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7세(Charles VII, 1403–1461) : ‘부르주의 왕’에서 승리자로
샤를 7세(Charles VII, 1403–1461)는 백년전쟁 후반 프랑스의 반전을 이끈 군주다. 즉위 직후 영국과 부르고뉴 동맹에 밀려 ‘부르주의 왕’이라 불렸으나, 잔다르크의 지원과 군제 개혁, 외교적 전환을 통해 주도권을 회복한다. 1429년 랭스 대관 이후 체계적 재정·군사 개혁을 추진하고, 1453년 카스티용 전투로 전쟁의 종결을 이끈다. 그의 치세는 상비군과 포병의 제도화, 왕권 회복, 교회 문제에서의 독자노선 확립으로 특징지어진다.
1. 초기 일생
1) 출생 이후
샤를은 1403년 2월 22일 파리에서 태어난다. 부친은 샤를 6세(Charles VI, 1368–1422), 모친은 바이에른의 이자보(Isabeau of Bavaria, c.1370–1435)다. 발루아 왕가 일원으로, 소년기부터 왕실 내분과 백년전쟁의 심화 속에서 성장한다. 1417년 형들이 잇달아 사망하면서 여러 작위와 도팽 지위를 잇게 되는 기반이 형성된다.
2) 비엔누아의 도팽(Dauphin)
1417년 샤를은 비엔누아의 도팽이 된다. 그러나 프랑스 내부에서는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의 내전이 지속되고, 대외적으로는 잉글랜드의 압박이 거세진다. 도팽으로서 그는 루아르 남쪽 부르주를 중심으로 궁정을 꾸리며 생존을 도모한다. 당시 파리와 랭스가 잉글랜드·부르고뉴 세력권에 있었기에 합법성의 기반도 취약했다.
3) 트루아 조약(Treaty of Troyes)
1420년 트루아 조약은 샤를에게 결정적 타격을 준다. 샤를 6세는 잉글랜드의 헨리 5세(Henry V, 1386–1422)와 맺은 조약에서 도팽 샤를을 왕위 계승에서 배제하고, 헨리 5세와 그 후손을 프랑스 왕위의 합법적 상속인으로 인정한다. 이는 샤를의 정통성에 치명타였고, 이후 그의 통치는 ‘반(反)조약’의 실천과 합법성 회복의 서사로 전개된다.
2. 브르주의 왕(King of Bourges)
1) 오를레앙 공방전(Siege of Orléans)
샤를은 루아르 남쪽 부르주로 물러나며 ‘부르주의 왕’이라 조롱받는다. 전세 반전의 분기점은 1429년 오를레앙 공방전이다. 잔다르크(Jeanne d’Arc, c.1412–1431)와 장 드 뒤누아(Jean de Dunois, 1402–1468)가 프랑스군을 이끌어 오를레앙 포위를 돌파하고, 루아르 일대의 요충을 잇달아 수복한다. 이 승리는 군사적 성과를 넘어 사기와 정통성 회복을 이끈 촉매제였다.
2) 샤를의 대관식
오를레앙 이후 프랑스 측은 파타이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격파하고, 민심이 돌아선 랭스에 입성해 1429년 샤를의 대관식을 거행한다. 대관은 상징 질서의 복원을 의미했다. 1435년에는 부르고뉴와 아라스 조약을 체결해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이탈하게 만든다. 이어 1436년 파리를 회복하고, 1440년대에는 개편된 상비군과 공성포를 활용해 노르망디를 단계적으로 탈환한다. 1453년 카스티용 전투 이후 잉글랜드는 칼레 지대를 제외한 대륙 점령지를 모두 상실한다. 이로써 백년전쟁은 프랑스의 우세로 사실상 종결된다.
3) 재위 후반
샤를은 군사ㆍ재정의 제도화를 추진한다. 전문화된 상비군 편성, 포병 강화, 왕실 재정 기반 확충이 병행된다. 1432년 푸아티에 대학 설립으로 행정ㆍ법학 인재 양성을 도모한다. 1438년 부르주 칙서는 프랑스 교회의 자주권을 강화하고 교황권의 개입을 제한하는 내용을 담아 교회-국가 관계의 전환을 보여준다. 이러한 정책은 왕권의 실효성을 높이고 왕국의 장기적 안정을 도왔다 .
