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18일 목요일

클로타르 1세(Chlothar I, AD. 500~561년) : 재위 AD. 511~561년

클로타르 1세(Chlothar I, AD. 500~561년) : 재위 AD. 511~561년

 
  • 수아송의 왕(King of Soissons) : 511~558
  • 오를레앙의 왕(King of Orléans) : 524~558(형 클로도메르 사망 후 계승)
  • 랭스의 왕(King of Reims) : 555~558(테우데발트 사망 후 계승)
  • 파리의 왕(King of Paris) : 558(칠데베르트 1세 사망 후 계승)
  • 프랑크 왕국의 왕(통일, King of the Franks) : 558~561(클로비스 1세 이후 공백이던 왕위 계승)
  • 출생 : 500년경
  • 사망 : 56112, 콩피에뉴
  • 배우자 :
    군테우크(Guntheuc), 라데군드(Radegund), 인군트(Ingund), 아레군트(Aregund), 훈시나( Chunsina)
  • 자녀 :
    잉군드(Ingund) : 군타르(Gunthar), 킬데릭(Childeric), 카리베르트(Charibert), 군트람(Guntram), 시제베르트(Sigebert), 그리고 클로트신드(Chlothsind)라는 이름의 딸을 두었다.
    아레군드(Aregund) : 킬페릭(Chilperic)
    쿤시네(Chunsine) : 크람(Chram)
  • 가문 : 메로빙거 왕조(Merovingians)
  • 종교 : 칼케돈파 기독교
 
클로타르 1(Clotaire I, 때로는 노인[le Vieux]”이라 불림, 56112월 사망)는 메로빙거 왕조의 프랑크족 왕이자 클로비스 1세의 네 아들 중 한 명이다. ‘클로타르라는 이름은 영광을 의미한다.
 
  1. 테우데리크(485533/34)가 클로비스 1세와 첫 번째 아내의 아들
  2. 클로도메르(495524)
  3. 킬데베르트 1(496558)
  4. 클로타르는 클로비스 1세와 그의 두 번째 아내 클로틸드 왕비의 살아남은 아들 중 세 번째였다.
  5. 여동생 클로틸드(500531)
 

프랑크 왕국의 분할

 
클로타르의 아버지인 클로비스 1세는 니케아 기독교로 개종했지만, 클로타르는 다른 메로빙거 왕들처럼 기독교의 일부일처제 교리가 왕족에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개인적인 동기보다는 정치적 편의와 동맹 형성을 목적으로 다섯 명의 아내를 두었다. 왕비들의 권유로 여러 새로운 교회 건물에 돈을 기부했지만, 그는 열성적인 기독교인이라기보다는 교회 재산에 세금을 도입하는 데 성공한 인물이었다.
 
당시 프랑크족의 관습은 특히 왕족 사이에서 일부다처제를 허용했다. 그래서 왕이 여러 아내를 두고 사망 시 여러 경쟁 상속자를 두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이는 교회의 영향을 받은 후기 로마의 일부일처제 관습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었다. 프랑크족 통치자들은 로마 제국 붕괴 이후 더 넓은 영토에 걸쳐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주로 이 관행을 따랐다. 목적은 지역 지도자들을 달래어 평화를 유지하고 왕국의 보존을 확실히 하는 것이었다.
 
게르만 전통에서 계승권은 아들이 아닌 동생, 삼촌, 사촌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살리카 법에 따라 클로비스 1세는 모든 면에서 아들들이 주요 상속자가 되는 관습을 제정했다. 하지만 이는 장자가 상속의 대부분을 받는 장자 상속제가 아니라 모든 아들들 사이에 상속이 균등하게 분할되는 시스템이었다. 따라서 더 큰 프랑크 왕국은 종종 더 작은 하위 왕국들로 분열되었다.
 

