계의 정치 지형을 크게 변화시켰다.
- 다양한 역사 기록과의 연결 : 바빌론 유수를 통해 유대 민족사와 깊이 연관되어 구약성경에도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하며, 헤로도토스와 같은 고대 그리스 역사가들에게도 언급되는 등 다양한 문화권의 기록에 등장한다. 이는 칼데아 왕조가 당시의 국제 사회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졌는지를 보여준다.
- 왕조의 복잡한 계승 문제 : 나보폴라사르의 혈통이 너리글리사르와 나보니두스에 의해 중단되고, 결혼을 통한 왕위 계승 시도가 반복된 점은 말기 칼데아 왕조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을 반영한다. 이러한 내부의 갈등과 정통성 문제는 제국 멸망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칼데아 왕조는 아시리아의 그늘에서 벗어나 바빌론의 영광을 되찾고 잠시 동안이나마 세계의 중심에 섰던 위대한 시기였다. 그들의 짧고도 강렬한 역사는 고대 세계의 변화무쌍함과 문명의 부침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교훈으로 남아있다.
=-=-=-=-=-=-=-=-=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