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풍 목사(1865-1942) 연대기 정리
- 1868년 1월 21일 평양 순영리에서 출생하다.
- 1891년 평양부 영문의 아전 혹은 포졸로 취직(결혼하였을 가능성)하다.
- 1894년 마포삼열 목사에게 돌을 던져 턱을 깨뜨리다(5월).
- 1895년 청일전쟁 때 원산으로 피신하였다가 스왈른 선교사를 통하여 예수를 알다(9월).
- 1896년 스왈른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원산, 함흥 등지에서 권서인과 조사 일을 하다
- 1899년 평양으로 철수하여 황해도, 충청도 지역 조사를 맡다.
- 1901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장로로 임직하다.
- 1902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다. 큰아들을 낳았으나 아내가 죽다.
- 1903년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윤함애 씨와 결혼하다.
- 1907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회 독노회에서 목사임직을 받다.
- 1907년 9월 17일 제주선교사로 파견되다.
- 1908년 제주도를 향하여 출발하다(2월 중순경). 길상(吉祥1丸 : 깃쇼마루)호를 타고 2월말경 산지포에 도착하다.
- 1908년 많은 어려움을 겪다가 김재원, 홍순홍, 김홍련 등을 만나 향교골에서 기도회를 가지다. 6월, 남녀 소학교를 시작하다(조봉호 등 교사로 참여하다).
- 1909년 성내 일도리 중인물 안에 6칸 초가를 구입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다.
- 1910년 박영효 대감의 지원으로 출신청을 구입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다.
- 1912년 교회당 6칸을 증축하다(12월)
- 1913년 건강 악화로 6개월 동안 휴식하다(평양 등지에서). 자녀가 3명이었다.
- 1915년 성음부족증으로 광주군 효천면 지한리(현 광주시 방림동)에서 휴양하다.
- 1916년 제주도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제6회 전라노회에서 광주 북문안교회 초대목사로 청빙을 허락받다(8월). 전라노회 부노회장에 피선되다.
- 1918년 건강이 악화되어 또다시 휴직하다.
- 1919년 건강이 회복되다(9월경). 광주 제중원 전도목사로 일하다.
- 1920년 순천읍교회로 부임하다(3월). 부총회장으로 피선되다(이후 순천중앙교회로 교회 명칭 변경하다).
- 1921년 총회장으로 피선되다(9월).
- 1923년 성역 25주년 기념예배를 드리다(4월 26일). 막내딸 이사례를 낳다.
- 1924년 고흥읍교회로 부임하다(1월).
- 1927년 제주성내교회로 재부임하다(2월).
- 1928년 회갑 기념예배를 드리다(11월).
- 1930년 제주노회 초대 노회장에 피선되다(11월).
- 1931년 벌교읍교회로 부임하다(5월).
- 1933년 순천노회장에 피선되다(6월).
- 1938년 여천군 우학리교회로 부임하다(1월).
- 1940년 총회에서 최초의 원로목사로 추대되다(9월).
- 1940년 11월 15일 신사참배 불응으로 순천노회 목사 17명과 함께 광주형무소에 수감되다.
- 1942년 4월 초 병보석으로 출감한 후 1942년 6월 20일 여천군 남면 우학리교회에서 사망하다. 양아들 박재수 장로(여수중앙교회)가 장례를 주관하다.
김수진, 차종순, 정성한, 임희국, 탁지일, 『장로교 최초 목사 7인 리더쉽』, 쿰란출판사, 2010, 118-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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