기원후 511클로타르, 자신의 몫을 받다

 
5111127일 아버지가 사망하자, 클로타르는 왕국의 자신의 몫으로 다음을 받았다: 그가 수도로 삼은 수아송 마을; 라옹, 노용, 캉브레, 마스트리히트 도시들; 그리고 뫼즈 강의 하류. 그는 매우 야심찼고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고자 했다.
어머니들의 권리 때문에, 왕비들은 아들 왕국의 일부를 받았다. 클로비스 1세는 두 명의 아내를 두었기 때문에, 그의 왕국을 각 아내를 위해 둘로 나누고, 그 다음 각각의 아들들에게 조각을 나누어주었다. 첫 번째 아내의 아들인 장남 테우데리크는 프랑키아 왕국의 절반인 랭스를 받는 혜택을 누렸다. 클로타르는 형제인 킬데베르트와 클로도메르와 함께 왕국의 나머지 절반을 공유했다. 클로타르는 북부 지역을, 킬데베르트는 파리의 중앙 왕국을, 클로도메르는 오를레앙의 남부 왕국을 받았다. 클로타르가 상속받은 영토는 두 개의 뚜렷한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하나는 살리안 프랑크족의 왕국에 해당하는 골리아 벨기에(Gaulic Belgium) 지역으로, 그는 수아송에 수도를 세웠고 아미앵, 아라스, -캉탱, 투르네 교구를 포함했다; 다른 하나는 아젠, 바자스, 페리괴 교구를 포함하는 아퀴탄 지역이었다.
511년에 클로타르 1세와 그의 세 형제인 테우데리크, 클로도메르, 킬데베르트는 아버지 왕국의 몫을 상속받았다. 클로타르는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일생 대부분을 친척들과 이웃 왕국들을 희생시키며 모든 방향으로 군사 작전을 펼쳤다. 생애 말기에 클로타르는 형제들보다 오래 살아남아 그들의 영토를 점령함으로써 프랑키아를 재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자신의 사망 시, 프랑크 왕국은 다시 살아남은 네 아들들 사이에 분할되었다. 다섯 번째 아들은 반란을 일으켰다가 가족과 함께 살해당했다.

클로타르 1세의 영토 확장 과정
클로타르 1세의 영토 확장 과정
 

1차 부르군트 전쟁516~524

 

[기원후 516]

516, 부르군트의 왕 군도바드가 사망하고, 왕위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그의 아들 시기스문트에게 넘어갔다. 시기스문트는 극단적인 반아리우스파 정책을 채택하여, 동고트족 왕 테오도릭 대왕의 손자인 아리우스파 아들 시게릭을 처형하기까지 했다. 시기스문트는 또한 프랑크족이 그를 향해 공격을 시작하도록 거의 부추겼지만, 그는 자신의 딸 중 한 명인 수아베고타를 클로타르의 이복형제인 테우데리크 1세와 결혼시킴으로써 갈등을 피했다.
 

[기원후 523]

523, 어머니 클로틸드의 부추김으로, 클로타르, 킬데베르트, 클로도메르는 부르군트족에 대한 원정에서 힘을 합쳤다. 부르군트 군대는 패배했고, 시기스문트는 포로로 잡혀 처형되었다. 시기스문트의 형제 고도마르가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왕위를 계승했고, 프랑크족은 철수해야 했다.
 

[기원후 524]

524, 클로타르, 그의 형제들, 그리고 테우데리크는 이제르 계곡까지 진군하며 새로운 전투를 시작했다. 그러나 524625, 그들은 베제롱스 전투에서 심각한 패배를 당했고, 클로도메르는 전사했다. 프랑크족은 부르군트를 떠났고, 고도마르는 534년까지 그의 통치를 재개했다.
 

기원후 524군테우크와의 결혼

클로타르는 오를레앙의 여왕이자 그의 형제 클로도메르의 미망인인 군테우크와 결혼했다. 이 결합은 클로타르에게 클로도메르의 보물창고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고, 군테우크가 고데기셀 왕의 영토에 대한 유일한 상속녀로서의 지위를 확보했다. 프랑크족 법은 여성이 아들이 없을 경우 땅을 상속받을 수 있도록 허용했다 .
 

기원후 524오를레앙 왕국의 획득

클로타르는 524년 자신의 형제 클로도메르의 자녀들을 살해하는 데 주요 선동자였으며, 그의 전리품 몫은 투르와 푸아티에 도시들로 구성되었다. 클로타르의 형제인 클로도메르는 524625일 베제롱스 전투에서 부르군트족을 상대로 한 원정 중에 사망했다. 클로도메르가 사망하자, 그의 세 아들인 테오데발트(Theodebald), 군타르(Gunther), 클로도알트(Clodoald)는 할머니의 보호를 받게 되었고, 따라서 어린 왕자들은 클로도메르의 어머니인 클로틸드에 의해 파리에서 양육되었다.
 

