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비누스(Balbinus, AD.c.178~238) : 로마 제국 제27대 공동황제(AD.238)
로마 공동 황제 발비누스, ‘여섯 황제의 해’의 짧고도 결정적인 3개월
발비누스(Balbinus, 약 178~238)는 238년 이른바 ‘여섯 황제의 해’에 원로원이 지명한 공동 황제로 즉위하여 푸피에누스(Pupienus, 약 164~238)와 함께 제정을 수습하려 한 인물이다. 그의 재위는 대략 4~5월부터 7~8월까지 약 석 달간 지속되었고, 전임으로는 아프리카에서 등장한 고르디아누스 부자, 후임으로는 소년 황제 고르디아누스 3세가 이어졌다. 이 짧은 구간은 병영 권력과 원로원 정치가 정면으로 충돌한 전환기의 핵심 장면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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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비누스(Balbinus, AD.c.178~238) : 로마 제국 제27대 공동황제(AD.238) |
출신과 이름, 정체성의 단서
발비누스의 정식 군주명은 Imperator Caesar Decimus Caelius Calvinus Balbinus Pius Augustus로 전하고, 출생 시기는 대략 178년으로 비정된다. 그는 238년 7~8월 무렵 로마에서 생을 마감하였으며, 공동 통치의 상대였던 푸피에누스와 더불어 원로원이 지명한 ‘시민적 황제’의 얼굴로 기록되었다. 동일 해에 경쟁ㆍ교체가 연쇄적으로 전개된 사실 자체가 시대의 불안정성을 웅변한다.
즉위의 맥락, ‘여섯 황제의 해’라는 무대
발비누스의 재위는 238년의 구조 속에서 이해될 때 선명해진다. 그 해의 황제 열거에는 막시미누스 트락스, 고르디아누스 1ㆍ2세, 발비누스ㆍ푸피에누스, 고르디아누스 3세가 포함되어 있으며, 발비누스는 이 연쇄 가운데 원로원 지명의 공동 황제로 배치된다. 선임자와 후임자의 배열이 보여 주듯, 그의 통치는 병영의 무력과 원로원의 합의가 서로 다른 합법성을 내세워 다투던 과도기의 산물이었다.
‘문민 대 군인’ 구도와 실제의 간극
공동 통치의 서술 전통에서 발비누스는 흔히 문민적 성격으로, 푸피에누스는 군사적 성격으로 대비되어 설명된다. 그러나 발비누스의 석관 부조에는 전투 복장을 갖춘 모습이 새겨져 있어, 이러한 단선적 이분법에 의문을 던진다. 상징과 이미지의 층위를 교차하면, 그는 단지 ‘비군사적’ 군주로 환원되기 어려운 복합적 얼굴을 지닌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
재위의 외피, 연호ㆍ직함ㆍ의전의 복원
발비누스의 재위는 원수정의 형식적 장치들—공동 통치 명기, 원로원 추인, 공식 칭호 사용—을 통해 합법성의 외피를 복원하려는 시도로 구성되었다. 그의 ‘재위 시기’ 표기는 사료상 April/May–July/August 238로 정리되고, 동시에 푸피에누스와의 ‘Co-emperor’ 표기가 병기된다. 이 표준화된 표기는 당대의 격랑 속에서도 제정의 의전과 명명 질서가 살아 있었음을 말해 준다.
전임 경력의 흔적, 집정관과 공직 연륜
발비누스는 213년에 카라칼라(Caracalla, 188~217)와 함께 집정관을 지낸 경력이 확인된다. 고위 공직의 연륜은 그가 원로원 평판과 행정적 지식을 갖춘 인물이었다는 정황을 보강한다. 이러한 경력 기록은 ‘전투 지휘’보다 ‘국가 운영’의 언어로 공동 정권을 설계하려 했던 그의 면모와도 상응한다.
경쟁자와 환경, 막시미누스 트락스의 존재
발비누스ㆍ푸피에누스 공동 정권의 초점은 막시미누스 트락스(Maximinus Thrax, 약 173~238)와의 대치에 놓여 있었다. ‘Rival’ 항목에 막시미누스가 6월까지로 명기되는 사실은, 공동 정권의 과제와 시간표가 이 군사 정권과의 충돌ㆍ봉합에 맞춰졌음을 시사한다. 병영 권력의 압박과 수도의 불안은 통치의 공간을 좁혔고, 단기간에 결과를 내야 하는 정치적 압력을 증폭시켰다.
화폐와 이미지, 통치 메시지의 시각화
발비누스의 세스테르티우스에는 “IMP. CAES. D. CAEL. BALBINVS AVG.”라는 전설이 새겨져 유통되었다. 주화의 전설과 초상은 정체성과 권위의 압축 표현이었고, 교란된 질서 속에서 ‘정상화’와 ‘연속성’을 시각적으로 설파하는 매체로 기능하였다. 오늘날 전해지는 대리석 두상과 조각은 동일한 메시지를 조형 언어로 중첩한다.
계보와 연속, 238년의 정치적 연결망
발비누스의 위치는 계보ㆍ연표 도식에서도 명확히 좌표화된다. 전임자에는 고르디아누스 1ㆍ2세가, 공동 황제 항목에는 푸피에누스가, 후임자에는 고르디아누스 3세가 각각 기입되어 있다. 이러한 표준 도식은 ‘여섯 황제의 해’가 하나의 내전이 아니라, 여러 합법성이 동시에 작동하며 빠르게 조합을 바꾸어 간 정치적 연속이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말년과 최후, 기록되는 것은 ‘종결’의 사실
발비누스의 사망 시점은 238년 7~8월, 장소는 로마로 정리된다. 전승은 그가 공동 황제와 더불어 도성의 혼란과 근위대의 이탈 속에서 통치를 마감했다고 전하나, 핵심 사실은 ‘공동 통치의 종료’와 ‘후임 정권의 수립’이라는 결과에 모아진다. 그의 통치가 남긴 흔적은, 무엇보다 원로원 지명 공동 정권이라는 실험의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증언하는 결산이다.
종합적 의미, 합의 정치의 짧은 실험
발비누스의 3개월은 병영이 독점한 권력 공간에 원로원이 다시 개입한 드문 시기였다. ‘문민과 군인’이라는 상징적 대비를 넘어서, 그는 의전ㆍ법제ㆍ화폐ㆍ이미지라는 제정의 평범한 기술을 회복하려 하였다. 결과는 짧았으나, 그 시도는 이후 고르디아누스 3세로 이어지는 합의의 잔불을 남겼고, ‘무력과 절차’의 균형이 붕괴할 때 로마 정치가 얼마나 취약해지는지를 또렷이 보여 주었다.
연표로 보는 발비누스
- 178년경 : 출생.
- 213년 : 카라칼라와 함께 집정관을 역임하다.
- 238년 4/5월 : 푸피에누스와 공동 황제로 즉위하다.
- 238년 6월 : 경쟁자로 기록된 막시미누스 트락스와의 대치가 종결 국면에 들어가다.
- 238년 7/8월 : 로마에서 생을 마감하고, 고르디아누스 3세가 후임으로 기록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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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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