4) 샤를의 유산
샤를의 유산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군사 혁신과 중앙집권 강화다. 상비군과 포병의 제도화는 이후 발루아ㆍ부르봉 군주국가의 기초가 된다. 둘째, 외교의 복원력이다. 아라스 조약을 통해 부르고뉴를 이탈시키며 전쟁의 판세를 뒤집었다. 셋째, 종교정책의 자주성이다. 부르주 칙서를 통해 프랑스 교회가 로마 교황권에 대해 독자적 권한을 주장하는 근거가 마련된다. 그의 치세는 ‘패전의 벼랑’에서 ‘왕국 재건’으로 이어진 교과서적 전환 사례로 평가된다.
3. 가족 관계
1) 자녀
샤를은 1422년 12월 18일 앙주의 마리(Marie of Anjou, 1404–1463)와 혼인한다. 두 사람은 모두 장 2세의 증손에 해당하며, 슬하에 열네 명의 자녀를 둔다. 합법 서출 가운데에는 루이 11세(Louis XI, 1423–1483), 라데곤드(Radegonde, 1428–1445), 카트린 드 프랑스(Catherine of France, 1428–1446), 욜란드 드 발루아(Yolande of Valois, 1434–1478), 잔 드 프랑스(Jeanne of France, 1435–1482), 마들렌 드 발루아(Magdalena of Valois, 1443–1495), 샤를 드 베리(Charles, Duke of Berry, 1446–1472) 등이 포함된다. 비합법 서출로 마리 드 발루아(Marie de Valois, 1444–1473), 샤를로트 드 브레제(Charlotte de Brézé, 1446–1477)가 전한다 .
2) 연인
말년에 애첼린 드 비그노렐(Agnès Sorel, c.1422–1450)과의 관계가 알려져 있다. 아그네스 소렐은 프랑스 궁정문화에서 왕의 애첩이 정치·문화 후원 네트워크에 편입되는 선례로 자주 언급된다. 또한 안투아네트 드 마니악(Antoinette de Maignac, 생몰년 미상)과 관련된 기록도 전한다. 이러한 개인적 관계는 후대 문학과 회화에서 군주의 사적 세계를 형상화하는 소재가 된다.
3) 혈통
샤를은 카페-발루아 계통의 정통 혈통을 잇는다. 부친 샤를 6세는 발루아 가문의 군주로, 모친 이자보는 바이에른 공가와 연결된다. 이러한 혈통은 프랑스 왕위의 계승 정통성을 상징했으나, 트루아 조약으로 일시적으로 부정되었고, 샤를은 대관과 영토 회복, 왕권 강화로 사실상의 정통성을 회복한다.
4. 샤를 통치의 의미
1) 정치와 제도의 디테일
샤를은 ‘부르주의 왕’ 시절 조세 징수의 일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지방 세입을 재조정하고, 전쟁세 성격의 타일(taille)을 상시적 재원으로 전환하는 토대를 놓는다. 재정 기반 위에서 봉건적 봉사군 의무를 상비군으로 대체하고, 포병 기술과 야금 발전을 흡수한 공성전술로 요새화된 영지를 공략한다. 파리 회복 이후 행정 중심지와 법원의 기능이 정상화되고, 지방 권력과의 타협을 통해 왕령이 확장된다. 푸아티에 대학은 관료·법률가 양성을 통해 중앙집권적 운영을 뒷받침한다.
2) 전쟁 서사의 균형
샤를의 승리는 단일 원인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잔다르크의 종교적 카리스마와 현장 지휘, 지역 귀족과 도시의 협력, 부르고뉴와의 외교 전환, 잉글랜드 측의 내정 불안과 전력 분산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특히 포병과 전문 보병 운용은 중세 말 전쟁 양식을 근대적 군사로 이행시키는 가교 역할을 한다.
3) 문화와 상징
랭스 대관은 왕권 신성화 의례의 복권을 의미한다. ‘부르주의 왕’이라는 멸칭은 대관 이후 정치적 상징 전복을 겪는다. 궁정문화는 후원 체제를 통해 예술과 학문을 진작했고, 왕권의 안정은 프랑스 왕국 정체성의 재정립으로 이어졌다.
5. 백년전쟁을 승리로 이끈 군주
샤를 7세는 백년전쟁 말기 프랑스의 구조적 반전을 이끈 군주다. 트루아 조약으로 정통성이 부정되었지만, 오를레앙 이후의 전세 역전, 랭스 대관, 아라스 조약, 파리와 노르망디 회복, 카스티용의 종결로 왕권을 공고히 한다. 상비군과 포병의 제도화, 재정 기반 확립, 교회의 자주권 강화는 이후 프랑스 절대왕정의 행정·군사적 전제 조건이 된다. 그의 치세는 ‘위기의 관리’에서 ‘국가의 재건’으로 이어지는, 유럽 군주정사에서 드문 전환의 사례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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