기원후 531튀링기아 정복

 
531, 튀링기아의 왕 헤르마나프리드(Hermanafrid)는 클로타르의 이복형제인 테우데리크에게 자신의 라이벌이자 형제인 바데릭(Baderic)을 몰아내는 것을 도와준다면 튀링기아 왕국의 일부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테우데리크는 이를 수락했다. 그러나 승리 후 부상을 입게 되자, 그는 클로타르에게 전쟁을 계속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무렵 헤르마나프리드가 사망했고, 목표는 단순히 튀링기아를 정복하는 것이 되었다.
테우데베르트 1세 조카의 도움을 받은 이 동맹은 튀링기아를 정복했고, 튀링기아는 프랑크 영토의 일부가 되었다. 전리품을 나누는 과정에서 클로타르와 테우데리크는 라데군드 공주의 손을 두고 격렬하게 다투었지만, 결국 클로타르가 자신의 부하들이 그녀를 포로로 잡았다는 이유로 분쟁에서 이겼다.
 

기원후 532

 
오를레앙 왕국이 조카들에게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클로타르는 532년 형제 킬데베르트와 함께 어린 상속자들이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에 동의하지 않으면 죽음으로 위협했다. 그들은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Sidonius Apollinaris)의 손자인 아르카디우스(Arcadius)를 가위와 검을 들고 그들의 어머니 클로틸드에게 보냈다. 그는 왕비에게 최후통첩을 주었다: 소년들은 수도사로 살거나 죽을 수 있었다.
 
게르만 전통에 따르면 클로틸드 왕비는 어머니로서 자신의 가정의 수장이 될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왕들 사이에서 혈통은 다음 세대로 넘어가기 전에 먼저 동생들에게 넘어갔다. 부족 정치 때문에, 소년들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은 내전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긴 머리카락은 프랑크족 왕권의 상징이었으며, 이를 제거하는 것은 심각한 모욕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테오데발트, 군타르, 클로도알트는 언젠가 왕위를 주장할 수 있었고, 클로타르와 킬데베르트는 그들에게 권위를 넘겨줄 의무가 있었다.
 
클로틸드는 아르카디우스가 전달한 요구에 역겨움과 충격을 받았으며, 손자들의 머리가 잘리는 것을 보는 것보다 차라리 그들이 죽는 것을 보겠다고 말했다.
 

[티보와 군타르의 암살]

 
두 삼촌은 아이들을 살해하는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클로타르는 테오데발트의 겨드랑이를 찔렀다. 군타르는 킬데베르트의 발 앞에 엎드려 애원했고, 킬데베르트는 울기 시작하며 거의 조카의 간청에 굴복할 뻔했다. 그러나 클로타르는 킬데베르트가 살인을 끝까지 실행할 것을 요구했고, 이것이 권력을 공고히 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킬데베르트는 군타르를 클로타르에게 넘겼고, 클로타르는 그를 찔렀다. 테오데발트와 군타르는 각각 열 살과 일곱 살이었다.
 
클로도알트는 충성스러운 지지자들에 의해 숨겨져 탈출하는 데 성공하여 살아남았다. 그는 모든 주장을 포기하고 수도원 생활을 선택했다. 킬데베르트와 클로타르는 그 후 획득한 영토를 자유롭게 공유할 수 있었다. 한편, 테우데리크는 옥세루아, 베리, 상스로 구성된 일부 지역을 점령했다.
 

2차 부르군트 전쟁532~534

 

[기원후 532]

532, 킬데베르트와 클로타르는 오턴을 점령했다. 그들은 시기스문트의 형제 고도마르 3세를 찾아 나섰는데, 이때 그의 아버지이자 동맹인 동고트족의 왕 테오도릭 대왕의 도움을 받았다.
 

[기원후 534]

534, 테오도릭 대왕의 손자이자 후계자인 아탈라릭의 죽음은 부르군트의 동맹이었던 동고트 왕국에 계승 위기를 불러왔다. 클로타르, 테우데베르트, 킬데베르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동고트족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부르군트 왕국을 침공했다. 부르군트 왕국은 정복되어 세 프랑크 통치자들 사이에 분할되었다. 클로타르는 그르노블, , 그리고 많은 이웃 도시들을 차지했다.
 

