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황오제(三皇五帝)는 중국의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제왕들이다. 사료에 따라 삼황오제의 이름은 조금씩 다르다.
삼황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아래와 같이 7종의 설이 있다.
-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 : 《사기(史記)》 〈보삼황본기(補三皇本紀)〉에 인용된 《하도(河圖)》, 《삼오력(三五曆)》
- 천황, 지황, 태황(泰皇) : 《사기》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 복희(伏羲), 여와(女媧), 신농(神農) : 《풍속통의(風俗通義)》 〈황패편(皇覇篇)〉
- 복희, 신농, 공공(共工) : 《통감외기(通鑒外紀)》
- 복희, 신농, 축융(祝融) : 《백호통(白虎通)》
- 수인(燧人), 복희, 신농 : 《풍속통의》 〈황패편〉에 인용된 《예위(禮緯)》 〈함문가(含文嘉)〉
- 복희, 신농, 황제(黃帝) : 《십팔사략》, 《제왕세기(帝王世紀)》와 손씨주(孫氏注) 《세본(世本)》
십팔사략에 나온 삼황
십팔사략에서의 삼황은 태호 복희, 염제 신농, 황제 헌원을 말한다. 삼황은 맨 처음 세 명의 왕도 아니고, 연속적인 세 명의 왕이 아니다. 그들은 각각 인류 문명에 필요한 획기적인 발명을 통해 후세에 큰 모범이 되었기에 “삼황”(三皇)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삼황의 첫 째인 복희는 태호(太昊 : 큰 하늘)라 불렸으며, 뱀 몸에 사람 머리를 하고 있으며,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사냥법과 불을 활용하는 법을 가르쳤다.
복희의 뒤를 이어 몇 명의 왕이 자리를 잇다가, 두 번째 삼황인 신농의 시대가 왔다. 염제(炎帝 : 불꽃 임금)라고도 불린 신농은 사람 몸에 소의 머리를 가졌다. 그는 태양신이자 농업신으로 농경을 처음으로 가르쳤다. 또한, 태양이 높게 떠 있는 시간에는 사람들에게 상업을 가르쳤다고 한다.
염제 신농의 자리를 이은 것이 바로 황제 헌원(軒轅)이다. 헌원은 사람들에게 집짓는 법과 옷 짜는 법을 가르쳤으며, 수레를 발명했다. 글자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해 천문과 역산을 시작하고, 의료술을 시작한 것도 황제였다. 어느 정도 사람들의 삶이 안정되자 황제는 태산(泰山)에 행차하여 천지 사방의 신을 모두 불러 모았다. 황제는 큰 코끼리가 끄는 보물로 된 수레를 탔으며, 황제의 위세를 본 신들은 그의 위력에 모두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천지 사방의 신 중, 황제에 따르지 않는 무리는 치우(蚩尤)를 따라 반란을 꾀했다. 치우는 눈이 넷, 손이 여섯이었으며,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가지고 있었다. 쇠와 돌을 즐겨 먹는 신으로 자신의 72명의 형제와 함께 싸움에 매우 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황제는 치우의 모반을 알자마자 군사를 모아 판천과 탁록에서 치우를 격파하였다. 치우는 부하인 풍백, 우사와 함께 저항했으나 결국 황제에게 항복했다.
치우의 난을 평정한 황제는 이후 별 탈 없이 지내다가 백 살 되던 때, 하늘에서 용이 내려와 황제가 하늘로 돌아가기를 간청했다. 많은 사람이 황제의 치세가 계속되기를 기원했지만, 황제는 중신들과 함께 용을 타고 승천하였고, 이후 황제의 다섯 자손(“오제”)이 세상을 다스렸다.
오제에 대해서는 일치하는 설이 없으며 주로 다섯가지로 요약된다.
