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16일 수요일

[간추린 교회사] 제5장. 중세 후기

5. 중세 후기

 

성장하는 부르주아는 여러 나라의 군주제의 협력자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봉건체제는 끝나고 근대국가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국가주의 그 자체는 곧 교회 일치에 장애가 되었다. 이 시대의 중요한 기간 동안에 프랑스와 영국은 백년 전쟁을 벌였고, 대부분의 다른 유럽 국가들도 또한 그 전쟁에 관여했다. 이 시대는 또한 페스트 전염병의 때였다. 이 전염병으로 인해 유럽의 인구가 상당히 감소되었으며 그리하여 인구통계학이나 경제학상에 대변동이 일어났다.

 

교황권의 몰락은 분명히 그리고 빠르게 진행되었다. 첫째 프랑스의 보호와 통제를 받게 되었다. 교황청은 로마에서 프랑스 접경 지역에 있는 아비뇽(1309-1377)으로 이동되었다.

 

그 후 서방교회의 대분열”(1378-1423)이 왔으며, 이 때 두명의 교황(때로는 세 명의 교황)이 동시에 나타나서 서로 성 베드로의 후계자임을 주장했다.

 

이러한 분열을 극복하고 아울러 교회를 개혁하기 위한 공의회 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이 운동의 바램은 전체 교회의 공의회가 진정한 교황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공의회 운동으로 분열은 끝나고, 모든 사람이 단 한 사람의 교황에 대해 합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후 공의회 자체가 분열되었고, 그 결과 이제 교황은 하나지만 공의회는 둘이 되었다.

 

곧 이어 교황들은 르네상스 정신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교황들은 교회의 영적인 생활에 관한 것보다는 로마의 재건과 아름다운 궁전과 다른 이탈리아의 세력들과 전쟁을 하는 데 더 관심을 두었다.

 

교황권처럼 스콜라의 신학-, 대학에서 행한 신학-도 또한 위기를 맞이했다. 더욱 애매한 특성과 전문화한 어휘에 근거한 스콜라의 신학은 기독교인들의 일상생활과는 관계가 더욱 멀어졌으며, 오직 신학자들에게만 관심있는 주제들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반응으로 몇 가지 개혁 운동들이 있었다. 위클리프와 후스와 사보나롤라 같은 사람들이 이러한 개혁 운동을 이끌었다.

 

어떤 다른 사람들은 교회의 개혁이 새로운 학문의 결과로서 나타날 것을 바랬다.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전체적으로 교회를 개혁하려 하기보다는 신비주의에서 그들의 안식처를 찾았다. 이 신비주의를 통해 그들은 영적인 생활을 계발하였고, 부패하여 개혁이 불가능한 교회와는 상관할 필요가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였다.

 

한편 비잔틴 제국은 더욱 쇠약해졌으며 마침내 터키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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