기원후 533~538아레군드와의 결혼

 
클로타르의 아내 잉군드는 그에게 자신의 자매 아레군드에게 걸맞은 남편을 찾아달라고 요청했다. 적합한 사람을 찾지 못한 클로타르는 아레군드를 자신의 아내 중 한 명으로 삼았다. 이 일은 약 533-538년경에 일어났다. 그녀는 자매인 잉군드가 546년에 사망할 때까지 클로타르의 아내로 남아 있었으며, 그 후 클로타르의 총애를 잃었다.
 

기원후 5341차 비시고트 전쟁

 
수년에 걸쳐 스페인 비시고트족은 프랑크 영토를 여러 차례 침략하여 영토를 빼앗아갔다. 클로비스는 이 지역들을 재정복하고 더 나아가 고트족 영토를 확장하기도 했다. 클로타르는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장남들을 보냈다.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그의 둘째 아들 군타르는 원정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장남 테우데베르트는 전쟁을 계속하여 디오--발키에르와 카브리에르의 요새들을 점령했다. 대부분의 잃어버린 프랑크 영토가 회복되었다.
 

[기원후 534년 테우데리크 사망]

클로타르는 이 시기 테우데리크의 병세를 이용해 킬데베르트의 도움을 받아 그의 왕국을 차지하려 했다. 그러나 아를을 확보하느라 바빴던 테우데베르트는 아버지 테우데리크를 돕기 위해 서둘러 돌아왔다. 테우데리크는 며칠 후 사망했다. 그리고 테우데베르트는 봉신들의 지지를 받아 자신의 왕국을 지켜냈고 삼촌들이 차지하는 것을 막았다.
 
킬데베르트와 테우데베르트는 힘을 합쳐 클로타르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클로타르를 물리쳐, 그를 동맹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숲으로 피신하게 만들었다. 클로타르가 포위되어 있는 동안, 폭풍이 장비, 도로, 말 등을 파괴하고 연합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킬데베르트와 테우데베르트는 포위를 풀고 클로타르와 화해할 수밖에 없었다.
 

기원후 537프로방스의 할양


537, 동로마 제국과 동고트 왕국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 이 분쟁에서 프랑크족의 중립을 보장하기 위해, 비티게스 왕은 프랑크 왕들이 공유하던 프로방스와 함께 북부 알프스를 제공했다. 또한 상 라인 계곡, 마인, 그리고 상류 다뉴브를 장악함으로써 알레만니족에 대한 주권도 함께 양도했다. 동고트족이 프랑크족에게 프로방스를 할양했을 때, 클로타르는 오랑주, 카르팡트라, 갭 도시들을 받았다.
 

기원후 538라데군드와의 결혼

 
538년에 라데군드는 클로타르와 결혼하기 위해 수아송으로 보내졌다. 그녀는 불법적이지 않고 합법적인 왕비로서, 클로타르가 튀링기아에 대한 지배력을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그녀는 기독교 신앙 때문으로 호화스럽게 보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녀의 충성은 하나님에게 먼저, 클로타르에게는 두 번째였다. 클로타르는 이에 짜증을 냈고 그녀와 많은 갈등을 겪었다. 그녀는 수녀원으로 은퇴하여 푸아티에에 유럽 최초의 수녀원인 성 십자가 수도원(St. Croix)을 설립했다. 그녀는 성 라데군드(Saint Radegund)로 시성되었다.
 

기원후 5422차 비시고트 전쟁

 
542년 봄, 킬데베르트와 클로타르는 그의 세 아들과 함께 비시고트의 히스파니아로 군대를 이끌었다. 그들은 팜플로나와 사라고사를 점령했지만 결국 대부분의 국가를 정복한 후 철수해야만 했다. 왕의 군대 대부분이 여전히 테우디스와 함께 있었고 보여줄 수 있는 충분한 힘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피레네 산맥 너머의 주요 영토를 양도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점령했던 만큼 많은 영토는 아니었다.
 

투스칸 공물

 
테오도릭 대왕의 딸이자 클로비스 1세의 누이 오도플레다의 딸인 아말라순타가 투스카니의 테오다하드 왕의 손에 살해당한 사건으로 인해 클로타르는 공물을 받지 못할 경우 침공하겠다고 위협했다. 전쟁을 피하기 위한 합의는 투스칸 왕이 금과 땅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킬데베르트와 테우데베르트는 클로타르를 속여, 킬데베르트는 돈을, 테우데베르트는 테오다하드의 후계자 비티게스가 넘겨준 땅을 차지했다. 그럼에도 클로타르의 보물창고는 킬데베르트나 테우데베르트의 것보다 여전히 훨씬 더 컸다.
 