-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 당요(唐堯), 우순(虞舜) : 《황왕대기(皇王大紀)》
- 황제(黃帝), 전욱(顓頊), 제곡(帝嚳), 당요(唐堯), 우순(虞舜) : 《세본(世本)》, 《대대례(大戴禮)》, 《사기》 〈오제본기〉
- 태고(太皋: 복희), 염제(炎帝), 황제(黃帝), 소고(少皋), 전욱(顓頊) : 《예기(禮記)》 〈월령(月令)〉
- 황제(黃帝), 소고(少皋), 제곡(帝嚳), 제지(帝摯), 제요(帝堯) : 《도장(道藏)》 〈동신부(同紳部)·보록류(譜錄類)·곤원성기(混元聖記)〉에 인용된 양무제(梁武帝)의 말
- 소호(少昊), 전욱(顓頊), 고신(高辛), 당요(唐堯), 우순(虞舜) : 《상서서(尙書序)》, 《제왕세기》, 《십팔사략》
십팔사략에 나온 오제
십팔사략에서 오제는 황제의 뒤를 이은 다섯 자손을 뜻하며, 소호 금천, 전욱 고양, 제곡 고신, 제요 도당, 제순 유우의 다섯 명이다. 뒤의 두 명을 따로 떼어 '성군'을 칭송할 때 관용적으로 쓰이는 요순임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호 금천(少昊 金天)은 황제의 아들로 황제가 승천한 후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후 봉황이 날아들어 소호의 정치를 도왔다.
소호의 뒤를 이은 것은 전욱 고양(顓頊 高陽)으로, 전욱은 소호의 형의 아들이었다. 아직 반고의 천지 창조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하늘과 땅의 구별이 엄격하지 않았다. 전욱은 엄격한 법을 세워 하늘과 땅의 구별을 확실히 하고, 인간 세상에서도 주종관계, 남녀관계 등을 확실히 세웠다.
전욱의 뒤를 이은 것은 소호의 아들인 제곡 고신(帝嚳 高辛)이었다. 그는 음악의 신으로, 각종 악기와 음악을 만들어 백성들을 즐겁게 하였다.
제요와 제순에 관해서는 요와 순을 참조하라.
삼황오제의 동이설
삼황오제는 중국 신화 속의 대표적인 인물이지만, 이들을 동이(東夷)나 한민족으로 간주하는 주장이 있다. 삼황오제가 동이였다는 중국의 사료들이 일부 존재하며[“동이는 은나라 사람과 동족이며, 그 신화 역시 근원이 같다. 태호(복희씨를 말함), 제준(帝俊), 제곡(帝嚳), 제순(帝舜), 소호(少昊) 그리고 설(契) (은나라를 세운 탕임금의 선조) 등이 같다고 하는 것은 근래의 사람들이 이미 명확히 증명하는 바다.” -고사변(古史辯)-], 동이라는 존재를 모두 한민족으로 보는 역사관이 존재한다.[박문기, 《맥이》, 정신세계사, 1987.] 그러나 진(秦)나라 이전의 동이와 한(漢)나라 이후의 동이는 전혀 다른 존재로서, 한민족이 속해 있는 동이는 한나라 이후의 동이이기 때문에 진나라 이전의 개념인 삼황오제의 동이 여부와 한민족은 관련이 없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이성규, 〈선진 문헌에 보이는 '동이'의 성격〉, 《한국고대사논총》제1집, 1991.] 《삼국사기》에는, 신라인과 가야인은 그 조상을 소호 금천씨라고 했고, 고구려인은 그 조상을 제곡 고신씨 또는 전욱 고양씨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20세기 이후에 공개된 《환단고기》와 같은 일부 서적에는 삼황오제 가운데 일부 혹은 전부를 동이나 한민족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환단고기》는 위서로 의심되고 있기 때문에 국사학계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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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의 내용을 정리해서 옮겼음...
<위키피디아>에서는 주로 중국의 사료인 십팔사략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또한 마지막에 삼황오제와 우리 민족과의 연관성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는데, 고대사가 심각하게 왜곡된 상황의 시점에서 '삼황오제'의 기원이 우리 민족이었다는 주장이 가끔은 우리의 내면의 자부심을 일깨워주기도 하지만, '과거에는 그렇게 잘 나갔는데 요즘에는 왜 이러나?'라는 자괴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국사학계에서는 <환단고기>가 위서라고 보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학계에서 인정하고 있는 <삼국사기> 역시 상당한 역사의 왜곡에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동북공정의 중국, 임나일본부의 일본... 다들 역사왜곡의 달인으로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 안타까움은 오늘날 식민사관에 머물러 있는 우리의 모습도 있지만,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사실을 나름대로 후손에게 정직하게 알려줄 필요가 있었는데, 우리의 선조들은 그렇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의 비호 아래에 있는 지방 정부의 하나로 인정받을 수 있다면, 간과 쓸개를 모두 빼어줄 것처럼 비굴하게 행동했던 사대주의적인 지도자들은 오늘날과는 달리 과거에는 대놓고 주장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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