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베르트 1세(Charibert I, AD. 517~567년) : 재위 : 561~567년
- 파리의 왕(King of Paris)
재위 : 561년 ~ 567년
전임자 : 클로타르 1세
후임자 : 왕국 분할 - 출생 : 약 517년
- 사망 : 567년 12월 (약 50세)
- 매장지 : 블라비아 성 (Blavia castellum), 트락타투스 아르모리카니(Tractatus Armoricani)
- 배우자 :
잉고베르가 (Ingoberga)
테우데킬트 (Theudechild, 566년에 결혼) - 자녀 :
쾰른의 블리티드 (Blithide of Cologne)
켄트의 베르타 (Bertha of Kent)
헤스바예의 카리베르트(Charibert of Hesbaye)
클리토리스(Clithorice)
클로타르(Chlothar) - 왕조 : 메로빙거 왕조
- 아버지 : 클로타르 1세
- 어머니 : 잉군트 (Ingund)
- 종교 : 칼케돈 기독교 (훗날 파문됨)
【기원후 517년】
- 카리베르트 1세(프랑스어: Caribert; 라틴어: Charibertus; 약 517년 – 567년 12월)는 파리의 메로빙거 왕이자, 클로타르 1세와 그의 첫 번째 아내 잉군드(Ingund)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의 형인 군타르(Gunthar)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
【기원후 556년】
- 556년, 클로타르는 반란을 일으킨 의붓어머니 “훈나(Chunna)”와 의붓동생 “크람(Chramn)”에 맞서 아들 카리베르트와 군트람(막내)을 보냈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크람은 리무쟁의 블랙 마운틴에 숨어 있었다. 협상이 결렬되자 양측 군대는 전투를 준비했다. 그러나 천둥번개로 인해 교전이 불가능했고, 크람은 (블랙 마운틴에 숨어 있다가) 위조된 편지를 형제들(카리베르트와 군트람)에게 보내 그들의 아버지(클로타르)가 사망했다는 거짓 정보를 알렸다. 카리베르트와 군트람은 즉시 부르군디로 돌아가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려 했다.
【기원후 561년】
- 그는 561년 아버지의 사망 이후 이루어진 프랑크 왕국 분할에서 참여하여, 옛 킬데베르트 1세의 왕국을 받았고, 파리를 수도로 삼았다.
- 카리베르트는 파리를 수도로 하는 네우스트리아(솜과 루아르 사이의 지역), 아키텐, 노벰포풀라나를 받았다. 그의 다른 주요 도시로는 루앙, 투르, 푸아티에, 리모주, 보르도, 툴루즈, 카오르, 알비가 있었다. 군트람은 부르군디를 받았다. 시제베르트는 메츠를 수도로 하는 아우스트라시아(랭스 포함)를 받았고, 막내 동생 킬페릭은 수아송을 수도로 하는 작은 왕국을 받았다.
【결혼 생활】
- 카리베르트는 잉고베르가(Ingoberga)와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었다:
- 쾰른의 블리티드(Blithide) (538–603), 아마도 갈로-로마 원로원 의원 안스베르투스와 결혼했을 것이다.
- 헤스바예의 카리베르트(Charibert of Hesbaye) (d. 636)
- 클리토리스(Clithorice) (541–569)
- 베르타(Bertha), 켄트의 애설버트와 결혼
- 클로타르(Chlothar) (542)
- 카리베르트의 딸 베르타는 이교도였던 켄트의 애설버트(Æthelberht) 왕과 결혼했다. 그녀는 리우드하르트(Liudhard) 주교를 자신의 개인 고해 신부로 동반했다. 켄트 궁정에서 그녀의 영향력은 597년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 of Canterbury) 선교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최초의 앵글로색슨 통치자를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다.
【기원후 567년】 파문과 죽음
- 카리베르트는 언변이 뛰어나고 법률에 능통했지만, 투르의 그레고리는 그를 초기 메로빙거 왕들 중 가장 방탕한 인물 중 한 명으로 보았다.
- 그는 동시에 네 명의 아내를 두었고, 그 중 두 명은 자매였다. 이로 인해 그는 게르마누스에게 파문당했다. 이는 메로빙거 왕으로는 최초의 파문이었다. 그 결과, 그는 트락투스 아르모리카누스(Tractus Armoricanus)에 있는 요새 블라비아 카스텔룸(Blavia castellum)에서 불명예스럽게 묻혔다.
- 그가 죽자 그의 형제들은 그의 왕국을 그들 사이에 분할하기로 합의했으며, 처음에는 파리를 공동으로 소유하기로 했다.
- 그의 살아남은 왕비(네 명 중 한 명)인 테우데킬드(Theudechild)는 군트람과의 결혼을 제안했지만, 557년 파리에서 열린 공의회는 그러한 결합을 근친상간으로 금지했다. 군트람은 마지못해 그녀를 아를의 수녀원에 더 안전하게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 그의 사생아인 헤스바예의 카리베르트는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 카리베르트의 생애에 대한 주요 자료는 투르의 그레고리가 쓴 『프랑크족의 역사』(제4권 3,16,22,26장 및 제9권 26장)와 영국 관점에서 베다의 『앵글로색슨인의 교회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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