기원후 555메츠의 획득

 
클로타르의 손위 조카이자 고인이 된 테우데리크의 손자인 테우데발트가 555년에 후사 없이 사망했다. 클로타르는 즉시 메츠로 가서 죽은 조카의 왕국을 차지하려 했지만, 살리카 법에 따라 형제와 공유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테우데발트의 미망인이자 롬바르드 왕 바코의 딸인 발드라다와 결혼했다. 이는 테우데베르트 통치 시대부터 확립된 롬바르드와의 동맹뿐만 아니라 메츠 왕국으로의 순조로운 계승을 보장했다. 그러나 주교들은 이 근친상간적 결혼을 비난하고 클로타르에게 이혼을 강요했다. 그들은 그녀를 바바리아 공작 가리발트와 결혼시켰다. 발드라다(불데트라드)와의 결혼 파탄에 대한 보상으로, 클로타르는 자신의 딸 클로트신드를 롬바르드 왕자이자 미래의 왕인 알보인에게 시집보냈다. 테우데발트 왕의 궁전의 위대한 관리자였던 콘다트 도메스티쿠스는 메츠 왕국 합병 후에도 자리를 유지했다 .
 

기원후 555색슨 전쟁

 
555, 클로타르는 반란을 일으킨 색슨족을 공격하여 정복했다. 이들은 베저 상류, 엘베, 북해 연안에 살고 있었다. 복종의 표시로 클로타르는 그들에게 상당한 연간 공물을 요구했고, 한동안 색슨족으로부터 매년 500마리의 소를 공물로 받았다.
 

기원후 555~556색슨족 반란

 
555년과 556년 사이에 색슨족은 다시 반란을 일으켰는데, 아마도 킬데베르트의 선동이 있었을 것이다. 색슨족의 반란과 학살 위협에 직면하여, 클로타르는 전투보다 평화 회담을 선호했다. 그는 이전에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공물을 계속 지불한다는 그의 요구를 받아들이면 전투를 포기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그의 병사들은 공격적이고 전투에 열망하여 그의 결정에 반발했다. 병사들이 모욕과 죽음의 위협으로 그에게 색슨족과 맞서도록 강요하자 회담은 중단되었다. 엄청나게 피비린내 나는 전투 후, 색슨족과 프랑크족은 평화를 맺었다.
 

오베르뉴의 복속

 
한때 번영했던 로마 속주였던 오베르뉴는 비시고트족과 프랑크족에 저항했지만, 충성을 바침으로써 파괴를 피할 수 있기를 바랐다. 테우데리크는 이 땅의 많은 부분을 황폐화시켰고, 테우데베르트는 원로원 가문 출신의 갈로-로마 여성과 결혼함으로써 이 땅을 평정했다. 테오데발트의 죽음을 예상하며, 클로타르는 그의 아들 크람을 보내 이 지역을 차지하게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크람은 더 넓은 지역을 통제하게 되었고 아버지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 그는 정치적으로 킬데베르트와 연합했고, 킬데베르트는 그의 불만을 부추겼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영향력은 푸아티에, 투르, 리모주, 클레르몽, 부르주, 르 퓌, 자볼, 로데, 카오르, 알비, 툴루즈로 확장되었다.
 

크람과의 전쟁

 
클로타르는 다시 색슨족과의 전쟁에 참여했다. 그는 아들 카리베르트와 군트람을 보내 크람에 맞서 군대를 이끌게 했다. 그들은 오베르뉴와 리모주로 진군하여 마침내 생조르주니그레몽에서 크람을 발견했다. 그들의 군대는 "검은 산" 기슭에서 만나 크람에게 아버지에게 속한 땅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크람은 이를 거부했지만, 폭풍으로 인해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크람은 자신의 이복형제들에게 사자를 보내 색슨족의 손에 클로타르가 사망했다는 거짓 정보를 전했다. 카리베르트와 군트람은 즉시 부르군디로 행군했다. 클로타르가 색소니에서 사망했다는 소문은 골 전역에 퍼졌고, 킬데베르트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킬데베르트도 이 소문의 배후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크람은 이 기회를 이용해 샬롱쉬르손까지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는 도시를 포위하고 승리했다. 크람은 킬데베르트의 권위 하에 있던 오를레앙 백작 빌리아카이레(윌라카리우스)의 딸 칼다와 결혼했다.
 

【기원후 558년, 모든 프랑키아의 통일

 

[기원후 558]

5581223, 킬데베르트는 오랜 병을 앓다가 후사 없이 사망했다. 이로써 클로타르는 아버지 클로비스가 그랬던 것처럼 대 프랑크 왕국을 재통일하고 형제의 보물을 차지할 수 있었다.
킬데베르트의 죽음 소식은 많은 왕국들이 클로타르 아래 통일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에게 맞서 싸웠던 파리도 그의 통치에 복종했다. 따라서 크람은 브르타뉴인들에게 그를 피난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현재 투르의 생 마르탱 성당에 피신해 있던 장인 오를레앙 백작 윌라카리우스와 그런 협약을 맺었다. 크람은 체포되어 윌리아카이레와 그의 아내가 저지른 죄와 스캔들로 인해화형에 처해졌다. 클로타르는 그 후 성당을 복원했다.
 

[기원후 559]

55991일과 831일 사이, 브르타뉴인들의 도움으로 크람은 아버지에게 속한 많은 장소를 약탈하고 파괴했다.
 

[기원후 560]

클로타르는 아들 킬페릭과 함께 돔노네로 진군하여 56011월이나 12월에 도착했다. 해안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코노모르는 패배하고 도주하려다 살해되었다. 코노모르는 해협 양쪽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크람은 아마도 코노모르의 지원을 받아 클로타르를 피해 영국으로 도망치려 했을 것이다. 크람은 바다로 도망쳤지만, 먼저 아내와 딸들을 구출하려 시도했다. 그는 체포되어 즉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와 그의 아내, 딸들은 오두막에 갇혀 교살당한 후 화형되었다. 후회에 압도된 클로타르는 투르로 가서 생 마르탱의 무덤에 용서를 빌었고, 얼마 후 콩피에뉴의 왕궁에서 사망했다.
 

기원후 561교회와의 관계


561, 클로타르는 로마법에 의해 부여된 면세 혜택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려 했다. 이 면세 혜택은 과거 왕들에 의해 정기적으로 확인되었으며, 킬데릭 1세는 성직자들에게 면제권을 부여했었다. 투르의 주교 인주리오수스(Injuriosus)는 이를 거부하고, 교구를 떠나 클로타르를 버렸다. 주교의 죽음 후, 왕은 바우딘(Baudin)이라는 자신의 가신으로 그를 대체했다. 비슷하게, 클로타르는 트리어의 주교 니지에르(Nizier)가 교회법에 대해 융통성이 없다는 이유로 그를 추방했다. 이로써 교회에 대한 과세는 유지되었다.
잉군드와 클로타르는 오세르의 생 제르맹 무덤 장식을 포함하여 많은 교회에 기부를 했다. 왕이 하사한 성배와 함께 성당은 보존되었다.
여성 수도원 운동 : 클로타르는 라데군드가 은신한 푸아티에의 생트-크루아 수도원 건설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그는 왕비가 왕과 함께 지내는 동안 모았던 성물들을 생 크루아 수도원으로 이전했다.
 

기원후 561죽음과 계승

 
통치 말기에 프랑크 왕국은 전성기를 맞이하여, 골 전체(셉티마니아 제외)와 현재 독일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었다. 클로타르는 561년 말에 64세의 나이로 급성 폐렴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왕국은 네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그들은 그를 수아송의 생 마리 성당에 묻었는데, 이곳은 그가 생 메다르의 무덤을 짓기 시작한 곳이다.
 
  • 카리베르트는 파리를 수도로 하고 파리 분지, 아퀴타니아, 프로방스를 포함하는 솜과 피레네 산맥 사이의 킬데베르트 1세의 옛 왕국을 받았다.
  • 군트람은 오를레앙 왕국의 일부와 함께 부르군디를 받았으며, 그곳에 수도를 세웠다.
  • 시제베르트는 랭스와 메츠를 수도로 하는 메츠 왕국을 받았다.
  • 킬페릭은 수아송 왕국 북부의 영토들을 받았다.
561년 클로타르 1세 사후 제국의 분할
561년 클로타르 1세 사후 제국의 분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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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우리(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牟義理),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모우리 (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 ( 牟義理 )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   【 1878 년 】 미국 오하이오주 벨빌 (Bellville) 근교에서 사무엘 모우리 (Samuel Mowry, 1850-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